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윤성의 <완전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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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만의 사회는 과연 행복할까?

현재의 인류 대표가 당도한 미래는 성간(性間) 전쟁 끝에 여성들에게 패한 남성들이 화성으로 전원 추방되고 지구상에는 오로지 여성들만 살게 된 지 오래인 단성(單性)사회다.

1965년 첫 출간됐다 2018년 복간된 <완전사회>의 표지. | 아작

1965년 첫 출간됐다 2018년 복간된 <완전사회>의 표지. | 아작

2018년 7월부터 여성단체 ‘불편한 용기’가 주도한 혜화역 시위는 회를 거듭하며 뜨거워지는 모양새다. 남성적 시각에서 광범위한 성차별과 이에 대한 정부의 안일한 대응을 규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혹여 남성혐오 내지 여성우월주의로 변질되지는 않나 하는 우려가 언론 일각에서 제기될 정도다. ‘생물학적 여성’만이 집회 참석이 허용되었다는 보도도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같은 시기, ‘워마드’(Womad)라 불리는 이들의 자극적인 행위도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가톨릭 교회의 성체 훼손과 예수 비하·모욕, 남아 시신 사진을 통한 ‘낙태인증’ 그리고 화곡동 어린이집에서 사망한 남자 영아를 ‘유충’과 ‘살충’이라 비하한 것 등이다. 여기 공권력이 개입될 경우, 이들은 이 역시 여성 권익에 대한 탄압의 증거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홍익대에서 벌어진 ’몰카’ 사건처럼, 일베를 포함한 남성들에 대해서는 미온적이던 정부가 여성들에게만 ‘가혹’하다는 것이다.

미국 법학자 캐스 R. 선스타인은 극단주의가 패거리주의와 맞물릴 때 한층 더 과격해진다고 분석한 바 있다. 분노에 찬 한두 명이 아니라 특정 이슈에 공감하는 이들이 온라인에 모이고 그러한 유대가 다시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연대와 결속으로 발전하다 보면 궁극에 가서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 IS 못지않은 골격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 그의 요지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페미니스트 중 과격파에게서도 흡사한 패턴을 읽을 수 있을까? 혹여 양성평등 따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며 일부 여성들이 여성우월/남성폄하 이데올로기 아래 모여들어 자기네 주장을 행동으로 관철시키려 들 여지는 없을까? 만약 이 같은 극단주의에 동조하는 여성들이 세상의 절대다수를 점한다면 남성들 입장에서 얼마나 간담이 서늘할까.

여성들만 사는 미래로 간 남성

정말 이런 가정 아래 쓰인 소설이 있다, 그것도 무려 50여년 전 바로 이 땅에서. 사라 스캇(Sarah Scott)의 <천년 홀과 인근의 나라에 관한 묘사(A Description of Millennium Hall and the Country Adjacent)>(1762)나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의 <여자만의 나라(Herland)>(1915)처럼 주류남성 사회에서 도피한 여성들의 공동체를 그린 영미소설들과 달리 문윤성의 <완전사회>(1965)는 여성들이 무력을 동원해서 모든 남성을 지구상에서 몰아낸, 말 그대로 워마드가 꿈꾸는 바로 그런 사회의 이야기다.

언제 세계대전이 터질지 모르는 혼탁한 국제정세 속에서 유엔은 인류의 대표 한 사람을 뽑아 미래로 보낸다. 훗날 잇따른 자충수로 인류가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모르나 이미 이룩한 찬란한 문명과 업적을 미래의 후손과 소통하기 위함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해 미국은 베트남전 개입을 선언했고 그로부터 불과 한 달 만에 우리나라 최초의 월남파견 전투부대 청룡부대의 결단식이 경북 포항에서 있었다. 베트남전은 초강대국들의 대리전 성격을 띠었고 세계3차대전의 불씨는 도처에 널려 있었다.

단번에 미래로 보낼 타임머신은 없으니 시간여행방법으로 냉동수면이 채택된다. 그러나 시간여행자 ‘우선구’가 다시 깨어나 마주한 22세기 세상은 뜻밖에도 그에게 몹시 적대적이다. 치욕스런 신체검사를 밥 먹듯이 되풀이할 뿐더러 밑도 끝도 없는 사상검증과 체계적인 ‘뇌 세탁’이 시도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구가 다름 아닌 남성이라서다. 그가 당도한 미래는 성간(性間) 전쟁 끝에 여성들에게 패한 남성들이 화성으로 전원 추방되고 지구상에는 오로지 여성들만 살게 된 지 오래인 단성(單性)사회다. 그러니 우선구는 존재 자체가 근심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과거인류의 사절이란 취지가 무색하다. 남성을 생전에 한 번도 본 적 없을뿐더러 남성이라 하면 마치 1960~1970년대 초등학교 반공포스터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묘사된 간첩처럼 그로테스크한 괴물로 여겨온 미래사회의 주민들(모두 여성들)에게 그는 털 달린 원숭이이자 열고 싶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다. 사회격리로도 모자라 정보기관과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다행히 일부 양심적 인사들의 도움으로 우선구는 숨 돌릴 틈을 갖는다. 과연 화성에 살고 있는 소수의 남성들과 지구에 사는 다수의 여성들 사이에서 주인공은 ‘남성’이란 본인의 성을 떠나 의미 있는 중재자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저자인 문윤성 작가의 사진 | 아작

저자인 문윤성 작가의 사진 | 아작

한국 최초 성인독자 대상의 장편과학소설인 <완전사회>가 제시하는 도발적 상상은 이게 다가 아니다. 사전지식 없이 읽는다면 좀처럼 1960년대에 나온 소설이라 짐작하기 어려운 통찰과 예견이 잇따른다. 이 단성사회는 일종의 페미니즘 유토피아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체 내부모순 탓에 몸살을 앓는다.

종족번식은 유전공학으로 가능

여성들만의 사회라 해서 종족번식이 어렵지는 않다. 유전공학으로 모체의 배아세포 복제를 통해 얼마든지 후손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문제는 사람살이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건강한 성욕을 갖고 있다. 하나의 성만 존재하는 사회라 해서 절로 구성원 모두가 달마 도사처럼 무색무취의 선인이 될 리 있겠는가. 그래서 정부는 오토메이션 자위시설(홀랜)을 방방곡곡에 세운다. 하지만 반응이 영 시들하다. 누가 기계 따위와 그러고 싶겠나. 성행위에는 필연적으로 감정이 개입되게 마련인데. 사랑 없이 그저 욕망 배설만을 위해 섹스를 한다면 자신 또한 기계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 결과 동성애(께브)를 즐기는 여성들이 자꾸 늘어난다. 이에 세계단일정부는 께브주의자들을 엄벌에 처하나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 심지어 께브주의를 신성시하는 사이비종교까지 기세등등한데, 신도들의 면면을 보면 정부 고관대작들도 적지 않다.

정부의 골칫거리는 이들만이 아니다. 일부 여성들의 무성화(無性化) 시술 열풍 또한 사회를 곤경으로 몰아넣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체내에서 자궁을 적출하여 아예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가 되려 한다. (작가의 유전공학 지식의 시대적 한계로 인해) 이 ‘완전사회’의 배아 복제는 체세포가 아니라 생식세포로만 가능하기에 무성화는 인류 종의 개체 수 확보를 위협하는 반체제 행위다. 이쯤에서 눈치 챘겠지만 작가의 속내는 어느 한 성(性)의 절대 우위만으로 행복한 사회가 도래하지 않음을 설파하는 것이다.

문윤성의 <완전사회>는 일찍이 196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동성애를 작품의 주요 화두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필립 호세 파머의 1950년대 작품 <연인>에 견줄 만하다. (후자는 과학소설 가운데 세계 최초로 노골적인 성적묘사를 다루었다.) 하지만 집필 맥락상 작가의 본래 관심사가 성차별과 동성애에 있었다 보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이런 소재가 쟁점은커녕 주의도 끌지 못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이는 SF 특유의 비유와 풍자 정신 때문이었으리라. 종전 후에도 이념대립으로 인한 갈등과 국론분열은 가라앉지 않았고 예기치 못한 군사정권의 등장 아래서 작가는 문학을 통해 화합으로 가는 치유의 길을 제시하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1960년대 중후반 이 소설을 접하고 그 외피 아래 숨겨진 풍자를 꿰뚫어본 독자가 얼마나 되었을까? 그리고 이번에 재간된 이 소설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볼 독자는 얼마나 될까? 갈등과 치유라는 소설의 메시지가 여전히 유효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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