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추락한 이유-예측불허의 범죄, 상처와 결핍 그리고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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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5월의 화요일, 레이철은 남편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데니스 루헤인의 <우리가 추락한 이유>는 이렇게 첫 운을 뗀다. 그러고는 1979년생 레이철이 태어난 시점부터 서른다섯 살이 되는 2014년까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 톤은 시종 한 인간의 몰락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작가 데니스 루헤인은 <미스틱 리버>·<살인자들의 섬>을 비롯해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로 잘 알려진,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범죄소설의 거장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한 여인의 인생을 구간 구간마다 작은 미스터리로 수렴하나 싶더니 결국 거대한 음모와 범죄가 뒤섞인 뜻밖의 경지로까지 나아간다.

데니스 루헤인의 <우리가 추락한 이유> 한국어판 표지 / 황금가지

데니스 루헤인의 <우리가 추락한 이유> 한국어판 표지 / 황금가지

<나를 찾아줘>의 작가 길리언 플린 역시 이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루헤인은 두 권의 책을 썼다. 하나는 정체성과 소속감의 추구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이고, 둘째는 계속 짐작을 거듭하게 만드는 스릴러다. 그런 다음 그 두 권을 바로 이 하나의 대단한 책으로 엮었다.” 그 말 그대로 이 소설은 크게 3부로 나뉘어 있으며, 그중 제1부 ‘거울 속의 레이철’은 1979년부터 2010년까지 레이철의 지난한 성장기에 주목한다. 마치 남편을 사살하기까지 레이철의 불안하고 위태로운 심리에 집중하는 양 그의 감정을 어루만지다 들쑤시며 지극히 섬세한 심리소설임을 ‘가장’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한다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다만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레이철이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떠난 친아버지의 정체를 추리하고 추적하던 전반부와 살인과 음모가 팽배한 후반부의 온도차는 그만큼 상당하다. 이 온도차야말로 레이철이 가까스로 쌓아 올린 삶이 결국 수년간 만들어낸 거짓에 불과했다는 사실로 놀라움을 안기는 결정적 요인이기는 하다. 하지만 레이철의 결혼생활이 철저히 기획된 것이었다는 후반부 ‘큰 그림’만큼이나, 레이철 스스로 결핍을 만회하려는 작은 퍼즐 조각들 또한 무척이나 정교하다.

기자로 승승장구하던 레이철은 강진이 덮친 아이티의 참혹한 실상을 생방송으로 리포트하던 중 공황발작을 일으키면서 커리어를 완전히 망친다. 너무나도 무거운 슬픔에 짓눌린 다음에서야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고, 왜 어머니가 그에게서 아버지를 감추려 했는지를 깨닫는다. 그렇게 그의 생애 가장 큰 미스터리는 일단락된다.

그리고 마치 앞으로도 살아갈 날이 많다는 듯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레이철은 곧 방송국에서도 잘리고 방송국 PD였던 남편과도 소원해진다. 집 밖으로는 한 발짝도 못 나갈 만큼 대인기피와 공황장애는 점점 더 심해진다. 그러던 중 과거 아버지를 탐문해주던 조사원 브라이언과 재회하고 그와 재혼하면서 그의 삶에도 한 줄기 빛이 찾아온다. 그러나 완벽해 보이던 남편의 수상쩍은 행동을 목격하면서 그는 다시금 흔들린다. 과연 브라이언과의 결혼생활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예견된 대로 그는 남편에게 총을 겨누지만 이 또한 철저히 ‘시나리오대로’다. 굳이 하나만 더 부연하자면, 브라이언에겐 처음부터 레이철이라는 ‘특별한’ 인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데니스 루헤인의 심리 스릴러는 후반으로 달려갈수록 레이철의 세밀한 심상을 그대로 비밀스러운 범죄의 얼개와 연결짓는다. 그러니 단순히 인간의 마음을 헤집는 데서 그칠 리 없다. 브라이언이 레이철에게 자신이 연출한 ‘작전’이 곧 당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그대로, 데니스 루헤인은 예측불허의 범죄와 상처와 결핍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용기를 그대로 재료이자 주제로 삼았다. 슬픔에 스러진 인간을 꿰뚫는 통찰력만으로도 보기 드문 지독한 성장소설일진대, 기어이 몇 발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의심케 한다. 과연 거장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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