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판소리 명창 임진택 “안익태 애국가, 국민의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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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자가 참석했던 몇몇 행사 가운데 10월 30일 민족문제연구소 주최 제13회 임종국상 시상식에서는 순국선열 묵념만 하고 애국가는 부르지 않았다. 11월 1일 연세대 민주동문회가 주최한 합동추도식에서도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고, 11월 6일 인터넷 신문인 <통일뉴스> 창간 19주년 기념식 및 조용수언론상 시상식에서도 민주열사에 대한 묵념만 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창작판소리 명창 임진택 “안익태 애국가, 국민의 수치”

이런 것은 민간 행사라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11월 1일 국회에서 국회민주주의와 복지연구회와 ‘국가만들기 시민모임’이 주최한 ‘안익태 애국가, 국가(國歌)란 무엇인가’ 세미나에서도 애국가가 생략됐다. 이 모임의 대표 인재근 의원은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이고, 강창일 의원은 4선의 한·일의원연맹 회장이다. 이날 세미나에서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주목받은 사람은 <아리랑 애국가>를 제안한 임진택 판소리 명창(69)이다. 지난 11월 7일 인사동에 있는 창작 판소리연구원에서 그를 만났다.

각종 행사에서 생략되고 있는 애국가

-불과 몇 년 전 한 유명인사는 민중의례만 하는 국회의원에게 ‘애국가도 부르지 않는 종북세력’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요즘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행사가 많다. 국회에서 버젓이 ‘애국가 그만’ 세미나도 열릴 정도다. 대관절 애국가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사실 나도 애국가에 뭔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을 안 가졌다. 연초 한신대 이해영 교수가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적을 밝히는 <안익태 케이스>란 책을 냈고, <경향신문>에 김정희 작곡가가 애국가의 음악적 문제를 지적한 인터뷰가 나왔다. 음악을 하는 내가, 문화운동가 내가 모를 정도이니 일반 국민은 애국가에 뭐가 일어났는지 모를 것이다.”

-‘안익태 애국가 이제 그만’ 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인가.

“<안익태 케이스>를 보면 안익태의 친일행각 전부는 친나치와 결부돼 있다. 게다가 안익태는 그 전모를 숨겼다. 내가 판소리 명창이고 소리꾼이지만 원래 내 직업이 문화운동가다. 올해가 3·1혁명 임정 100주년인데 문화운동가 임진택이 한 일이 무엇인가 자문했다. 그래서 ‘안익태 애국가 이제 그만’ 운동을 벌이자고 나섰다.”

-11월 1일 국회 세미나에서 새 국가를 ‘국가제정위원회를 만들어 공모하자’, ‘국민 프로듀서가 선정하자’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임 명창은 다른 의견을 피력했다.

“나는 특정인에게 작사와 작곡을 의뢰하는 것은 국가(國歌)의 형성과정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 국가(國歌)는 국가(國家) 성립 이전부터 혁명·독립투쟁 등 건국과정에서 우연히 불리다 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올바르다. 미국 국가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감옥에서 착상한 노래라 하고, 프랑스 국가는 혁명과정에서 한 병사가 우연히 가사를 생각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아리랑을 국가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4월 초 KBS에서 한 <아리랑 로드> 다큐를 우연히 봤다. 해외동포들도 사적 공간에서 슬플 때나 기쁠 때 아리랑을 부르지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애국가를 안익태 곡조가 아닌, 아리랑 곡조에 맞춰 불러봤다. 애국가는 후렴이 있는 세계 매우 드문(거의 유일한) 국가다. 우리 민요에도 후렴 성격의 ‘받는소리’와 본가사인 ‘메기는소리’가 있다. 애국가가 민요조 구성이라는 얘기다. 애국가 1·2·3절을 그냥 붙이면 재미없다. 메기는소리와 받는소리 구성을 뒤집으니 좋더라. 안익태 애국가 대안 마련 차원에서 만들어봤다.”

(그는 자신이 만든 <아리랑 애국가>를 직접 부르고 또 휴대폰에 저장된 노래도 틀어줬다.)

-듣고 보니 <아리랑 애국가>도 괜찮은데 ‘10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라는 가사가 국가에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현 애국가 본가사를 넣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다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길이 보전하세’로 이어진다. 나는 2절짜리가 좋다. 1절은 ‘동해물과 백두산~’ 기존 애국가 가사를 쓰고, 2절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아리랑 아리랑~’로 헌법 제1조를 가사로 썼다.”

임진택 원장이 만든 <아리랑 애국가>를 합창단이 관현악단에 맞춰 부르고 있다.

임진택 원장이 만든 <아리랑 애국가>를 합창단이 관현악단에 맞춰 부르고 있다.

새 국가는 고유의 음악성이 들어가야

그는 관현악단과 피아노 그리고 합창단이 어우러지는 <아리랑 애국가>를 시연하고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이는 완결판은 아니고 수정 중이라고 했다. 임 명창은 꼭 자신이 만든 <아리랑 애국가>가 국가로 채택될 필요는 없고, ‘대안’ 중 하나라고 했다. 그는 김민기의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으로 시작되는 <내 나라 내 겨레>도 국가로 손색이 없고,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국악조로 지은 <우리가 원하는 우리나라>도 어렵긴 하지만 매혹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통일이 되기 전까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도, 특히 <임을 위한 행진곡>은 실제 ‘국가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국가는 우리 고유의 음악성이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현 애국가 가사는 그냥 쓰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현 애국가 작사자로 친일파 윤치호설과 독립운동가 안창호설이 있는데 그는 안창호설을 지지한다. 그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가사를 살리는 방법은 <아리랑 애국가>밖에 없다고 말했다. 임 명창은 이런 사실을 모두 정리해 ‘애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라는 제목의 책을 쓰겠다고 했다.

임 명창은 1950년 전북 김제 출신이다. 그는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고 아버지는 나주 임씨로 나는 토종 전라도”라고 말했다. 부친은 김제역 앞에 큰 도정공장과 사금광산을 소유해 전북·호남 제1갑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임 명창은 “부친은 친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며 “아버지 8형제 중 빨치산 활동하다 돌아가신 형제가 두 분, 도의회 의장을 하는 등 보수적 행보를 걸은 분 등 좌·우가 4 대 4 정도였다”고 말했다. 1956년 부친이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떨어지고, 특히 1958년 도정공장에 큰불이 나 쌀 6000가마가 불에 타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는 “부친은 농협은행과 10년에 걸친 소송 끝에 패소해 가산을 탕진하고 병까지 얻어 50세에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는 일찌감치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전학 왔다. 공부를 잘해 경기중·고에서도 반장을 도맡았다. 부친은 소송에 진 것에 한이 맺혀 “꼭 법대에 가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부친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도 그는 그 말을 들었다. 하지만 ‘철없던’ 그는 “외교학과 갈랍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자유로운’ 외국에 나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1969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들어갔지만 외교·국제정치학 과목을 미국에서 배운 대로 옮기는 교수의 강의에 흥미를 잃었다.

임 명창은 연극반에서 활동하다 탈춤반이 만들어지자 그리로 옮겨 김지하 등과 그 ‘유명한’ 마당극을 만들었다. 그는 “마당극이라는 단어나 현상이 없던 시절에 마당극을 창조했다”면서 “농담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라고 자찬했다. 1974년 그는 명동의 한 카페에서 정권진(1927~1986) 명창의 <수궁가>를 듣고 그를 찾아가 판소리를 배웠다. 그는 판소리를 배운 최초의 대학생이었다. 그는 “스승께 ‘왜 나를 전수자로 택했느냐’고 물으니, ‘대학’을 다닌 ‘남자’라서’라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초 마당극과 판소리 등 민중문화운동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풍자이자 저항수단이었다. 결국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김지하 등과 함께 구속됐다. 서대문구치소 감방에서 감방장이 ‘너, 노래 한번 해봐’라는 지시에 그는 김지하 담시 <소리내력>에 가락을 맞춰 불렀다. 담시 <소리내력>는 한 도시빈민이 억울한 재판으로 죽는 스토리다. 이는 1974년 명동성당에서 정식 공연됐다. 그는 “감방에서 북도 없이 소리를 죽여가며 불렀던 <소리내력>이 나의 첫 작품이고, 첫 공연”이라고 말했다.

11월 1일 국회에서 열린 ‘국가만들기 시민모임 주최’ 세미나를 마치고 임진택 원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11월 1일 국회에서 열린 ‘국가만들기 시민모임 주최’ 세미나를 마치고 임진택 원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역사인물 주제로 한 판소리 만들어

대학을 졸업한 그는 삼성그룹의 TBC(동양방송) TV PD로 취직했다. 그리고 PD를 하면서 중요무형문화제 제5호 판소리 <심청가>를 완전히 이수했다. 영혼이 ‘자유로운’ 그가 월급쟁이로 만족할 수 없었다. 회사를 그만둔 그는 1985년 4월 김지하 시 <분씨물어>(糞氏物語)를 토대로 창작판소리 <똥바다>를 만들었다. 반일·매판자본을 풍자하는 이 작품은 대학가는 물론 해외에도 알려져 수백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 이 작품은 그를 단박에 유명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85년 마당극 <밥>을 선보였다. 이 마당극 역시 수백회 공연하며 돌풍을 일으켰고, 지금도 고등학교 문학 시험문제에 출제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1990년 그는 5·18광주항쟁 10주년을 기념해 판소리 <5월 광주>를 만들었고, ‘김지하의 <오적>을 판소리로 만들기 위해 판소리를 배운다’는 약속을 1990년에야 지켰다. 이후 <백범 김구>, <세계인 장보고>, <다산 정약용>, <윤상원가> 등 역사인물을 주제로 한 판소리를 만들었다. 한편으로 1997년 ‘세계마당극큰잔치’ 예술감독, 2001년 ‘세계야외공연축제’ 집행위원장, 2002년 ‘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등을 맡아 연출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평생 마당극·판소리를 하면서 딱 세 번 ‘외도’했다. 정치판에 뛰어든 것이다. 1987년 대선 때 민중 후보 백기완의 정치특보를 했고, 2007년 대선 때 문국현 후보를 세웠고, 2012년 대선 때 손학규 후보를 도왔다. 그는 “세 번 모두 민주진영이 죽을 쑬 때 야권통합을 위해 내 스스로 찾았다”며 “예술적 감각으로 정치를 판단했지만… 안 됐다”고 고백했다. 사실 ‘정치학이 예술이냐 과학이냐’(Politics:science or art?)라는 논란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요즘은 대체로 과학으로 분류하지만, 여전히 정치가 예술임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그는 세 번 연속 ‘실패’했지만….

그는 올해 칠순이지만 창작열과 문화운동가로서 ‘열기’는 식지 않았다. 그는 “마당극을 이론·실천적으로 더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1985년 마당극 <밥> 이후 뜸했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 문제를 다룰 <돈>, 생명과 환경·지구 문제를 다룰 <물>, 주거·부동산 문제를 다룰 <집> 등 한 단어 개념의 마당극을 만들 계획이다. 특히 그는 “조국 사태에서 검찰총장이 대통령에게 대드는 것을 보고, 또 아버지 유언도 있어 <법>이라는 마당극도 만들어보려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래 직업이던 문화운동가 정신을 살려 ‘안익태 애국가 이제 그만’ 운동도 가열차게 벌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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