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 타이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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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베스터의 장편 <타이거! 타이거!> 한국어판 표지 | 시공사

앨프리드 베스터의 장편 <타이거! 타이거!> 한국어판 표지 | 시공사

증오와 사랑이 격돌하는 가운데 주인공은 자수의 길을 택한다. 복수하려다보니 저지른 죄상도 낱낱이 회개한다. 지금까지 계획한 복수가 덧없다고 여기건만, 세상은 그의 뜻대로 돌아갈 조짐이 전혀 없다.

2011년 영국 신문 <가디언>이 영미권 일류 SF 작가들에게 최고의 SF 소설을 일제히 물었을 때 오늘날 사이버펑크의 서막을 연 윌리엄 깁슨은 군말 없이 앨프리드 베스터의 장편 <타이거! 타이거!>(1957·또 다른 제목은

<별들은 나의 목적지>)를 꼽았다.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한 펄프소설로 그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현기증 나면서도 속이 뻥 뚫린다”는 게 이유다. 그는 첫 장편을 쓸 때 이 작품을 비교 잣대로 삼기도 했다. <영원한 전쟁 시리즈>(1974~1997)로 스타덤에 오른 조 홀드먼도 2~3년마다

<타이거! 타이거!>를 되풀이해 읽으며 바닥난 영감을 충전한단다. 기존 대가들뿐 아니라 최근 인기 TV드라마 <익스팬스 시리즈> 원작자 티 프랭크 또한 이 소설이 명불허전이라 장단 맞춘다. 국내에서도 2004년 재간 이래 절판은커녕 지금도 꾸준히 팔린다.

미아가 된 민간우주선의 생존자

<타이거! 타이거!>가 반세기 넘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은 무엇일까?

겉껍질만 놓고 보면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같은 복수극 플롯이 전형적인 사이버펑크 소설의 세계관과 정교하게 맞물린다. 내행성연합과 외위성동맹 간 전쟁 통에 한 민간우주선이 포격으로 누더기가 된다. 유일한 생존자는 걸리버 포일. 170일간 동강난 선체 파편 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공기와 음식으로 근근이 버티다 마침내 계열사 우주선이 접근해오자 열렬히 구조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는 우주선. 원래 야망은커녕 상상력도 변변찮은 무지렁이였지만 극단의 절망은 그를 복수를 위해 편집증에 가까울 만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으로 만든다. 처음에 그는 자기를 버린 우주선 자체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것을 폭발하려들 만큼 머리가 아둔했지만 나중에 진짜 복수해야 할 대상은 고위승무원들과 그들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배후인물임을 깨닫는다.

예서 주목할 것은 환경변화가 인간을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느냐다. 순박한 청년 에드몽 당테스가 모함과 고난에 시달리며 비상한 두뇌의 카리스마 넘치는 준걸(俊傑)이 되듯이, 자질 부족에 의욕 부진이란 인사고과를 달고 다니던 하급승무원 걸리버 포일은 고생 끝에 지구로 돌아오나 경솔하게 굴었다가 지하 동굴 감옥에 갇히자 복수하려면 완력보다 지성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열공한다. 덕분에 탈출한 뒤에는 다른 사람으로 신분을 세탁해 사교계 명사로 떠오르며 원수들의 면전을 유유히 걸어 다니는 등 180도 달라진다. 이제 포일은 난파우주선에 실린 프레스타인 그룹의 비자금을 가로채 거부가 된 데다 내행성연합과 외위성동맹 모두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가공할 위력의 열핵폭발물 ‘파이어(PyrE)’를 지녔다.(파이어는 염력으로만 점화된다.) 심지어 끝에 가서 그에게 다른 평범한(?) 초능력자들은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광대한 우주공간을 생각만으로 가뿐하게 점프하는 능력이 있음이 밝혀진다. 과연 걸리버 포일이 복수에 성공할까? 아니면 실패할까?

주인공 걸리버 포일의 모습을 일러스트로 표현한 영문판 표지 | Gollancz

주인공 걸리버 포일의 모습을 일러스트로 표현한 영문판 표지 | Gollancz

작가는 이분법적 도식을 피한다. 포일은 백옥처럼 아름다운 맹인 처녀 올리비아에게 첫눈에 반한다. 프레스타인 집안 사람들은 죄다 돈과 권력에 눈이 멀었지만 그의 눈에 올리비아만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지금까지 포일은 복수에 필요하면 협박과 사기 그리고 강간과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허나 그녀 앞에서 그는 처음으로 복수 이외의 생각에 빠진다. 그러나 상식적 해피엔딩은 포일의 운명이 아니다. 그는 구조선에게 자신을 방치하게 했을 뿐 아니라 앞서 태운 피난민들조차 돈과 보석을 뺏고 진공의 우주로 방출해버리라고 지시한 장본인이 프레스타인 그룹 총수 ‘프레스타인의 프레스타인’이 아니라 바로 그의 딸 올리비아였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한다. 증오와 사랑이 격돌하는 가운데 주인공은 자수의 길을 택한다. 복수하려다보니 저지른 죄상도 낱낱이 회개한다. 지금까지 계획한 복수가 덧없다고 여기건만, 세상은 그의 뜻대로 돌아갈 조짐이 전혀 없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건 말건 그의 손에는 ‘파이어’라는 이번 전쟁을 단번에 끝낼 무기가 들려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전쟁 당사자들이 어떤 음모와 완력을 동원하건 간에 포일은 더 이상 범인(凡人)의 손이 닿지 않는 단계로 진화한다. 보통 사람이 시공을 넘나드는 초인이 되면 단지 자신의 가공할 정신력을 과시하는 데 골몰하는 대신 포일은 점차 사바세계의 범사에 초연해지며 대국적으로 우주 전반을 내려다보는 준신격의 부처가 된다는 점에서 앨런 무어의 만화

<워치맨>(1986~1987)의 캐릭터 ‘맨해튼’을 연상시킨다. 이상에서 보듯 이 작품의 주안점은 초능력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맞춰져 있다. 1956년 잡지에 처음 실렸지만 <타이거! 타이거!>는 1980년대의 사이버펑크 소설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이윤 극대화에 눈이 어두워 온갖 흉계로 정부를 물 먹이는 다국적 기업을 상대로 우리의 통상적인 도덕관념과는 동떨어진 주인공이 사이버네틱 보철술로 강화한 몸을 앞세워 한판 승부를 벌이는 이야기니까. ‘존팅(jaunting)’이라 불리는 텔레포테이션이 정치·군사적으로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찰도 흥미롭다. 셰필드(외위성 동맹의 스파이)와 양-요빌(내행성연합의 정보국 관리자)이 포일을 자기 손에 넣으려는 근본 이유는 파이어가 아니라 그의 우주공간 점프 능력 때문이다. 죄수들의 경우에는 존트할 수 없도록 좌표계를 가늠할 수 없는 암흑천지의 지하 감옥에 수용된다. 우스꽝스럽게도 상류여성들도 같은 신세나 진배없다. 소위 ‘보호’라는 명분 아래 창도 문도 없는 방 안에 거주해야 하니까.

첫 눈에 반한 맹인 처녀의 정체는

스타일 실험도 예사롭지 않다. 하층민 출신다운 주인공의 적나라한 욕지거리와 윌리엄 블레이크 식 시어의 운율이 함께 어우러진 이 소설은 엔딩 시퀀스에 이르러 화려하다 못해 창조적인 변신을 꾀한다. 책에 인쇄된 글자는 단지 내용 전달 수단에 그치지 않고 주인공이 겪는 무작위 공감각 전이현상을 시각화한다. 서체의 모양과 크기 그리고 단어와 단어가 이어진 선이 들쑥날쑥 자유로이 변형됨으로써 시각을 미각과, 청각을 촉각과 혼동해서 지각하는 주인공의 인지부조화가 한층 강조된다. 영화에 비유하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우주비행사가 모놀리스 너머로 외계인들 고향에 찾아가는 특수효과 장면 같달까.

<타이거! 타이거!>는 마치 밸러드의 소설처럼 생생한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문장이 그에 못지않게 강렬한 도덕적 비전과 융합되었다는 평을 듣는다. 도처에서 액션이 일어나고 등장인물들은 서로 속이고 속으며 인정사정 없는 주인공이 좌중을 압도하는 스페이스오페라가 개인의 양심회복과 사회의 도덕적 질서 회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사납게 달려든다. 아울러 화려한 문체실험은 근미래에 투영된 이 음울한 묵시록을 한층 돋보이게 해주는 화룡점정이다.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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