영생을 누리는 인간과 죽음을 자초하는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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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소설이 표면상 어떤 내용을 다루건 일관되게 추구하는 주제의 하나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이다. 설령 인간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고 인공지능만 설쳐대거나 외계인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이야기라도 마찬가지다. 리처드 K. 모건의 장편소설 3부작 <얼터드 카본> 연작(2002~2005년)과 이를 원안으로 한 동명의 넷v플릭스 TV시리즈 2시즌(2018/2020년)과 극장판 애니메이션 <얼터드 카본, 못다 한 이야기>(2020년) 역시 그렇다. 이 프랜차이즈 콘텐츠를 관통하는 제1의 관심사는 불사(不死)가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다.

넷플릭스 <얼터드 카본> 시즌2 포스터

넷플릭스 <얼터드 카본> 시즌2 포스터

영생(永生)은 중국 한무제 때 관리 동방삭에게 ‘삼천갑자’란 신화적 오라를 덧씌웠을 만큼 인간계에서는 정말 가능하기만 하면 좀처럼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리라. 인류의 이런 갈망은 과학소설이 냉동인간과 노화유전자 개량을 논하기 훨씬 전부터 세계 각지의 전설과 문학이 신선과 엘프 그리고 심지어 흡혈귀 등을 주요 캐릭터로 등장시켜온 데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환상문학이 흡혈귀를 인간세상과 양립할 수 없는 부정적인 존재로 그렸듯, 대개의 과학소설 또한 실제 과학기술이 얼마나 진보하건 간에 영생의 실현을 그리 곱게 바라보지 않는다. <얼터드 카본>의 주인공 타케시 코바치는 원래 당국이 사회불안을 일소하려 투입한 소요진압부대 정예요원이었으나 인간 수명연장에 반대하는 혁명분자들의 대의에 공감해 체제에 맞선다. 이유는 명쾌하다. 인간의 영혼이 디지털 정보로 저장되어 육체가 파괴되어도 언제든 새로운 몸(뇌)에 이식되어 부활할 수 있게 된 미래, 문제는 부의 재분배가 어느 시대고 고르지 않다 보니 정신이 새로운 육체로 건너뛰는 것이 많은 후유증을 낳는다는 데 있다. 경기불황의 골이 깊어지면 일부 중산층은 높은 대출이자를 감당 못 해 집을 팔고 빈곤층으로 전락하지만, 부자들에게는 이때가 기회다. 헐값에 나온 집들을 마구 사들여 시세차익 보고 호황기에 팔면 더 큰 부자가 될 테니.

<얼터드 카본>의 미래에는 그러한 자산에 육체도 포함된다. 가난뱅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젊고 아름다운 자신의 몸을 부자에게 팔아치운다. 부자는 그렇게 구입한 육체들을 마치 옷장에 걸어두듯 보관했다 내킬 때마다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는다. 육체가 죽으면 목덜미에 삽입된 메모리데이터를 외부서버에 전송하여 새 몸으로 갈아타면 그만이다. 그러나 가난뱅이는 자기 몸을 팔고 오작동 투성이 합성육체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반면 영생하는 부자들은 끝나지 않는 지루한 삶을 즐겁게 해줄 온갖 변태적 방법을 탐닉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중편소설 <바이센테니얼맨>(1976년)과 동명 영화는 이와 대조적인 주제를 던진다. 이것은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못할 것 없으나 단지 인공지능이라는 이유로 인간과 동일한 법적 지위를 얻지 못한 앤드로이드 앤드류 마틴이 인류사회로부터 인간이란 인정을 받기 위해 영생할 수 있는 자기 몸을 부서뜨려 죽음을 자초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에 충실한 것과 인간으로 대우받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인간의 품위를 지켜줄까? 다시 말해 영생이 가치 있을까, 아니면 뜻하는 바가 있는 죽음이 가치 있을까? <얼터드 카본>에서 기억을 잃을까봐 버그가 아무리 심해져도 초기화를 거부하는 인공지능이 영생을 누리는 인간들보다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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