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연의 <바램> 진실에 대한 용기와 신념 일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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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몸을 아프게 하고
매일 해결해야 하는 일 때문에
내 시간도 없이 살다가
평생 바쁘게 걸어 왔으니
다리도 아픕니다
내가 힘들고 외로워질 때
내 얘길 조금만 들어 준다면
어느 날 갑자기 세월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있진 않겠죠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 마디
지친 나를 안아 주면서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 준다면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내 인생의 노래]노사연의 <바램> 진실에 대한 용기와 신념 일깨워

2014년 12월이었다. 나는 “잘못가고 있다. 하면 안 된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 문건(‘비선실세 국정농단’ 문건)이 언론에 공개된 것 역시 내 의사와 관계 없었다. 나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일명 ‘지라시’를 생산한 국기문란사범으로 낙인찍혔다. 눈 앞에는 어둡고 세찬 바람이 살을 에는 긴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검찰 조직은 두 갈래로 수사를 벌였다. 문건 내용에 적시된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진위 여부는 일반 형사부에 배당됐다. 문건이 언론에 유출된 경위에 대한 수사는 특수부에 배당됐다. 내 기억으로는 문건 내용인 비선실세의 국정농단과 관련해서는 5차례 정도 조사를 받은 것 같다. 문건 유출에 대한 특수부 검사의 조사는 한 번 시작하면 하루종일 끝이 나지 않았다. 25회 이상의 조사를 받았다. 하기야 당시 살아있는 권력이자 인사권을 쥐고 있던 대통령의 엄중한 지시가 있었으니 검찰인들 달리 방도가 있진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2014년 12월 16일 새벽의 일이 떠오른다. 그해 11월 말 국정농단 문건이 언론에 공개되고, 서울구치소에 구금되기까지 매일 계속되는 특수부 검사의 조사에 지쳐 잠시 정신줄을 놓았다. 일어나보니 병원이었다. 당시 특수부 검사 4명이 돌아가며 계속 조사를 벌였다.

언론의 관심은 계속 뜨거웠다. 나는 그때도 경찰공무원 신분이었다. 한마디도 할 수 없었고, 할 생각도 없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와중에 한 기자와 전화통화를 했다. 그는 여타 기자들과 다르게 ‘어려운 시기에 건강을 잘 챙기라’는 말을 전했다. 가족들도 걱정했다. 그런데 전화통화 내용이 이후 보도됐다. “이 정부의 둑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 같다. 금이 가기 시작하면 둑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전화통화가 끝난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검찰 수사관들이 병원 입원실로 들이닥쳤다. 손에 꽂혀 있던 링거줄이 제거됐다. 나는 서울구치소의 차가운 방으로 돌아갔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쳤던 노래가 바로 노사연씨의 곡 <바램>이었다.

나는 서울구치소로 돌아온 다음 날 곧바로 조사를 받았다. 매일 반복되는 심야조사에 내 몸은 어느새 춥고 어두운 긴 터널 속에 들어가 있었다. 주위 어떤 사람들도 살아있는 권력으로부터 주홍글씨가 선명하게 낙인찍힌 사람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평소 존경하던 분의 말씀이 뇌리를 스쳤다. “눈이 내려 쌓인다고 굳이 치우려고 애쓰지 마라. 언젠가 봄은 올 것이고 햇빛이 나면 눈은 녹고 땅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진실의 땅을 딛고 서 있다는 용기와 굳건한 믿음이 있으면 언제가 봄은 온다.”

노사연씨의 노래는 진실에 대한 용기와 어둠이 결코 밝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신념을 일깨워줬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과도 같은 깨달음이었다. 아직 내게 봄은 찾아 오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멀리서 개구리의 울음소리와 진달래꽃 향기가 아련히 느껴진다. 봄은 오고 있다.

<박관천 전 청와대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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