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해직교사 박미자 “국보법 7조 폐지가 교육적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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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결혼 선호도 1위로 꼽는 여성의 직업은 교사다. ‘방학이 있는 안정적 직장’이라는 점 때문이다. 국공립교사는 모두 국가공무원 신분이고, 은퇴 후 연금도 적지 않다. 게다가 법외노조지만 노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까지 있어 신분보장이 거의 완벽하다. 그래서 교사는 자의든 타의든 해직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세 번 해직교사 박미자 “국보법 7조 폐지가 교육적 가치다”

세 번의 해직과 복직 반복
이런 신분보장에도 불구하고 해직과 복직을 세 번이나 반복한 교사가 있다. 중학교 국어선생으로 있다가 해직, 현재 전교조 연수원장으로 있는 박미자 교사(60)가 그 주인공이다. 도대체 그는 어떤 ‘대역죄’를 지었길래 교사에서 세 번이나 해직과 복직을 반복했을까. 지난 3월 5일 그를 전교조 사무실에서 만났다.

-1월 9일 대법원의 징역 1년 6월, 집유 2년 확정판결로 세 번째 해직됐다. 국가보안법 7조 5항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다. 촛불정부의 대법원이 이런 판결을 내릴 것으로 예상은 했나.

“촛불정부 대법원이기도 하지만 최근 남북정상회담을 몇 차례 하지 않았나. 게다가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도 있고.(웃음) 참담을 넘어 판사들이 참 세상 변화에 둔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유튜브에 북한의 선전자료가 얼마나 넘치나. 집에 책이 수천 권 있다. 교사가 북한과 관련된 책 몇 권을 가지고 있다고 내 사상이 바뀌나? 그게 국가 존립에 위협이 되나?”

-국가보안법 7조 폐지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사항이고, 심지어 야당도 15년 전에 폐지에 동의했던 조항이다.

“이 판결을 받고 절망하기보다 ‘뭐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4차 산업혁명, 상상력을 가르치라는 이 시대에 ‘교사에게 뭘 가르치라는 것인가’라는 교육적 질문을 하게 됐다. 우리가 일상 가르치는 것이 ‘다름에 대한 존중’이다. 교사는 ‘너와 다른 사람을 경청하고 존중하라’고 가르친다. 교육적으로도 자기와 다른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창의·상상력이 생긴다. 북한은 칭찬하면 안 되나? 그게 죄가 되는 세상인가? 아이들에게 북한을 계속 욕하고 증오하라고 가르쳐야 하나?”

-우리 헌법에는 평화통일을 명시하고 대통령에게 평화통일 의무를 선서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당연히 교육도 증오나 혐오 교육이 아닌, 화해와 평화 교육을 하는 것이 헌법정신에도 맞다.

“그렇다. 우리는 국가보안법 7조가 헌법 위반이라고 헌재에 냈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를 헌재에 제청하지 않은 채 그냥 기각하고 확정판결을 내렸다. 2017년부터 수원지법·울산지법 등에서 국보법 7조 위헌 제청이 헌재에 계속 올라가고 있다. 그러나 헌재는 이를 심리하지 않고 있다.”

박 원장은 1989년 전교조 설립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처음 해직됐다. 그때 형사들이 하숙집 주인에게 “빨갱이 교사 내보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심지어 민주화운동으로 평가되면서 복직했다. 전교조 수석부위원장 시절인 2013년 2월 전격 기소돼 2015년 4월 두 번째로 교단을 떠났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 들어 2018년 10월 다시 복직했지만, 이번 대법 확정판결로 세 번째로 해직 통보를 받았다. 당초 그를 기소했던 ‘이적단체 결성·회합통신·이적표현물 제작 반포’ 등 무시무시한 죄목은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가장 가벼운 국보법 7조 이적표현물 소지죄만 유죄판결을 받았다. 정년(62세)을 약 3년 남기고 그는 다시 해직됐다.

사실 그에 대한 기소는 전교조 법외노조의 신호탄이었다. 그를 포함한 전교조 교사 4명이 만든 새시대교육운동 모임을 이적단체로 규정해 기소하고, 국정원 댓글작업을 통한 박근혜 정권은 전교조 교사 285명을 국가공무원법 위반혐의로 고발했다. 그리고 2013년 9월 23일 고용노동부는 ‘해직조합원 9명을 탈퇴시키지 않으면 노조설립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박근혜 정권은 국정원 댓글사건의 관심을 돌리고, 교학사 교과서 도입에 가장 치열하게 반대하는 전교조를 와해하기 위해 치밀한 작업을 폈다.

뒤늦게 밝혀졌지만 일련의 이런 조치는 청와대가 직접 지휘했다. 고 김영한 민정수석 업무수첩에는 170일간 무려 42일이나 전교조 문제가 청와대에서 논의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국가기록원에서 필사된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 지시사항(안)’ 문건에는 수석과 교육부 차관이 참여하는 전교조 대응방안이 청와대에서 수시로 열린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당시 법원행정처 임종헌 기조실장이 작성한 대법원 문건에는 “청와대는 전교조 문제를 통진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과 함께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구체적 내용은 2018년 출간된 <촛불민중혁명사>에 자세히 정리돼 있다.

전교조 설립 발기인 참여했다 첫 해직

문 대통령은 스스로 전교조 명예회원이라고 할 정도로 전교조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대선 전 전교조 합법화를 공약했고, 문 정부 들어 2018년 노동부 적폐청산 기구인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도 ‘전교조 법외노조 조치를 즉시 직권 취소할 것’을 장관에게 권고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대법원 판례변경’과 ‘국회 특별법 제정’으로 책임을 미루어 왔다. 국회는 특별법을 만들지 않았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5월 20일 판례변경을 놓고 공개변론을 할 예정이다.

박 원장은 문재인 정부가 전교조 합법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오히려 변호하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 대통령은 전교조를 합법화하겠다는 원래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고 믿는다”면서 “그러나 우리 사법부와 검찰 등이 하나도 바뀌지 않아 대통령도 맘대로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왕적’이라는 대통령이 왜 합법화 조치를 못 할까.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도 ‘즉시 직권 취소할 것’이라고 권고까지 했다.

박미자 교사가 전교조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미자 교사가 전교조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신사라서 못할 것이다.”

-신사라서? 공무원들이 규정을 들어 ‘안 된다’고 하기 때문 아닐까. 공무원들은 나중에 정권이 바뀌었을 때 감사원 감사 등을 두려워한다. 그런 실무 공무원을 배제하고 장관이 전결 처리하면 되는데 못 하는 것은 공무원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도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현 여당이 다수당 시절에도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했다.”

-그럼 대통령도 못 하는 국보법 7조 폐지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시민운동으로 해야 한다. 전 국민이 들고 일어서야 한다. 촛불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바꾼 시민이다.”

보통 약속을 안 지키면 원망이라도 할 법하고 게다가 세 번이나 해직됐으면 거의 ‘독기’만 남았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박 원장은 매우 ‘여유’롭다. 낮은 말씨나 조용한 태도를 보면 그는 ‘자상한 중학교 선생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그를 ‘빨갱이가 이적단체를 결성해 국가 전복을 꾀했다’는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억지는 애당초 사람 선택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원장이 문재인 정부에 애착을 ‘매달고’ 있는 것은 2018년 4·27 및 9·19 남북정상회담인 듯했다. 적어도 남북 화해와 평화에 그나마 문재인 정부가 가장 적합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남북 화해와 평화는 남북의 정치적 만남만으로 힘을 받을 수 없다”면서 “다음 세대에 인성을 교정하는 구체적인 평화통일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옳은 판단이다. 아래로부터, 젊은 세대의 지지와 성원 없는 정상회담은 사상누각이다. 그는 “북한에 대한 맹목적 증오와 불신은 분단뿐 아니라 개인의 인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면서 “평화통일 교육은 우리 공동체 내에서 폭넓은 품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남북 화해와 평화교육에서 가장 걸림돌이 국가보안법 7조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국보법 7조가 존재하는 한 맹목적 비난과 증오 교육만 할 수밖에 없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아예 북한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아 ‘북맹(北盲)’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원장은 1960년생 전북 순창 출신으로 전주여상을 나와 직장을 다니다 뒤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여상에 간 것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다. 1981년 전북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기였지만 그는 그 흔한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학생운동을 하지 않은 열심히 공부만 한 순진한 여학생이었다”고 말했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그는 정교사 자격을 따고 졸업과 동시에 서울 공항중학교 국어선생이 됐다.

사회나 역사선생도 아닌 평범한 국어선생이 왜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을까. 이 질문에 그는 ‘반가운 질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85년 교사가 됐는데, 당시 교원단체총연합회가 만든 방학책을 학생들에게 팔고, 교사는 책값을 걷어야 했다. 양심적 선생은 이 책값 걷기가 좀 껄끄러웠다. 그런데 책값을 제대로 걷지 못하면 ‘불만 있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얘기가 돌아왔다. 도대체 방학책과 사상이 무슨 관계 있나. 두 번째는 논술을 위해 학생 읽기 자료를 선정하는 데 내 스스로 검열을 하고 있더라. 그래서 분단이 국토분단과 정치분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절감했다.”

지난해 ‘한경희 통일평화상’ 받아

그는 전교조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전교조의 ‘민족의 자주성 확보와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교육을 실천한다’는 실천강령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초대 여성 지회장을 거쳐 통일위원장이 됐다. 2001년 북한이 ‘고난의 행군’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북녘제자 교과서 종이 보내기 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2002년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여성대회에 전교조 지회장 자격으로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2004년 전교조 통일정책국장으로 남북교육자 통일대회를 성사시켰다. 2005년 전교조와 한국교총, 그리고 북측의 조선교육문화직업동맹 중앙위원회(교직동)와 함께 6·15교육본부를 만들고 남북 공동수업을 이뤄냈다.

그는 수없이 남북을 오갔고, 이 모든 것은 교육부와 통일부 승인·허가를 통해 이뤄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이전 노무현 정부의 남북교류를 ‘이적단체의 불순행위’로 몰았고, 이때 받아 보관하던 자료 몇 권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는 1993년 ‘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에서 활동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지난해 그는 ‘한경희 통일평화상’을 받았다. 한경희 통일평화상은 월북한 남편 때문에 고난의 삶을 산 한경희 여사 유족이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고 만든 상이다. 2016년부터 성공회대가 평화·통일에 기여한 인물을 골라 시상한다. 당시 김기석 성공회대 총장은 “두 번 해직을 당하면서도 교육자로서 통일의 중요성과 관련 교육에 매진해 왔다”면서 “남북이 분단된 현실에서 이념의 잣대로 만들어진 국가보안법 등이 아직도 남아 있는 상태에서 교육현장을 지켰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두 번 해직됐다고 큰 상을 받았는데, 세 번 해직된 그에게 무슨 상을 줘야 할까. 그는 3월 10일 전교조 공식회의를 통해 진보 시민단체와 함께 국보법 7조 폐지에 돌입한다고 말했다. 그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폐지운동을 벌일 것이라 말했다. 그는 “아이들 마음을 갈라놓고, 민주시민의식을 저해하는 국보법 7조 폐지는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진정한 교육적 가치”라고 주장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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