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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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회 속 피어나는 희망의 가치

이사카 코타로는 그간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를 여럿 써왔지만 그 방식은 대체로 은유에 가까웠다. 특히 우리의 진짜 현실인 양 비관적인 세계를 형상화하면서도 비현실적인 판타지 요소를 너르게 활용했기에 더더욱 그렇게 보이기 충분했다. 게다가 그 판타지란 대개 대책 없는 낙관처럼 보이는 것들이었다. 한 정치가의 선동을 직접적으로 파시즘의 공포와 연결시킨 <마왕>에서 마침내 대중 위에 선 ‘마왕’과 맞서 싸운 이는 다름 아닌 미미한 초능력을 앞세운 두 형제였다. 염력을 사용함으로써 자칫 나락으로 빠질 수 있었던 캠퍼스 스토리에 희망을 드리운 <사막>은 어떠한가. 각기 다른 특기를 감춘 킬러들의 대결을 그린 <그래스호퍼>와 <마리아 비틀>마저도 비정한 세계의 암울한 기운을 일소하는 인간의 불가사의한 힘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렇듯 ‘이사카 월드’에는 늘 절망을 뒤집는 그럴듯한 희망이 잠재해 있다.

이사카 코타로의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한국어판 표지 / 아르테

이사카 코타로의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한국어판 표지 / 아르테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는 이사카 월드로 일컬어지는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작가의 실제 고향인 센다이(仙台)를 무대로 삼는다. 그래서 군상극으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촘촘히 나열하다 어느 순간 국가권력이 ‘평화경찰’이라는 기구를 설립해 ‘안전지구’의 주민을 통제하는 상황은 어쩐지 갑작스럽기까지 하다. ‘위험인물’로 지목받는 것만으로 구금되고 갖가지 방법으로 고문받는 살풍경한 광경 역시 충분히 비현실적이다. 특히 스테인리스 재질로 만들어진 단두대를 사용해 불순분자를 공개 처형한다니, 이 모든 것이 더더욱 우화처럼 느껴질 만하다. 그럼에도 공인된 국가권력이 어떻게 사람들을 통제하는지를 건조하고 무감하게 묘사함에 따라 비현실은 곧 당면한 현실로 변모한다. 평화경찰의 취조 방식만 보더라도 죄를 자백시킨다기보다는 경찰관들의 가학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일종의 ‘오락’처럼 묘사되니 말 다했다.

물론 이 잔혹한 세계에도 곧 한 줌 희망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작에서도 여러 차례 다채롭게 형상화된 바 있는 ‘정의의 편’이 등장해 평화경찰의 폭거에 홀로 대립하는 것. 그는 검은 옷과 복면을 착용한 채 목검과 골프공 크기의 불가사의한 구슬을 사용하며 평화경찰의 압제로부터 시민들을 구한다. 정의의 편이라는 낯간지러운 이름 그대로 굳이 만화에나 등장할 법한 히어로를 내세우지만, 공권력에 맞서 영리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몫만을 구제하려는 그 나름의 모토가 언급되는 순간 정말로 그럴듯한 힘을 얻는다. 그리고 정의의 편의 정체나 목적이 마침내 극을 관통하는 미스터리를 이루면서 이야기는 감시·통제사회의 균열과 참상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얼핏 우화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멀지 않은 아픈 현대사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여러 번 묘사되는 취조실의 잔혹한 면면 하며, 평화경찰이 평범한 시민을 범죄자로 둔갑시키고 살인을 은폐하고 마침내 권력을 탐하는 모든 과정이 그러하다. 그렇기에 작품의 클라이맥스에서 여러 명의 시민을 인질로 삼아 정의의 편을 색출하는 절망의 순간, 이를 타개하는 의외의 국면은 현실에 잠재해 있는 강력한 희망마저 보여주는 듯하다. 제목인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역시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힘을 얻는다. 이 나라가 싫으면 화성에라도 갈 거냐는 경찰관의 비아냥거림이 결말부에선 “세상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니까. 그게 싫으면 화성에라도 가서 사는 수밖에 없”다는 긍정의 메시지로 바뀐다. 우리의 현실을 경고하는 디스토피아가 힘겹게 인간을 긍정하는 마지막까지, 이번에도 역시 이사카 코타로가 전하는 진중한 희망의 가치는 반짝반짝 빛난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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