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더 백-종말 이후 한반도에 퍼진 식인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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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한반도 멸망 시나리오’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핵전쟁이 그 첫 번째일 테고, 백두산 폭발로 말미암은 대재해 역시 얼마 전 영화로도 구현된 바 그대로 이제는 간과할 수 없는 이미지로 남게 됐다. 하지만 그다음이랄 수 있는 한반도 종말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찾기 힘든 편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장르, 즉 영화 <매드 맥스> 시리즈나 <설국열차>처럼 현대 문명이 완전히 몰락한 이후 살아남은 극소수 인간들의 생존과 다툼을 그린 작품의 무대로 지금 우리의 미래를 가정하는 것은 더더욱 흥미로운 일인 텐데도 말이다. 늘 위험과 맞닿아 있다는 듯 공포를 조장하기 일쑤인 우리 사회가 막을 내린 후에는 과연 어떤 종류의 야만, 어떤 새로운 질서가 도래할까?

차무진 작가의 <인 더 백> 표지 / 요다

차무진 작가의 <인 더 백> 표지 / 요다

<인 더 백>은 코맥 매카시의 <로드>와 마찬가지로 종말 이후 한 남자와 아이의 여정을 한반도 위에 펼친다. 백두산이 폭발하고, 남쪽으로 피란 가는 사람들 사이로 폭격이 시작되고, 왜 발발했는지조차 불분명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바이러스가 창궐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얼마간의 잠복기를 거친 후 인육을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신체구조를 갖게 된다. 그렇다고 좀비처럼 자아를 잃은 채 오로지 인육만 탐하는 존재로 돌변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은 지극히 온전한 상태로, 그저 인육을 섭취해야만 하는 새로운 본능이 생겼을 뿐이다. 이윽고 식인 바이러스에 잠식당한 사람들은 시체를 차지하기 위해 악다구니를 벌이고, 사람을 사냥하고, 심지어 ‘정육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좀비보다 무서운 인간의 밑바닥을 훤히 드러낸다. 감염자들을 피해 대구로 향하는 비감염자 동민은 여섯 살 아들 한결을 가방에 숨긴 채 그렇게 인간이라는 이름의 절망으로부터 내내 발버둥친다.

여타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와 달리 <인 더 백>의 주인공 동민은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먹잇감’에 불과한 아이를, 제목처럼 ‘배낭 안’에 넣고 이동하는 가운데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따름이다. 동민이 맞닥뜨리는 매 순간순간은 강건한 부성애의 승리라기보다는 늘 평범한 소시민의 발악에 가깝게 그려진다. 각성제에 의존해 죽은 아내의 환각과 교감하는 위태로운 모습은 동정을 자아내고, 세상이 멸망하기 전 가난한 작가이자 배관공으로 연명하던 비루한 현실마저 대구(對句)를 이루면서 처연함은 더욱 배가된다. 어렵사리 동민이 식량을 수급하는 과정은 매 순간 세밀하게 묘사되고, 화상 입은 아들을 부지런히 간호하는 행동 또한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절망적이고도 먹먹한 분위기는 끊임없이 고조된다.

한국이라는 공간 역시 특별하게 작동한다. 일례로 동민이 남으로 향할수록 바이러스를 퍼뜨린 것은 북측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 정부라는 주장에 점점 힘이 실린다. 그동안 자신들의 이념을 주입하는 데 실패한 우파가 이 기회를 통해 북을 적대시함으로써 국민을 쉽게 포섭하는 것이 식인 바이러스의 진짜 목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군대는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감염자들을 압제한다. 게다가 이런 정부군에 대항하는 반군마저 동민에겐 또 다른 지옥에 불과하다. 결국 이념에 의한 편가르기가 종말의 공범 정도로 자리한 모양새니 너무나 ‘한국적’이어서 지극히 생경하기까지 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결말 부분이다. 대부분의 종말물이 결국 야만 속에 피어난 인간성에 손을 들어주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부성애나 휴머니즘과는 조금 어긋난, 작품의 절대적인 기조마저 뒤집는 반전에 열린 결말까지 더했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이어서 흥미로웠지만 기어이 안전한 도착지마저 회피한 채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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