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삶의 사막 <낙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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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라오서(老舍)의 소설 <낙타상자>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이는 상자(祥子)이지 낙타가 아니다. 낙타는 단지 그의 별명일 뿐이다.” 소설은 이렇게 “상자는 낙타가 아니다”로 시작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상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야, 이 낙타!” 하고 욕을 먹으며 스스로 낙타처럼 변해간다. <낙타상자>는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이 인간임을 잊고 낙타와 같은 동물적 존재로 변해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날카롭고 세밀한 시선으로 따라가는 작품이다.

상자는 북평(지금의 베이징)의 인력거꾼이다. 거친 인력거꾼 사이에서도 상자는 예의바르고 부지런한 일꾼으로 손꼽히며 ‘자신의 인력거’를 마련하겠다는 꿈을 향해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청년이었다. 몇 년을 고생해 간신히 꿈을 이룬 것도 잠시, 전쟁통에 군벌에게 인력거를 빼앗기고, 부패한 형사에게 모은 돈을 갈취당하고, 인력거 회사 주인 딸에게 속아 결혼한 뒤 가족을 잃는다. 또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여인마저 비참하게 죽는 등 끝없이 밀려오는 삶의 불행과 비극 속에서 상자는 점차 자신의 꿈과 노동자로서의 자긍심,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잃고,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전락한다.

그런 의미에서 <낙타상자>란 제목은 새삼 흥미롭게 다가오는데, 일단 ‘상자’라는 이름 자체가 상당히 반어적이다. 상자는 상서롭고 복되다는 의미의 길할 ‘상(祥)’자를 쓰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길하고 복된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비참하고 억울한 일들로 점철되어 있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서 끝없는 사막을 걸어가야 하는 낙타처럼 수많은 고통을 짊어지고 힘겨운 삶의 사막을 걸어가던 중에 상자는 자신의 모든 인간다움을 잃은 채, 그저 음식물 부스러기나 담배꽁초나 찾아다니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다. 고선웅 연출은 바로 이 마지막 장면에서, 상갓집 행렬의 만장을 든 채 걸어가는 상자의 등과 허리가 천천히 굽어 낙타처럼 변하게 만듦으로써 인간에서 낙타로 변해가는 상자의 곡절많은 인생을 배우의 ‘몸’으로 선명하게 구현해냈다.

현대 중국 경극으로 각색된 대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연극 <낙타상자>는 노래나 시처럼 대구와 운율을 살린 대사들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고선웅 특유의 빠르고 속도감 있는 대사 및 장면 진행, 비극적인 이야기임에도 군데군데 웃음 포인트를 놓치지 않는 연출감각이 더해져, 원작의 방대한 서사와 수많은 인물들의 사연이 간결하고 리드미컬하게 직조되었다. 특히 상자의 대사인 “인력거만 진짜야, 나머지는 다 가짜야” “입에 들어가는 것만 진짜야, 나머지는 다 가짜야” “오직 죽음만이 진짜야. 나머지는 다 가짜야”의 변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인간 상자가 어떻게 삶의 희망과 꿈을 잃은 채 짐승 같은 삶을 살게 되고, 종국에는 그마저도 느끼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해가는 존재로 몰락하는지를 압축적으로 그려냈다. 10월 17일부터 20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김주연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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