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열의 음악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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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가 이어준 작은 기적, 사랑은 시작되고

라디오는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이들의 인연을 잇는 희미한 끈이다. 헤어졌던 이들은 <유열의 음악앨범>이 ‘보이는 라디오’를 첫 진행하면서 다시 만난다.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제목 유열의 음악앨범

영제 Tune in for Love

감독 정지우

출연 김고은, 정해인, 박해준, 최준영

상영시간 12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19년 8월 28일

CGV아트하우스

CGV아트하우스

보도자료를 보니 영화의 장르를 ‘레트로 감성 멜로’라고 써놓았다. 레트로. 말하자면 추억 팔이. ‘유열의 음악앨범’이다. 그런 라디오 방송이 진짜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파를 탄 것이 2007년.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년이 지났다. 이미 추억 속의 프로그램이 되었으니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회상할 어떤 소재가 될 것이다.

방송이 첫 전파를 탄 것은 1994년 10월 1일이다. 그날 현우(정해인 분)는 학교로 가고 있었다. 두부가 필요했다. 왜? 소년원에서 나와 사회에 복귀한 첫날이기 때문이다. 길가의 자그마한 빵집에 들어간 그는 두부를 재료로 한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었고, 가게를 지키고 있던 대학 초년생 미수(김고은 분)는 결국 인근의 동네슈퍼를 소개해줬다. 그들이 처음 만난 날 라디오에서는, 정확히 말해 KBS 2FM에선 <유열의 음악앨범>의 ‘첫방’이 나오고 있었다. 유열은 이날 이렇게 첫 멘트를 친다. “방랑, 사랑, 비행기. 이 셋의 공통점은 무엇인지 아세요? 시작할 때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는 겁니다.” 진짜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학생이나 직장인이라면 오전 9시에 시작해 11시까지 진행하는 라디오의 주청취자가 될 수 없다. 주부이거나 택시운전자, 자영업자, 아니면 백수여야만 가능하다. 어쨌든 두 청춘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했다.

빵집이 엮어준 운명적 사랑

멜로 장르에서는 종종 주인공 남녀의 사랑을 전지적 시점에서 정해진 운명으로 포장하곤 한다. 여러 이야기의 계보 갈래를 묶다보면 그렇게 포장하고 싶은 것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능이다. 학교를 때려치우고 이 작은 빵집에 시급 1200원짜리 알바로 취업한 현우가 빵집에 머문 시간은 짧았다. 깜빵을 나와 중국집 배달원 등을 전전하던 친구들과 현우가 사고를 쳐 보호관찰이 취소되고 다시 감옥에 들어간 것이 그해 크리스마스 직후이니 두 달 남짓이다. 그러나 빵집은 그들의 운명을 잇는 장소다. 3년 후 두 사람은 재개발로 문 닫은 빵집 앞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20세기 소년’이라는 간판이 유난히 클로즈업되어 강조되던 출판사 사장이다. 간판은 대유다. 세기 전에 태어난 사람이면서 여전히 소년이라고 주장하는 ‘꼰대’는 이 ‘21세기 청춘남녀’의 사랑을 방해하는 인물이다. 20세기 초엔 다이아몬드를 가진 김중배가 있었다면 이 출판사 사장에게 ‘다이아몬드’는 외제차다. 그 방해자가 만들어내는 긴장. 최근 한국영화들, 예컨대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이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 같은 영화들이 묘사하는 섬뜩한 적대감과 비슷한 계열이다. 강남 교보문고 앞을 지나던 사장은 미수가 기획한 책이 판매 순위 6위에 오른 것을 두고 미수에게 “왜 더 솔직하게 기쁨을 표시하지 않느냐”고 하며 하이파이브를 요구한다. 단순히 꼰대질이라고 말하기엔 미묘하다. 위태위태하면서도 영악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에서 반복돼 사용된 소재들이지만 홍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인텔리라고 자칭하는 룸펜들-의 위악을 조롱하는 수법과 영화가 풀어내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어쨌든 이 영화는 식자계층에 대한 풍자를 다룬 것이 아니라 누구나 통과해왔을 청춘들의 풋풋한 사랑에 대한 추억을 그려내는 것이 목표다.

변할 것 없는 세상 속의 작은 기적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그 다양한 이야기의 줄기에서 필연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내러티브를 끄집어낸다. 없다면 상상하고 만들어서라도 말이다. 소년원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달라질 것은 없다’며 세상에 대해 비관했던 현우는 출소해 학교로 돌아가는 날 딱 하나의 변화를 목격하고 그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KBS 2FM 아침 음악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바뀌었다. 그 작은 기적이 일어나던 순간, 앞으로 수십 년을 운명으로 엮일 여인을 만났다.

‘세상은 변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그 몇 년 사이 세상은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빵집 옆에는 편의점이 들어섰다. 영화에선 사연이 나오지 않았지만 맞은편 동네슈퍼에는 타격이었을 것이다. 골목을 차지하고 있던 다세대주택들은 한꺼번에 헐려 아파트 단지가 됐다. PC통신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천리안을 쓰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문득 궁금하다.

라디오는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이들의 인연을 잇는 희미한 끈이다. 헤어졌던 이들은 <유열의 음악앨범>이 ‘보이는 라디오’를 첫 진행하면서 다시 만난다. 실제 방송은 12년 전 종방했다.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절정부에서 영화는 끝난다. 확실한 건 비슷한 세대와 시기를 다룬 <건축학개론>(2012)처럼 씁쓸한 결말은 아닐 거라는 것이다.

정지우 감독을 주목하는 이유

[시네프리뷰]유열의 음악앨범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영화 <해피엔드>(1999)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유부녀 전도연이 분유를 타 전자레인지로 돌린다. 그런데 분유 속에는 개미가 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면제를 섞어 아이의 입에 물린다. 신경이 온갖 다른 데, 내연남과의 만남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건 그때 극장 앞자리에 앉아 있던 노년과 중년 사이의 여성관객들이 보인 반응이다. “저런 미친 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분노를 표시했다. 영화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하늘을 날아가는 풍등을 보며 벽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는 전도연 시퀀스 같은 장면.

정지우라는 감독을 기억하게 된 계기다. <4등>(2017)을 볼 때도 그랬다. 도식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1등 지향 한국 사회에 대한 냉소 내지는 ‘4등은 또 어때서?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 아이들을 찾습니다’라는 이야기를 그렸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빠따’를 동원한 코치의 훈육은 실제 1등이란 결과로 이어지고, 그 내면화된 폭력은 주인공 소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동생과의 관계에도 전염된다. ‘왜 이것은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말하는 <은교>(2012)는 또 어떤가. 영화를 보고 나니 <유열의 음악앨범>이 이들을 이어준 계기인 것은 알겠는데, 정지우 감독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에 손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영화의 여주인공인 배우 김고은이 가진 재능을 남김없이 끌어내 세상에 드러나게 해준 것도 <은교>를 통해서였다. 벌써부터 감독의 차기작이 기대된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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