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기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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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떠나신 그리운 아빠

후회투성이인 살아온 세월만큼 더
너와 난 외로운 사람
난 기억하오 난 추억하오
소원해져버린 우리의 관계도
사랑하오 변해버린 그대 모습
그리워하고 또 잊어야 하는
그 시간에 기댄 우리

[내 인생의 노래]시간에 기대어

나는 목소리가 좋은 사람에게 금방 호감을 느낀다. 대학 기말시험 직전 벼락치기로 유력한 출제후보를 달달 외우던 시간에도 “책 덮으세요”라는 조교 선배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 갑자기 불안과 초조가 사라지면서 대책 없이 행복해져버렸다. 재판에 가서 상대방 대리인의 변론에 날카로워지다가 중후한 부장판사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기도 한다.

이런 내가 우연히 <시간에 기대어>라는 노래를 듣게 되었다. 처음 들은 것은 <팬텀싱어>라는 음악프로에서 박상돈 바리톤이 부른 버전이었다. 이 노래 덕분에 <팬텀싱어>도 좋아하게 되었다. <팬텀싱어>는 노래경연 프로그램으로, 개인이 출전해 경연과정에서 크로스오버 남성 4중창을 결성해 팀으로 우승을 가린다. 성악가, 뮤지컬 배우뿐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도 참여해 노래에 대한 열정으로 감동을 주기도 하였고, 내가 몰랐던 명곡들을 들을 수 있어 참 좋았다.

<시간에 기대어>도 이 프로그램에서 듣고 좋아서 원곡을 찾아 듣게 되었다. 원곡은 고성현 바리톤이 불렀다. 고성현 바리톤이 시원하게 저음과 고음을 넘나들면서 부르는 오페라곡을 들어보면, 그가 왜 외국에서 ‘동양에서 온 대포’, ‘콰트로 바리토니’(4명 몫을 하는 바리톤)로 불리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절제된 표현으로 애잔함을 꾹꾹 눌러 담아 부르는 <시간에 기대어>가 역시 가장 좋다.

이 노래의 매력에 빠진 뒤로 특히 아기를 낳고 모유수유를 할 때마다 자주 들었다.

“저 언덕 넘어 어딘가/ 그대가 살고 있을까/ 계절이 수놓은 시간이란 덤 위에/ 너와 난 나약한 사람….”

아기를 안은 채로 소원해진 과거의 사랑을 추억하는 가사를 음미하다가 ‘앗! 신랑과 아기를 두고 내가 지금 누굴 생각하는 거야’라며 슬그머니 현실로 돌아오기도 했다. 육아휴직을 하고 친정집에서 아기를 돌보았다. 그해 가을에 <팬텀싱어> 시즌2를 시작했고 나는 다시 매력적인 목소리에 빠져 매주 금요일 밤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때 항상 나의 귀 호강을 방해하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빠였다. 퇴직 후 소일거리로 동네 스크린골프장에서 내기골프를 치고 술을 마셔 불콰하게 물든 얼굴로 꼭 그 시간에 들어오셔서는 나에게 이런 저런 말을 거셨다. 나는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노래감상을 방해하려는 작정인 듯 재미없는 농담을 섞어서 말을 거는 아빠가 그때는 얄미워서 차갑게 대했다. 그러면 아빠는 또 그게 서운해서 목소리가 높아지고, 우리는 정말 별거 아닌 걸로 언쟁을 하기도 했다.

내가 벌을 받은 걸까. 앞으로 최소 10년은 더 살지 않겠냐고 자신하던 아빠는 그해 <팬텀싱어>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감기처럼 이틀을 앓으시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가 끝나고 <팬텀싱어> 결승전을 보던 날,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와 말을 걸어줄 것 같아서 계속 내 귀는 텔레비전이 아닌 문을 향해 있었다. 요즘에도 <시간에 기대어>를 자주 듣는다. 이젠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옛사랑이 아닌 아빠가 떠오른다.

<이주언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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