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연극 만든 재독극작가 박본,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을 ‘예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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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평가가 극에서 극으로 이어진 사람을 꼽으라면 북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일 것이다. 불과 6개월 전까지 두 사람은 전 세계인 공통으로 ‘싫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그렇게 묘사됐다. 그러나 올 6·12 싱가포르 북·미회담 이후 두 사람에게 ‘적당히’ 호감을 가진 사람이 많아졌다.

[원희복의 인물탐구]통일연극 만든 재독극작가 박본,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을 ‘예언’하다

모국에서 <으르렁대는 은하수> 첫 연출

2년 6개월 전 두 사람이 만나 한반도 통일에 호감 있는 대화를 나누는 국면을 ‘예고’한 사람이 있다.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이런 국면을 예고한 사람은 대단한 정보력을 가진 정보기관 고위관계자거나 긴 안목을 가진 국제정치 분석가일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젊은 한국인 극작가 박본(31)이다. 그는 두 사람을 등장시켜 한반도 통일을 논하는 연극을 만들었다. 이 작품 <으르렁대는 은하수>는 2017년 독일 베를린 연극제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그는 20대부터 놀라운 상상력과 연출로 독일은 물론 유럽 연극계에서 주목받는 한국인 2세다.

박본이 주한독일문화원 설립 50주년, 독일 연극단인 ‘프라이에 뷔네’(현 우리극장) 창립 50주년을 맞아 9월 15일 자신의 작품 <으르렁대는 은하수> 낭독공연을 선보였다. 박본은 며칠간 예술집단 시파프로젝트 강유주·문학진·김병호의 낭독공연을 지도했다. 그가 모국에서 첫 작품을 연출했지만 국내 언론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독일어는 물론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스페인, 폴란드, 심지어 루마니아어로도 번역됐고, 공연됐다. 외국에서 이런 높은 유명세에 비해 정작 모국인 한국에서는 그를 잘 모른다. 박본은 “2011년 첫 상을 받았을 때 독일에서 KBS라디오에 독일어로 잠깐 인터뷰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한국 기자를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라고 말할 정도다.

-이번에 공연한 <으르렁대는 은하수>는 어떤 내용의 작품인가.

“나는 글을 쓸 때 거대담론이나 큰 테마를 생각한다. 이 작품은 허구적인 연설을 담으려 했다. 등장인물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싫어하는 인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을 설정했다. 재미있는 것은 2016년 이 작품을 쓸 당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아닌 대선후보였다. 당시 아무도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연극은 허구이기 때문에 이 허구의 공간 안에서 모두 싫어하는 인물을 등장시켜 공감을 얻는 과정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만나 한반도 통일을 얘기한다는 발상을 어떻게 하게 됐나. 게다가 김 위원장을 통일을 원하는 지도자로 묘사했다. 김 위원장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대부분 인물이나 실제는 양면적이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있듯이 의견은 갈린다. 그러나 김 위원장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못생기고 심지어 추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연극에서는 일부러 김 위원장을 독재자가 아닌 진정 통일을 원하는 호감 있는 지도자로 그렸다. 우리가 김 위원장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 아니었을까.”

-이후 김 위원장이 한국 평창동계올림픽에 전격 참여하고 트럼프 미 대통령과 싱가포르에서 6·12 정상회담을 하는 등 대화의 장으로 나왔다. 또 지난 9월 18일 남북정상회담에서는 솔직한 면모를 보였다는 평가가 많다. 2년 반 전에 만든 허구의 연극 내용이 실제와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트럼프와 길게 악수했고,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당겨 깜짝 북으로 같이 월경한 것도 알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처음으로 김 위원장의 공식 연설,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외모에 비추어 의외로 들렸다. 목소리가 굉장히 좋았다.(하~하~)”

독일서 출생, 베를린 예술대 극작 전공

일단 박본을 먼저 소개하자. 박본은 한국인 아버지(박병석·재독 정치학 교수)와 한국인 어머니(삼성SDI 유럽지사 근무) 사이에서 1987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4살 때 부산에서 잠깐 살았지만 계속 독일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내 11세에 희곡을 쓰고 연출까지 했다. 14세에는 독일 TV드라마에서 동양인 아역배우를 했고, 이때 다섯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김나지움(고등학교) 다닐 때 베를린 민중극장에서 시행하는 청소년 연극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본격 연극을 배웠다. 그는 “p14라는 청소년 연극 프로그램이었는데 연극세계는 실패도 새로운 모색도 할 수 있는 점이 매우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슬라브 문학을 공부하다 베를린 예술대학으로 옮겨 극작을 전공했다. 이후 베를린 민중극장 유명 연출가 밑에서 연출 실무를 익혔다.

박본 희곡집

박본 희곡집

그는 2011년 하이델베르크 희곡 작가전에 첫 작품 <젊은 2D 슈퍼마리오의 슬픔>을 발표해 혁신상을 받고, 2013년 <덴마크의 왕자 심바>를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2014년 27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슬픔과 멜랑콜리>로 엘제 라스커 쉴러 신진 극작가상을 수상했다. 이때 명예상을 받은 독일 연극계 노장 페터 한트케와 나란히 시상대에 서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의 작품 <슬픔과 멜랑콜리>는 방송으로 각색돼 방영되고, 본 시립극장에서 초연됐을 뿐 아니라 독일 연극전문지에 시나리오 전문이 실리기도 했다. 2016년에는 자신의 죽음을 다룬 <박본을 애도함>으로 젊은작가상을 받고, 2017년 독일 베를린 연극제에서 <으르렁대는 은하수>로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베를린 연극제는 독일뿐 아니라 스위스·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 전체를 대상으로 한 연극제로 유럽에서 권위가 높은 상이다.

박본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한 재독 조경학자 고정희씨는 “2016년 5월 14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연극제에는 엄정한 사전 심사를 통해 여섯 명의 우수한 작가가 초대돼 기성 배우들이 작품을 입체 낭독, 박본의 작품이 심사위원과 청중 모두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면서 “만 30세에 베를린 연극제 작품상을 받은 것은 전례 없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고씨는 “박본의 작품이 남다른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함께 세상을 보는 눈이 아주 깊은 점”이라며 “희한한 아이디어가 많아 과연 무대에 올릴 수 있을까 싶은 경우도 있고, 굳이 무대에 올릴 필요도 없이 읽기만 해도 재미있고 좋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그의 작품은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고 공연됐다. 하지만 정작 모국인 한국에서는 뒤늦은 올 8월 <슬픔과 멜랑콜리>, <박본을 애도함>, <으르렁대는 은하수> 세 작품을 모은 <박본 희곡집>이 출간됐을 뿐이다. 이 희곡집을 출간한 도서출판 오즈의 마법사 송순섭 편집장은 “영리목적이라면 박본의 작품을 번역해 출판할 수 없겠지만 워낙 작품이 독특하고 유럽에서 주목받는 작가라 출판했다”고 말했다.

웃지못할 사연은 독일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희화화 했다’는 이유로 지원을 거절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8월 고정희씨가 독일 포츠담시와 한국문화원이 공동 주최하는 문화제에 박본과 소설가 김안나 작품 낭독회를 추진했다. 박본이 온다는 것을 안 포츠담시는 매우 기뻐하며 대대적인 홍보 계획까지 마련했다. 그러나 한국문화원에서 ‘박본의 작품에 트럼프가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지원이 곤란하다’는 답변을 받았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긍정적으로 묘사돼 있는데, 미 트럼프 대통령은 우스꽝스럽게 묘사됐다는 평가는 정확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두 사람 모두 ‘사랑스럽게’ 묘사했다.”

-그로 인해 지난해 8월 포츠담에서 열린 문화축제에서 한국문화원이 지원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랬을 것이다. 나는 연극에서 김정은과 트럼프를 사랑스럽게 묘사한 것이지, 실제 내가 두 사람을 그렇게 본다는 것은 아니다. 그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하~하~). 내 작품에서 도발적이거나 누구를 자극할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작품 세계의 주안점은 무엇인가. 비평가들은 기발한 상상력에 비평과 풍자가 담겼다고 한다.

“매우 광범위한 질문이다. 나는 계속해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지금처럼 호기심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작업을 할 때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고, 내 머릿속 아이디어를 가능하면 잘 구현했으면 한다. 그 아이디어가 얼마나 잘 구현됐느냐는 평가는 관객이나 비평가들이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사실 내 작품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다. 대단하다는 사람도 있고, 형편 없다고 깔아 뭉개는 사람도 있다.(하~하~)”

지난 9월 14일 서울 독일문화원에서 박본이 자신의 작품 낭독공연을 지도하고 있다.

지난 9월 14일 서울 독일문화원에서 박본이 자신의 작품 낭독공연을 지도하고 있다.

부모와 매년 한국에, 대학로 소극장 알아

그는 나이에 비해 적잖은 희곡을 쓰고 TV드라마에도 관여했다. 그는 “예전에 단편영화 몇 개를 찍었는데 앞으로 영화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와 함께 1년에 한 번씩 휴가차 한국에 왔다. 대학로에 가본 적이 있고, 전주에서 독일연극에 대해 강연을 한 적도 있다. 그는 한국에 오면 아이디어가 샘솟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연극에 대해 설명을 들을 기회가 없어 내막을 잘 모른다”면서 “외국 대형 연극을 공연하는 대극장이 있고, 대학로에서 상업연극을 하고, 열정을 갖고 지하소극장에서 활동하는 소극단이 있다는 정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2011년 독일 한국문화원에서 발간되는 계간지 <Kultur Korea> 편집장 슈테파니 그로테 박사와 인터뷰에서 “한국의 즐비한 소극장이 흥미롭고 기대에 부풀었는데 막상 극 자체는 실망스러웠다, 거의 모든 이야기가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여서 TV드라마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국의 동시대극은 완전히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수준이라고 느꼈다”고 신랄히 비판한 적이 있다.

기자가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데 정작 한국에서 알아주지 않는 것에 섭섭하지 않나’라고 질문하자 그는 “아쉬움이나 섭섭함은 없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만큼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도 크지 않을까?”라고 받아 넘겼다. 그는 한국어를 간단한 일상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밖에 못한다. 게다가 독일에서 나고 자라 사고방식 역시 독일식이다. 그러나 자신의 바탕이 한국인이라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독일에서는 외모가 달라서, 한국에서는 외모는 같지만 한국어를 잘 모른다는 점에서 나는 두 나라 모두에서 낮선 이방인이었다”면서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커가면서 조금씩 바뀌고 있다. 독일친구도 많아지고, 한국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면서 나는 한국과 독일 두 나라 모두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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