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산-당신이 알고 있는 우주가 진짜 우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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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사는 도시가 무중력 상태라 둥둥 떠 있고, 사방이 온통 암벽으로 둘러싸인 세계라 가정해보자. 빛이라곤 전후좌우의 방사성 암벽에서 뿜어내는 희미한 발광뿐. 속이 텅 빈 이 세계의 반지름은 약 3000㎞로 달의 지름보다 약간 작다. 당신이 예서 나고 자랐다면 세상과 우주가 어찌 생겼다 여길까? ‘거품세계’라 불리는 이곳 과학자들이 내놓은 답은 이른바 ‘고밀도 우주론’이다. 자신들이 고체우주 속 공동(空洞)에 살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공동 너머는 암석층이 한없이 이어진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겠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그보다 앞서 나온 아리스타르코스의 지동설을 제치고 우주를 설명하는 절대 원리로 근 1600년 이상 군림한 우리의 과거를 떠올린다면 이를 마냥 비웃을 수 있을까?

e북으로 국내 출간된 류츠신의 <바다산> 표지 / 에브리북

e북으로 국내 출간된 류츠신의 <바다산> 표지 / 에브리북

류츠신의 단편 <바다산>(2006)은 우주의 끝을 찾아 나선 선진 외계문명이 잠시 지구에 들러 자기네가 어떻게 세상의 참모습을 깨닫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들려주는 형식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아는 걸 두려워한 나머지 어리석음을 반복한 우리의 지난 과학기술문명사를 풍자한다. 나중에 밝혀지듯 거품세계는 지구보다 약간 작은 행성의 중심핵으로 그 안이 비어 있다는 것이 특색이다(지구공동설을 떠올려보라). 이 세계의 중력이 0인 것은 행성 내부로 들어갈수록 질량이 감소하니 중력 또한 감소하기 때문이다. 물과 공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이지만 암석층의 방사성 활동 덕에 금속생명체가 탄생한다. 단세포기계에서 진화한 복잡한 지적 기계생명체들은 근육과 골격이 금속이고 대뇌도 초밀도 칩이며 혈액은 전류와 전기장으로 대체한다. 에너지원은 암석들이 뿜어내는 방사능이고….

이야기 대부분은 암벽층에 갇혀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였던 외계인들이 우주의 진짜 본모습을 알아내고자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할애된다. 이들 중 탐구심 강한 개체들은 암벽 너머에 돌과 흙만 끝없이 펼쳐지리란 과학자들의 사변적 억측을 액면 그대로 믿는 대신 직접 확인하려 채굴선(일명 거품배)을 띄운다. 혹여 있을지 모를 신대륙(암석층 너머의 또 다른 빈 공간)을 찾아서. 허나 정부는 탐험을 금지하고 탐험가들을 처형한다. 탐험한답시고 터널을 파면 파낸 흙과 암석이 중심부 공동에 쌓이니 그러다간 거품세계 자체가 메워질까 우려한 까닭이다. 이후 ‘기계인(機械人)’들의 역사는 끈질긴 탐험시도와 이를 탄압하는 정부 간의 반복되는 충돌로 점철된다. 실제로 상당수의 거품배들이 귀환하지 못해 기존 공동에 흙이 차서 떠다니던 도시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 이에 정부는 거품배 무리를 공간도둑이라 비난한다.

그러나 멀리서 가져온 암석표본들 덕에 항해거리가 길수록 암석밀도가 줄어드는 현상이 알려지자 3만 년이나 군림했던 고밀도 우주론은 마침내 폐기된다. 탄압 일변도였던 정부가 탐험을 합법화하고 굴착기술이 한층 발달하면서 거품배들은 드디어 지표면, 그러니까 행성중심에서 8000㎞, 거품세계 경계에서 3000㎞ 지점에 다다른다. 그리고는 승무원들이 합선으로 즉사한다. 하필 바다 표면으로 나왔기에. 기계인들은 생전 처음 보는 무형암(액체상태의 물)의 유독성에 경악한다. 이후 빈틈없이 장갑을 두른 거품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15만 년에 걸친 대장정이 일단락된 것이다.

<바다산>은 우리보다 훨씬 악조건의 환경에서 태어난 지적 생명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인식의 장벽을 뛰어넘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이처럼 열정적인 기계인들 앞에서 우리의 지식문명사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더구나 인식의 전환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 작품의 메시지는 비단 과학기술 분야에만 국한되지는 않으리라.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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