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광복회장 김원웅 “우리 친일청산 없이 일본 비난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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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장이 바뀐다. 8년 만이다. 광복회는 일제에 항거하다 숨진 순국선열과 독립투쟁을 벌이던 애국지사와 그 후손의 모임이다. 광복회는 민족정기의 기준을 세우는 단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이어진 건국절 논란에도, 친일미화 교학사 교과서와 국정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역사왜곡을 자행하려 할 때도 광복회는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박근혜가 임명한 문창극 총리후보가 “일본의 조선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망발을 했다. 그렇다면 많은 항일투쟁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행위라는 것인가. 오히려 광복회는 ‘<님을 위한 행진곡>은 빨갱이 노래’라는 우익단체 성명 발표에 들러리를 섰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새 광복회장 김원웅 “우리 친일청산 없이 일본 비난 못 해”

지난 촛불혁명은 역사전쟁의 요소가 컸다. 문창극 총리후보 규탄에 앞장서고 교학사 교과서 배포금지 가처분신청 등을 하며 역사전쟁 앞에 섰던 단체가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다. 그 연합회 김원웅 회장이 5월 8일 광복회장에 당선돼 6월 1일 취임한다. 취임을 앞둔 5월 17일 그를 만났다. 취임식 전이지만 그는 인수인계를 받는 등 사실상 업무를 챙기고 있어 여기서는 ‘회장’으로 표기한다.

-광복회장 선거 공약으로 ‘친일찬양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했다. 이번 가을 정기국회에 제출할 생각인가.

“이미 18대 국회에서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현 제주지사)이 제출했던 법안이다. 당시 통합민주당에도 역사의식을 가진 국회의원이 별로 없어 동력을 얻지 못해 폐기됐다. 지금은 역사의식을 가진 국회의원이 많아졌다. 특히 과거 친일파 부도덕성이 드러나면서 친일청산 문제가 정치권의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충분히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다.”

우리는 김원봉 서훈할 자격 안 돼

-최근 의열단 김원봉 단장 서훈 문제가 사회적 논란이 됐다. 결국 보훈처는 서훈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하는 분위기다. 김 회장 생각과 달리 우리의 사회 분위기가 아직 덜 성숙됐다는 얘기다.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대표로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나.

“단적으로 말해 대한민국은 김원봉에게 서훈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김원봉이 살아있다면 훈장을 안 받았을 것이다. 내가 김원봉이라도 안 받는다. 친일파가 득세하는 우리 대한민국이 그에게 훈장을 줄 자격이 있는가. 김원봉은 스스로 월북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쫓겨간 것이다. 북에 가지 않았으면 그는 남한 경찰·군인이 고용한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됐을 것이다.”

-김 회장은 ‘이 사회 주류는 친일 반민족세력으로 이를 민족세력으로 교체하는 것이 역사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일’이라는 신념을 자주 말했고, 이번 광복회장 선거에서도 그 점을 강조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제2건국’이 생각난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우리는 일제 강점 36년, 그리고 친일파 강점 74년을 산 것이다.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국군을 보면 군 장교 대부분이 의병, 독립군을 소탕하던 사람들이었다. 창군 후 18대 참모총장까지 모두 독립군을 토벌하던 일본·만주군 출신이다.”

-광복회도 관변단체로 전락했다는 평가도 많다. 광복회도 개혁해야 하지 않나.

“개혁한다. 광복회는 박정희 정부 때 관변단체로 출발했다. 첫 회장이 친일논쟁으로 시끄러웠던 이갑성옹이다. 부친이 살아계실 때도 ‘광복회장에 변절자를 시켰다’고 분노하곤 했다. 광복회 내부도 개혁할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회장 선출방식이다. 회원 8000여명 중 대의원 80명이 회장을 뽑는다. 그러나 실제는 회원이 대의원을 50명 정도만 뽑고 나머지 30명은 현직 회장이 뽑는다. 박정희 시절 유신정우회 꼴이다. 나는 이를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광복회를 ‘보훈처에서 국무총리실 산하로 옮겨야 한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가.

“현행 법에는 국가유공자 안에 독립유공자가 들어 있어 광복회는 다른 보훈단체와 같이 취급된다. 그러나 광복회는 다른 국가유공단체와 근본이 다르다. 군인·경찰과 달리 독립유공자는 자발적으로 재산 팔고 생명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이다. 미국도 독립운동가와 남북전쟁 희생자에 대한 대우가 다르다. 무엇보다 국가유공자인 경찰·군인은 대부분 친일세력이다. 국립현충원에 묻힌 고위 군인 대부분이 일제하 육사·만주군 출신이다. 그 사람들 아래 우리가 앉아야 하는가.”

그의 주장은 거침이 없다. 광복회 설립 근거인 ‘국가유공자 등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에는 상이군경회, 전몰군경유족회, 전몰군경미망인회 다음 네 번째로 광복회가 명시돼 있다. 정부나 자치단체는 이 순서대로 예우하고 지원한다. 그는 “이런 부당한 대우를 거부하겠다”고 말했다.

부부 독립운동가의 장남

김 회장은 조선의열단·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한 김근수 지사와 전월선 여사의 장남으로 1944년 중국 충칭(重慶)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건국훈장 애국장, 모친은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다. 1942년 당시 30살 김 지사와 19살 전 지사의 혼례를 주선한 사람은 백범 김구였다. 김·전 지사는 해방 후 국내로 들어와 서울 등지에서 살다가 대전에 정착했다. 김 회장은 “6·25 때 서울 살던 우리는 한강다리가 끊어져 피난가지 못했다가 1·4후퇴 때 겨우 피난을 갔다”면서 “다시 서울에 정착하려 했지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납북됐다는 소리를 듣고 한강을 건너지 않고 그냥 대전에 눌러 앉았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와 후손에 대한 취업 알선이나 재정지원이 없던 당시는 ‘독립운동가 후손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실감나던 시절이었다. 그는 “아버지는 평생 술과 담배로 살았고, 어머니는 가난한 집에서 고생만 하셨다”고 말했다. ‘다행히’ 아들이 공부를 잘했다. 그는 대전고를 나와 1962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굴욕적인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6·3사태 때 유인물을 제작했는데 ‘한국 경제를 미·일의 이중 굴레로’라는 대목이 문제가 됐다. 검사는 “일본을 비난해야지 왜 미국을 비난하느냐”며 그에게 집시법에 반공법까지 적용, 8개월쯤 교도소 생활을 했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자신의 계획을 밝히고 있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자신의 계획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공화당 당직자로 취업한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솔직히 첫 번째 이유는 생계 때문이었다. 집권당 당료 대우가 좋았다. 장남인 나는 동생들 교육도 시켜야 했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시 야당에는 여당인 공화당보다 친일파와 극도의 친미주의자들이 훨씬 많았다. 윤보선·장면·박순천 모두 그렇다. 1963년 대통령선거 통일공약을 보면 여당 박정희는 유엔 감시하 남북한 총선거인데, 야당 윤보선은 대한민국 헌법하 남북 총선거였다. 누가 더 진보적이었나. 당시 야당은 지금 생각하는 야당과 다르다. 당시 야당은 도덕적·정책적으로 여당과 별 차이가 없었다.”

-물론 윤보선은 대표적인 친일파 윤치호의 집안이고, 장면은 동성고 교장으로 학도병 참전을 독려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진보정치세력을 탄압한 공화당과 전두환의 민정당이 정당화될 수 없다.

“솔직히 그렇다. 비록 생계형이지만 친구·동료들이 감옥 가고 죽을 때 박정희 정권에 빌붙어 밥 먹고 산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정치를 시작한 이후부터 이 원죄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정치를 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가담하지 않은 노무현·이기택, 그리고 무소속 이철·박찬종 의원 등과 함께 민주당을 함께했다. 이들 모두 ‘3김 청산’을 외치던 사람들이다.

“14대 총선을 앞두고 3김 청산 기치를 들고 당을 만들어 당선됐지만 15대 총선 때는 3김 영향력으로 낙선했다. 서울 강남에서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고깃집을 열었다. 하로동선은 ‘여름 화로, 겨울 부채’라는 의미로 당장 필요치 않으나 언젠가 소중하게 쓰일 날이 올 것이라는 뜻이다. 내가 대표, 고 노무현 대통령이 감사를 했다. 하지만 장사가 안 돼 4년 만에 문을 닫고, 시골 가서 농사를 짓자고 같이 땅 3000평을 샀다. 3김 지역(호남·영남·충청)에서는 농사도 안 짓겠다는 생각으로 강원도 인제 골짜기로 갔다. 그때 산 땅에서 지금까지 약초농사를 지었다.”

-지난 촛불혁명은 친일·독재미화에 반대하는 역사전쟁적 요소가 컸다. 당시 적잖은 활약을 했다.

“정확히 봤다. 박근혜 정권의 역사왜곡에 당시 민주당은 힘을 쓰지 못했다. 그때 안중근기념사업회 함세웅 신부,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이부영 이사장(현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이우재 이사장과 나 넷이 모였다. 처음에는 임정기념사업회 김자동 이사장도 참여했다. 그리고 20여개 독립운동가 단체를 모아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를 만들었다. 여기서 민변과 상의해 교학사 교과서 배포금지 가처분신청을 하는 등 역사전쟁을 시작했다.”

촛불혁명 때 독립운동연합단체 이끌어

-현 문재인 정부는 친일청산과 민주화 왜곡에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친일청산 보훈정책에 힘을 실어주고 있지 않나.

“청와대는 우리와 역사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모든 정책은 예산으로 말하는 것이다. 광복회 예산이 26억원에서 불과 2억원 늘었다. 올해는 유족에게 실제 도움이 안 되는 이벤트만 많다. 대통령의 철학을 보훈처가 예산으로 확보해 시행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대통령의 철학과 관료가 소통이 안 되는 것 같다.”

김 회장은 14·16·17대 국회의원을 했다. 그는 초선의원 때부터 ‘일제잔재청산 의원모임’ 대표로 활동하면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 제정(1994), 일제 잔재인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는 ‘교육법’ 개정(1995) ‘일제 강제동원 진상규명 및 보상법’ 제정(2003),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 제정(2005) 등 주로 친일청산과 과거사 진상규명에 매달렸다.

그는 산하단체가 많은 문화관광체육위나 재벌을 다루는 정무위 등 소위 ‘물 좋은’ 상임위원장을 마다하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2006~2008)을 자청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독립운동가 아들로 외세에 의한 분단 극복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라고 했다. 통일외교통상위원장 출신인 그는 국제관계에 누구보다 정통하다. 최근 우리와 일본 관계는 냉각돼 있고, 풀 해법도 마땅치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이웃나라와 언제까지 갈등하며 지낼 수도 없는 문제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일본과 관계 정상화 문제는 답변하기 까다로울 것이다.

“일본 정치인을 만나 독일처럼 확실히 과거청산을 하면 아시아에서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소아적 애국주의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그러면 일본 사람들은 ‘우리보고 과거청산하라는데 한국 국립현충원에 갔더니 일본 전범 졸개들이 잔뜩 있다. 당신들은 왜 거기 참배하느냐’고 하더라. 대표적으로 ‘친일했다는 <조선일보>는 한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구독하는 신문 아닌가, 당신들은 그러면서 왜 우리보고 과거청산하라고 하느냐’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사실 할 말이 없더라. 우리의 친일청산 없이 일본을 비난할 수 없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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