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방 대표 백영란 “역사의 100%는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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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간에 벌어지는 무역전쟁, 안보전쟁의 바탕은 역사전쟁이다. 특히 한·일관계는 무턱대고 흥분하거나,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보다 감정이 앞서다보니 정확한 판단이 어려울 때가 많다. 여기에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역사지식은 TV를 통한 ‘드라마’ 수준으로 얻어 ‘진실’과 ‘과장’을 구분하기 어렵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역사책방 대표 백영란 “역사의 100%는 미래다”

요즘 역사책을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이런 가운데 도심 한가운데 역사책을 팔고, 저자가 직접 나와 강연하고, 심지어 가까운 곳은 직접 답사까지 가는 책방이 있다. 여기서는 커피도, 심지어 술도 판다. ‘역사책방’이라는 빈티지 냄새가 확 나는 간판 아래서 ‘통인 플랫폼 12’라는 다양한 역사 소통이 이뤄지는 곳이다. ‘역사와 놀며, 이야기하며, 역지사지하는 광장’을 추구하는 백영란 대표(56)를 8월 23일 만났다.

역사와 놀며, 이야기하는 광장

-최근 불편해진 한·일관계와 관련해 일본 역사나 한·일관계사 강연을 자주 한다. 최근 어떤 행사를 가졌나.

“최근 한·일관계 문제가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일반의 관심이 많아졌다. 작가 조용준 선생의 <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 김태진 선생의 <요시다 쇼인> 강연을 했다. 호사카 유지의 <사쿠라 지다>를 번역자 정선태 선생과 함께한 강연은 열기가 넘쳤다. 마지막 ‘일본에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도 좋았다. 강연자와 청중의 호흡이 너무나 잘 맞았다.”

-최근 한·일 무역전쟁의 본질은 역사전쟁 성격이지 않나. 그만큼 ‘역사’는 국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대중화가 쉽지 않다. 이 ‘역사책방’은 역사 대중화를 위한 것인가.

“한·일 무역전쟁의 본질이 역사전쟁인 점은 맞다. 그리고 내가 이 책방을 연 것은 무슨 거창한 의무감이 아닌 그냥 역사가 좋아서 했다. 흔히 역사를 배우는 이유로 ‘교훈’을 말하는데 나는 교훈 이전에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역사를 전공한 것은 재미있어서다.”

그는 대학·대학원(서울대) 석사까지 국사학을 전공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경제사가 가미된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한국콘텐츠진흥원과 유명 포털, 통신사에서 근무했다. 첨단 플랫폼에서 일하다 다시 역사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세상을 주유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서점이 속속 문을 닫는 요즘, 서점을 연다는 것은 ‘사업상 모험’일 수 있다. 백 대표는 “내 목표는 돈을 더 이상 투자하지는 않는 것”이라며 “1년 만에 추가투자 없이 유지는 된다”고 말했다. 투자비 회수 단계는 아니지만 현상유지는 된다는 얘기다. 대부분 서점이 문을 닫는 현실에서 ‘놀라운’ 성과다. 그는 책·차·술 중에 그래도 매출이 가장 많은 대목은 책이라고 말했다. 현재 역사책방에는 대략 5000권의 책이 있다.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했던 역사책’ 위주로 진열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백 대표는 “우리는 대형서점에도 없는 아프리카 섹션, 인도·남아시아 섹션도 있고 유라시아 유목민 섹션도 있다”고 말했다. 물론 최근 논란 속에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른 이영훈의 <반일 종족주의>도 있다.

그는 역사를 전공하고 역사책을 파는 위치에 있다. 게다가 민간회사에서 돈 버는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상품도 알고, 유통도 알고, 게다가 돈 버는 방법도 안다. 그는 최근 서점의 어려움에 대해 “역사학자와 역사 저술가들이 분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품의 질이 나쁘다는 소리로 들린다. 책을 서너 권 낸 기자의 입장에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책 한 권 써보지 않은 사람이라 출판계 실태를 너무 모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 출판사는 책 내용보다 장정(외형)에 더 신경 쓰는 분위기다. 자료수집, 현지 취재 등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6개월이나 1년 걸려 원고를 쓴 작가는 초판 인세로 겨우 200만원을 받는다. 그런데 일러스트레이터는 앉아서 일주일 일하고 300만원을 받는다. 게다가 서점의 유통마진은 작가 인세보다 2배가 넘는다. 전업작가로 먹고살기 어려운 구조다. 작가가 책을 쓰지 않으니 좋은 콘텐츠가 없다. 그런데도 영화·드라마·만화·뮤지컬 등을 만들면서 우리 콘텐츠가 없다며 남의 것을 베낀다. 마치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중단에서 보듯이 우리는 기초에 대한 투자를 별로 하지 않는다.

“책은 너무 많이 나온다”

기자의 이런 주장에 그는 “책은 너무 많이 나온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약간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학문적인 역사서적과 재야 사학자, 역사를 상품으로 접근하는 작가 세 부류가 너무 닫혀 있다”고 말했다. 유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바보야! 문제는 유통이야>라는 책도 나오는 상황에서 서점 사장의 이런 지적도 새겨들어야 한다.

기자는 많은 사실과 이야기를 쓴다. 그것이 시간과 엮이면서 역사가 된다. 그런 면에서 역사가와 기자는 비슷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기자가 쓰는 ‘스토리’는 역사가가 쓰는 ‘히스토리’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 차이는 스토리의 인과관계를 어떻게 엮느냐다. 그 인과관계는 역사가의 관점일 수도 있고, 거창하게 말하면 ‘사관’일 수 있다.

백 대표는 “역사는 해석이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면서 “이것을 거창하게 사관이라 하지만 개인적 호기심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역사에 대한 궁금증은 현재 호기심에서 시작한다”면서 “호기심으로 보면 역사는 매우 다이내믹하다”고 말했다.

그는 민족 개념을 넘어 좀 더 글로벌하게 열린 나라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 5000년을 같이 살아 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조선 세종 즉위식 때 한양에 아라비아 상인이 왔고, 고려·고구려 시대 동북아는 거란·여진·말갈족 등 다른 민족과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한반도 남쪽 가야의 처자는 고구려 총각보다 대마도 총각과 결혼할 확률이 높았다”고 말했다.

백영란 역사책방 대표가 자신의 책방에서 책을 읽고 있다.

백영란 역사책방 대표가 자신의 책방에서 책을 읽고 있다.

-일부 그것이 사실이라도 나라(중앙집권적 국가)는 백성을 통합하고, 전쟁에 동원하는 등 위기 극복에 유리하기 때문에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역사를 서술하고, 그리 교육하지 않았을까.

“그럴 것이다.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보면 교류의 역사다. 과거에는 국경이라는 개념도 그리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는 다양한 팩트가 있다. 이영훈의 <반일 종족주의>의 핵심은 위안부 모집에 강제성이 있느냐 여부다. 나는 정신대와 위안부는 구분돼야 한다고 본다. 정신대는 인력근로동원으로 모집의 강제성이 있었다. 위안부는 성에 관한 교환으로 국가가 100% 강제성을 가졌느냐 하면 ‘아니다’라는 것이다. 위안부 모집에는 다양성이 있었다. 확실한 것은 군인을 위한 위안소였고, 관리를 군부대가 했다는 것이다. 일본인 사고방식은 나라를 위해 싸우는 군인을 위해 한국여성은 물론 일본여성도 ‘봉사’해야 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전쟁 와중에 이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은 ‘내가 잘못한 것은 전쟁에서 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이전까지 보통 일본인들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그렇게 봤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 군인과 한국 위안부를 동지적 관점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피해 증언이 이어지고, 위안부는 전쟁 중이라도 인륜에 어긋난다는 국제적 여론 때문에 일본 진보진영의 주장도 달라졌다.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 역사에는 다양한 팩트가 있다. 누구는 이 팩트, 누구는 저 팩트를 들이대며 서로 난장판을 만드는 것이 지금 형국이다. 그래서 나는 미래 목표를 따져야 한다고 본다. 일본인에게 ‘만약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군대를 따라다니는 성 위안부를 두겠느냐’고 물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일본은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역사는 미래다’라고 생각한다. 요즈음 한·일문제를 보면 100% 역사는 미래다. 일본인에게 그런 미래 전망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자본주의 배우러 미국으로 유학

유명 역사학자들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혹은 ‘역사는 현재다’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 ‘역사는 미래다’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백 대표의 이런 ‘참신한’ 역사 규정도 나름 논리가 있어 보인다.

백 대표는 1964년 서울생이다. 중학교 시절 세계사 선생님의 열정어린 지도에 감동받고, 약간의 ‘민족의식’이 겹쳐져 1983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대화 도중 ‘마르크시즘’이라는 용어를 가끔 사용했다. 기자가 “운동권이었느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우리 시대 태반이 그러지 않았나”라고 대답했다. 기자가 다시 “사노맹원이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뭘 그런 것을…”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서울대 석사를 마친 그는 1992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91년 소련 붕괴를 시작으로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던 시기였다. 그는 스스로 ‘끝장까지 가보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르크시즘에 한계를 느낀 상황에서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뭐냐’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자본주의에 대해 제대로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으로 갔다”고 말했다. 미국 UCLA에서 자본주의의 핵인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한국 재벌과 정부의 유착 성장 메커니즘을 분석한 것이다. 그는 “국제금융이 없던 60년대 차관으로 한국의 재벌이 형성·발전하는 과정을 데이터와 모델링으로 분석한 것”이라고 말했다.

2001년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잠깐 강의를 했지만 재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2002년 유학 중 만나 결혼한 남편과 함께 귀국했다. 그리고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에서 일했다. ‘무엇이든 끝장을 보는’ 그의 성격 때문에 그는 자본주의 최전선이자 직접 돈을 버는 IT업체에 취직했다. 그는 포털 네이버와 통신사 LG U플러스를 거치면서 당당히 임원(상무)까지 됐다. 그는 스스로 “연봉의 3배 값은 했다”고 말했다.

마르크시즘에 빠져 있던 그가 자본주의 첨병인 첨단 IT업체에서 매출로 승부를 보게 된 배경은 미국에서 배운 ‘다른 것’ 때문이다. 그는 “그동안 마르크스의 노동의 가치, 노동의 본성과 같은 말을 들으며 사상을 갈고닦았는데, 미국에서 IO(산업조직론) 수업시간에 인간은 언제든지 이상한 짓을 하거나 게을러지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동기 부여를 통해 사업 목표를 달성할 것이냐는 ‘인간을 움직이는 법’을 배운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을 더 쥐어짜느냐를 배운 것인가.

“단순히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차이를 이해해 상과 벌의 메커니즘을 끊임없이 구현하는 것이다. 채찍이 아닌 자발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어느 사회나 그런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사회주의 체제에도 천리마운동과 같은 것이 있다.”

-‘자본주의 끝까지 가보자’고 기업체 임원까지 하고, 이제 자신의 회사 대표까지 되니 어떤가. 부족했던 인간에 대한 이해가 충족됐는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점점 ‘후련해’지고 있다. 특히 자영업자가 돼 인간에 대해 엄청 배우고 있다. 아재 개그를 한다면 ‘로망’에서 시작해 ‘노동’으로 끝나고 있다. 자영업의 본질은 주인의 노동력에 기초하는 것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이제 와서 노동의 가치를 다시 깨닫고 있는 것인가.

“(웃음) 그렇다.”
-그럼 다시 마르크시즘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웃음) 그런 것은 아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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