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 쌀 지원 ‘재미동포 아줌마’ 신은미 “우리 잣대로 북한 보면 영영 화합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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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난 후 “인도적 입장에서 북한에 쌀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청와대의 이 발표를 두고 미국 측 발표에는 있느니 없느니, 쌀을 지원하는 데 굳이 미국에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느냐는 소리도 있다. 지난 5월 13일 세계식량계획(WFP) 데이비드 비슬리 사무총장은 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 식량사정이 최근 10년 사이 최악으로 136만톤의 식량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신은미씨는 2015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0돌 기념 열병식을 한국기자로는 유일하게 취재했다. / 도서출판 말

신은미씨는 2015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0돌 기념 열병식을 한국기자로는 유일하게 취재했다. / 도서출판 말

이미 2017년 북에 쌀을 지원한 사람이 있다. 유엔 제재가 엄연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그것도 북과 가장 첨예하게 맞선 미국 시민권자가 쌀을 지원했다. 사실 대북 인도적 지원은 유엔 안보리 제재대상도 아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에 따르면 지난해 스위스는 북의 장애인·노인 보호에 773만 달러, 스웨덴은 유엔식량농업기구(FAO)를 통해 568만 달러를 지원했다.

북에 쌀을 지원한 사람은 ‘재미동포 아줌마’ 신은미씨(58)다. 그는 지난 4월 방북 이야기를 묶은 <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이미 2012년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015년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 2016년 <남과 북의 오작교가 되어> 등 북한과 관련한 책을 4권이나 냈다. 신씨는 4년 전 미국으로 추방돼 국내에 들어오지 못한다. 인터뷰는 5월 10일부터 13일까지 페이스북 메신저와 전화통화로 이뤄졌다.

방북 이야기 묶은 책 펴내

-우리 정부가 북에 쌀을 지원하기로 했다. 어떤 생각이 드나.

“적극 찬성한다. 북한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의 하나가 식량부족이다. 북한 동포들도 식량 자급률은 90% 정도라고 말한다. 외화가 부족해 모자라는 10%를 수입할 사정이 안 되는 것 같다. 식량부족 사태는 북한 농지가 자연재해에 취약해 약간의 홍수나 가뭄에 생산량이 급감한 게 아닌가 추측한다.”

-유엔 대북제재에도 개인이 재단을 만들어 58톤의 쌀을 북에 전달했다. 민간도 가능한 쌀 지원을 정부 차원에서 왜 못했을까. 또 굳이 미국의 허락을 얻고 지원해야 하나.

“나는 미국 국적자이기 때문에 북에 물자를 전달하려면 미 재무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식량은 인도적 지원 품목으로 미국 외 나라들은 미국이나 유엔의 허가·승인이 필요 없다. 한국 정부가 북한에 쌀을 지원하지 않은 것은 아마 미국의 묵시적 압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의 동의 없이 지원할 경우 받게 될 여러 불이익을 고려했을 것이다.”

-책 <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에는 미국 재무부 승인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매우 까다로웠다. 직접 내가 하지 못하고 재단 이사 중 변호사가 처리했다. 미국 재무부가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아 2~3달 걸렸다.”

-과거 했던 한국인의 금강산 관광도 재개되지 않고 있다. 이 역시 유엔 제재와 무관하지 않나.

“미국 정부는 2017년 9월 1일부터 행정명령을 통해 미국인의 북한 여행을 막고 있다. 물론 이는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지금 미국과 유엔 대북제재와 관계 없이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두 가지가 바로 북한 관광과 식량지원이다. 금강산 관광 역시 미국 눈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도 미국교포 중에서는 북을 여행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은 시민권자가 아닌 영주권자들이다. 영주권자들은 한국 국적이며 한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어 미국 정부의 승인 없이 자유롭게 북한을 방문할 수 있다.”

신씨는 2016년 함경북도에 큰 홍수가 나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재단을 만들고 모금으로 4000만원을 모았다. 그는 어렵게 미 재무부 허가를 얻어 재중동포 무역회사를 통해 쌀을 구입, 트럭에 싣고 세관 등을 통과해 압록강철교를 건너 북에 쌀을 전달했다.

신은미씨 책 <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 / 도서출판 말

신은미씨 책 <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 / 도서출판 말

일부 야당과 극우단체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는데 웬 식량지원이냐”고 비난한다. 우리 정부가 미국 눈치를 본 것도 있지만 국내 보수세력을 의식한 탓도 있을 것이다. 5월 14일 민화협을 비롯한 종교계·대북지원단체들이 합동 기자회견을 열고 조속한 대북 식량지원을 촉구한 것은 정부에 자신감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다.

JTBC는 지난해 추석과 올 설날 특집으로 북한의 음식을 방영해 큰 시청률을 기록했다. 지금 평양 옥류관 냉면 남한 지점을 내기 위해 경기 고양시와 파주시는 치열한 물밑싸움을 벌이고 있다. 대동강맥주를 독점 수입하려는 유명 주류회사는 돈을 싸들고 남북교류가 열릴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신씨의 공소장에는 ‘대동강맥주 맛있다’, ‘북한주민 250만명이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는 대목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고 돼 있다. 지금은 핸드폰을 가진 북한 주민이 450만명으로 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경찰과 검찰에 세 번에 걸쳐 50시간 넘는 조사를 받았다.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는 추방됐고 5년간 한국 입국이 금지됐다.

그는 “수사검사가 ‘북한 주민의 핸드폰이 진짜인 줄 어떻게 아는가’라고 묻더라”면서 “질문이 초등학생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검사만 이랬을까. 미국 존스홉킨스대 한미연구소가 운영하는 북한 전문 웹사이트 ‘38노스’는 당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800달러에 불과한 북한에서 200만명 이상이 휴대전화를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며 “스마트폰은 북한 돈 330만원 정도로, 쌀 660㎏을 살 수 있는 돈을 써야 한다”고 보도했다. 미국에 있는 북한 전문가 수준이 이 정도였다.

2016년 압록강철교 건너 북에 쌀 전달

2011년 그의 첫 방북기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이는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을 방문하다>라는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2013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됐고, 통일부 홍보동영상까지 찍었다. 그는 북한 바로알기와 남북화해에 기여한 공로로 2014년에 통일언론상, 2015년에는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았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 들어 분위기가 갑자기 180도 바뀌었다. 국정원 댓글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박근혜 정권이 종북몰이를 통해 정권 정통성의 위기 탈출 계기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신씨는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여전히 한국 입국이 금지돼 있다.

-박근혜 정권 때 내려진 추방조치를 풀어달라고 재심 등의 요청을 하지 않았나.

“변호사가 재심이나 해제 요청을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내년 1월이면 입국금지 5년이 만료되니 구태여 지금 그런 요청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경찰·검찰 조사를 받을 때 분위기는 어떠했나.

“검·경의 조사를 받으며 ‘위에서 시켜서 하고 있다’고 느꼈다. 검사는 ‘내 위에 총장이 있고, 그 위에 또 있다’고 말했다. 조사가 끝날 무렵 부장검사가 ‘세상을 살다보면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위로하더라. 그때가 통합진보당 해산이 끝나고 ‘정윤회 스캔들’도 거의 뉴스에서 사라질 무렵이었다.”

-책에는 북을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대목만 있지 않다. 207쪽에는 김일성 주석 동상 앞에서 추모하는 사람을 보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라고 썼다.

“김일성 주석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궁전을 관람하는데 북한 동포들이 깊은 슬픔에 싸여 있었다. 이후 여덟 차례나 더 여행했지만 지금도 그 이유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지도자를 향한 북한 주민들의 존경이 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경제다. 북한은 미국과 대결로 국제경제에 참여하지 못해 엄청난 피해를 감내하고 있다. 생산물 공동소유와 분배로 인해 인센티브제에 문제가 있다. 북한당국도 농업 수확량의 자율적 지분을 보장하는 ‘포전담당제’, 자율경영과 이익의 자율처분을 보장하는 기업의 ‘독립채산제’ 등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북한이 경제발전을 위해서 북·미 대결을 끝내고 국제경제에 합류해야 한다.”

-북한은 주민에 대한 언론·정당의 자유 등 기본권을 제약하는 많은 부분이 있음은 인정하나.

“서방 기준으로 많은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북한 제도가 당연히 불편하다. 그러나 이는 북한 주민들이 자신의 체제나 제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이지 외부 사람들이 논할 문제는 아니다. 서방세계의 ‘북한 악마화’로 잘못 알려진 부분도 많다.”

신은미씨가 2015년 평양 경흥 대동강맥줏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도서출판 말

신은미씨가 2015년 평양 경흥 대동강맥줏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도서출판 말

-‘북한 악마화’를 조장하는 가장 큰 요인이 국가보안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위헌심판을 신청하려 했나.

“북한 악마화는 대략 세 가지를 통해 이뤄졌다. ‘엉터리’ 반공교육과 북한에 대한 가짜뉴스, 그리고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에 대해 헌재에 위헌 신청을 하려 했지만 외국인은 안 된다고 하더라.”

신씨는 1961년 대구 출생이다. 외할아버지가 목사 출신 제헌의원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국가보안법 제정을 주도했다. 그는 “나를 처벌한 국가보안법에 대해 알아보던 중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을 봤는데, 그 프로에 국가보안법 제정을 밀어붙인 장본인으로 외할아버지 이름과 사진이 나왔다”면서 “70년 전 할아버지가 만든 법에 손녀가 걸리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그의 부친도 6·25 때 압록강까지 진격한 육군장교였다.

70년 전 할아버지가 만든 법에 걸려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장로교)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신씨는 어려서 리틀엔젤스로 활동하면서 전세계 40여개 국에 공연을 다녔고 청와대 공연도 자랑스럽게 여겼다. 1980년 이화여대 음대(성악과)에 진학, 좀처럼 시위하지 않던 이대생들이 ‘주걱’을 들고 시위할 때도 그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데모하는 학우들 앞을 ‘때때옷’ 차려입고 지나칠 정도로 당시에는 철이 없었다”고 말했다. 1985년 대학을 졸업하고 86년 미국으로 유학해 미네소타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꼴통 아줌마’로 통했다”면서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에서도 북한은 사랑할 수 없는 나라였다”고 고백했다.

그의 사고가 바뀐 계기는 2011년 남편과 직접 평양을 여행하고부터다. 남편은 서울에서 대학(연세대)을 다니다 미국에 경제학을 공부하러 온 사람이었다. 그는 “남편은 ‘사회주의 체제 인센티브 제도’라는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다 북한을 같이 여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내가 배워 알고 있던 그런 ‘무시무시한’ 나라가 아니었다”면서 “북녘 동포들은 정신이 곧고 심성이 착하고 고운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신씨가 ‘꼴통 아줌마’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바뀐 것은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가슴으로 느낀 결과였다. 이후 그는 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민족 화합과 조국의 평화통일을 염원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민족의 화합과 평화통일을 위해 우리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한다”면서 “우리와 많이 다른 북녘의 모습을 틀린 것이 아닌, 다름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잣대로 북한을 보고 판단하면 남과 북은 영원히 화합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요즘도 부부는 같이 여행을 다니는데 신씨는 글을 쓰고, 남편은 사진을 찍는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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