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찍히지 않을 권리와 지워질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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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촬영, CCTV와 블랙박스 영상 등 언론에서 굳이 공개해야 하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기는 쉽다. 하지만 굳이 찍지 않아도 됐던 사진이나 잘못 찍힌 사진을 주기적으로 삭제하며 사진첩을 정리하는 사람은 드믈다. 찍기는 쉬워도 지우는 것은 왠지 귀찮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각종 CCTV에 자신의 모습이 찍히며 살아간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거부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합법적 촬영을 넘어 불법촬영의 위험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화장실, 숙박업소, 지하철, 해변 등 장소를 가리지 않는 가해자의 대범함 앞에 선 피해자는 무력하기만 하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파출소에 와서도 경찰관을 찍는 사람

경찰관도 이런 사진촬영의 늪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제복을 입고 길을 나서는 순간 주목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신고 출동을 나가서도 현장에 집중하기 힘들다. 현장 주위에 시민들이 빙 둘러서서 경찰관이 어떻게 조치하는지, 어떤 실수를 하지는 않는지 카메라 렌즈를 통해 호시탐탐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남자 앞에서 무력히 서 있던 내 모습은 아직도 누군가의 휴대전화에 고이 남아있을 것이다. 간혹 현장 경찰관이 실수라도 하면 해당 영상은 언론, 유튜브 등 각종 매체에 ‘박제’되어 길이길이 남는다. 이런 현실은 현장 경찰관을 더욱 위축되게 한다. 언론에 강력범죄자가 잡히면 범죄자 얼굴은 가려주지만 옆에 있는 경찰관 얼굴은 전국에 생방송된다. 시위 현장에 있는 경찰관도 마찬가지다. 일부 폭력적인 참가자는 경찰관을 향해 참기 힘든 모멸적 욕설을 내뱉고 경찰관의 반응을 보기 위해 영상을 촬영한다.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만 하나. 그리고 이걸 방지하거나 처벌하기 위한 현실적인 제도는 없는 것일까. 경찰관이 되면서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만 가득 떠안은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막힌다.

얼마 전 술에 만취한 남자가 파출소에 찾아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행패를 부렸다. 그러다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자, 휴대폰을 꺼내 내 사진을 수십 장 찍는 것이 아닌가. 찍지 말라고 하자 아예 동영상까지 촬영하며 나의 모든 모습을 담았다.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알몸으로 발가벗겨진 기분. 하지만 더욱 괴로웠던 것은 이 사람의 휴대폰을 강제로 뺏은 뒤 사진을 지울 강제력이 경찰에게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무전취식과 무임승차를 일삼는, 그야말로 파출소의 단골인 중년의 남성도 파출소에 끌려오고 나서 내 사진을 찍기 바빴다. 파출소에 있는 그 누구도 쉽사리 그만하라는 말도 못하고, 나 혼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날 저녁은 생각만 해도 속이 뒤틀린다. 파파라치에게 시달리는 연예인이 이런 기분일까. 연예인도 아니고 유명세도 전혀 필요없는 경찰관인 나는 이러한 태도가 버겁기만 하다.

하물며 경찰관도 이런 사정인데, 이런 해프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범죄인 불법촬영 피해자의 심정은 오죽할까. 어디에 설치되어 있을지 모를 카메라를 피해 도망가듯 황급히 볼일을 해결하고, 모텔에 숙박하기 꺼려져 웃돈을 주고 비즈니스 호텔에 가야만 한다. 그곳도 안전한지는 미지수다. 대중교통을 타도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하는 피해자와 잠재적 피해자의 정신적 에너지는 누가 보상해줄까.

가해자가 잡혀도 문제는 그 다음이다. 범인은 잡았을지언정 사진이나 영상의 유포 속도는 따라잡기가 불가능하다. 찍히지 않을 권리와 지워질 권리를 모두 빼앗긴 그들의 절규는 오늘도 끊이지 않고 들린다. 갈수록 줄어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늘어나기만 한다는 걸 모든 여성은 알고 있다.

비단 불법촬영뿐이랴. CCTV와 블랙박스 영상도 뉴스, 유튜브 등을 통해 쏟아지고 나아가 블랙박스 영상을 제보받아 상담해주는 TV 프로그램도 있다. 나는 이것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다. 어떠한 사실을 보도하기 위해 반드시 영상을 첨부해야만 할까. 피해자에게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고통일 텐데, 이 고통을 굳이 낱낱이 전시해 모든 국민들을 위한 반면교사의 자료로 제공해야 할까. 불과 얼마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도 CCTV 영상이 공개되며 더 큰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 영상을 보면서도 나는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이 겪는 공포를 굳이 영상으로 비춰줘야만 했을까. 그 영상이 공개되자 스타트업을 한다는 어떤 남자는 패러디 영상까지 찍어 올리지 않았나. 공포는 여자들에게 전파될 뿐, 그런 공포를 느낄 일이 거의 없는 대부분의 남성에게는 가십거리일 뿐이다.

수사기관과 당사자만 확인하면 충분

교통사고 블랙박스 영상도 마찬가지다. 특히 고 김주혁씨의 사고 영상이 연일 언론을 통해 보도됐는데, 이 영상을 온 나라에서 하루종일 보여줘야 하는 이유가 있을지 생각해봤다. 유가족이 슬픔을 추스르기도 전에 TV만 켜면 볼 수 있는 사고 현장의 생생한 모습이라니, 2차 가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림이나 그래픽으로, 혹은 말로 풀어 설명할 수 있는 현장인데도 말이다. 범죄 피해자에게도, 사고 관계자들에게도 잊혀질 권리와 지워질 권리가 있다.

CCTV가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범인 검거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블랙박스도 마찬가지다. 블랙박스가 생김으로 인해 보험사기범을 적발하고, 억울한 운전자의 누명이 벗겨지는 일이 많으니까. 그러나 그런 영상은 수사기관이나 당사자들만 확인하면 충분하다. 굳이 언론에서 전시하지 않아도 될 장면이다. 스마트폰과 미디어 매체가 발전하고 이른바 ‘유튜브 세상’이 도래하여 한 장짜리 설명문 대신 10분짜리 설명 영상을 봐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범죄자의 범행 현장 영상을 언론에 내보내 불특정 다수를 공포에 떨게 하는 것보다 해당 범죄자에게 강력한 처벌을 하는 게 범죄 근절에 더욱 도움이 된다. 음주사고 블랙박스 영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피해자가 ‘예비신부’라든지 ‘아들 면회에 다녀온 가족’이라든지 하는 비극성을 강조하기보다, 음주운전을 정말 강력히 처벌하는 법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이다. 공포는 공포를 낳을 뿐, 공포를 거울 삼아 그릇된 행동을 억제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되니까. 불법촬영을 근절하겠다는 홍보영상을 송출하면서 가해자에게 이입한 것 같은 아찔한 영상을 자료로 삼는 것보다, 처벌을 강력히 하는 것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효율적이다.

국민이라면, 한 명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권을 타고난다는 ‘천부인권’ 사상을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는 상대방의 찍히지 않을 권리, 지워질 권리, 원치 않는 사실로부터 잊혀질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건전하고 담백하며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며, 사실을 보도해야 하는 언론의 진정한 역할임을 나는 굳게 믿는다.

<원도(필명·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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