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환 <옥상으로 가는 길>, 백상준 <좀비 그리고 생존자들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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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인 척하며 사는 ‘우리들의 두 얼굴’

처음에는 좀비의 출몰에 잔뜩 긴장하게 만들지만 뒤로 가면 우리 자신의 추한 민낯 탓에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좀비보다 추한 인간의 몰골, 이것이야말로 좀비소설이 추구해야 할 궁극의 목표가 아닐까.

장마에 이어 찾아온 불볕더위, ‘납량특집’이란 상투적인 타이틀 아래 각종 공포물이 텔레비전과 영화 그리고 만화와 소설을 누비는 시즌이다. 하지만 개인적 원한에 사무친 귀신이 악착같이 달려든다거나 악령에 홀려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정도로 관객과 독자의 간담을 진짜 서늘하게 할 수 있을까? 요즘처럼 먹고살기 빠듯한 세상에 좀비들이 길거리를 쏘다니는 얘기쯤으로 88만원 세대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까?

황태환의 <옥상으로 가는 길> | 황금가지

황태환의 <옥상으로 가는 길> | 황금가지

좀비 이야기도 하기 나름이다. 망해버린 문명의 잔해 속에서 좀비들과 사투를 벌이는 생존자의 영웅적인 투쟁 같은 할리우드식 전개에는 심드렁할 만도 하다. 하지만 최근 요 몇 년 사이 발표된 국내 좀비소설을 보면 벌떼처럼 덤비는 좀비들은 주로 배경요소로나 쓸 뿐, 그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여과 없이 드러나는 인간성이나 부조리한 현실인식에 초점을 맞춘다. 처음에는 좀비의 출몰에 잔뜩 긴장하게 만들지만 뒤로 가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추한 민낯 탓에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좀비보다 추한 인간의 몰골, 이것이야말로 좀비소설이 단지 B급 오락소설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곱씹게 만드는 사변소설이 되려면 추구해야 할 궁극의 목표가 아닐까.

이러한 시도가 아주 성공적인 국내 좀비소설 두 편을 소개한다. 황태환의 단편 <옥상으로 가는 길>(2012)과 백상준의 장편 <좀비 그리고 생존자들의 섬>(2013)이다.

“처음으로 이 저주받은 몸이 고마웠다”는 사내

<옥상으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거의 다 좀비로 변한 가운데 대도시 곳곳에 고립된 극소수 생존자들이 정부가 헬기로 건물 옥상에 던져주는 구호품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근미래가 배경이다. 뜻밖에도 이 소설의 포커스는 좀비와 인간의 대결이 아니다. 한 낡은 건물 1층 상가에 다섯 명이 고립된다. 살아남으려면 각층마다 나 있는 쓰레기 배출구로 옥상까지 올라가 헬기가 떨어뜨린 구호품을 가져와야 한다. 계단에도 좀비들이 득실대니까. 환풍구보다 약간 더 큰 이 통로를 드나들 수 있는 이는 난쟁이 사내 ‘성국’뿐이다. 그 결과 이 작은 폐쇄사회의 권력지형이 예전과 180도 바뀌어버린다.

“처음으로 이 저주받은 몸이 고마웠다.” 성국은 왜소한 몸집 탓에 건물청소부로 일하는 것조차 감지덕지했었지만 부지불식간 권력서열 1순위로 올라선다. 그가 있어야만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까. 대재앙 이후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세상이 폭삭 주저앉으면 기성사회의 이력과 재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일깨워준다. 피에 굶주린 좀비 떼가 서슬 퍼런 눈으로 문짝을 두들겨대는 판에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 면허증이나 조폭의 어깨근육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처음에는 성국도 양심껏 돕지만 도움 받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천연덕스러운 구태(난쟁이에 대한 조롱과 편견)에 불만을 품고 태업에 들어간다. 굶주린 사람들은 그의 발아래 엎드리고 뜻하지 않게 권력의 맛을 본 성국은 폭주기관차처럼 그들 위에 군림하려 든다. 독재자로 돌변한 성국에게 염증을 느낄 무렵 사람들 앞에 권력의 추를 뒤흔들 새 경쟁자가 나타난다. 식량 부족을 이유로 반대하는 여론을 무릅쓰고 좀비들에게 쫓기던 모자(母子)를 건물 안에 들였더니 정작 그 아이가 자기처럼 좁은 통로를 자유로이 오가며 식량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삽시간에 성국은 왕따가 되고 소년이 새로운 식량공급자로 떠오른다. 이제 성국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엇일까? 권력의 정점에 오른 자가 그 영광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해 추악한 만행을 벌이는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지배와 피지배의 심리학을 효과적으로 담아낸 <옥상으로 가는 길>은 마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좀비판 같다. 둘 다 권력의 지형도를 작은 공간에 압축해 선명하게 보여주는 데 성공했으니까.

아니 왜 서로에게 정체를 숨기고 속였을까?

백상준의 <좀비 그리고 생존자들의 섬> | 황금가지

백상준의 <좀비 그리고 생존자들의 섬> | 황금가지

<좀비 그리고 생존자들의 섬>(이하 <섬>) 또한 좀비소설이란 장르적 특질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당면한 제반문제들을 통렬하게 돌아보게 한다. 건설회사에서 일하던 30대 주인공 ‘나’는 좀비들만 설칠 뿐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파트촌에서 고립된 섬처럼 살아간다. 특기할 것은 주인공이 세계 종말에 대처하는 태도가 지극히 무덤덤하다 못해 시큰둥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리차드 매드슨(Richard Matheson)의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1954)에 나오는 최후의 생존자가 보여준 비장함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나’는 세상이 무너지든 말든 안중에도 없다. 정신적 공황 따위는 사치다. 대신 ‘나’는 좀비로 되살아난 부모를 다시 한 번 완전히 죽여버린 다음 그 피부를 뜯어내 자기 몸에 붙여서 위장하고 좀비들 속을 돌아다닌다. 이마트에 가서 장봐야 하니까. 좀비는 몰라도 인간은 먹어야 산다. ‘나’는 좀비가 없을 때보다 살아가기 조금 더 불편해졌다고 여길 뿐이다. 물과 가스, 전기가 끊어져 잘 씻지 못하고 몰골이 말이 아니나 이제 누굴 의식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구하러 오지 않는 군대나 정부를 욕할 때도 있다. 혹시 아는가? 미군이 구하러 올지. ‘나’는 만일에 대비해 갑자기 토익 공부에 열심이다. 미군 병사 앞에서 좀비로 오인되면 곤란하잖은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결말이다.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서 ‘나’는 먹을 것이 바닥나자 결단을 내린다. 토목 엔지니어로서의 전공을 살려 폭발물을 구해다 자기 사는 아파트 최상층에다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는 혹시 몰라 좀비들이 서성이는 아래에다 대고 외친다. 곧 무너질 테니 만일 사람이 있다면 대피하라고. 그때 ‘나’는 본다, 말 끝나기 무섭게 좀비들 사이를 헤집고 마치 ‘강물을 거슬러 가는 연어처럼’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13명을. ‘나’는 눈을 의심한다. 열셋, 열셋이나 있다니! 다 나처럼 좀비인 척하며 좀비들 틈에 살아왔다니! 왜 이제까지 서로 알아보지 못했을까? 아니 왜 서로에게 정체를 숨기고 속였을까? 이렇게 소리치면 다 들리는 곳에 함께 살면서 아파트 벽에 메시지를 써놔도 그리고 약수터에서 좀비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목숨을 건 탐문을 시도해도 왜 저들은 끝내 묵묵부답이었을까?

<섬>은 결말에서 이렇게 묻는다, 세상의 기생충은 좀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니냐고. 기회주의자들만 득실대는 세상에서 과연 변화와 개혁을 꿈꿀 수 있을까? 당신이 참여하지 않는 세상이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섬>은 우스꽝스런 좀비 이야기인가 싶더니 막판에 가서 두 얼굴을 가진 우리들의 알량한 자존심을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발라내버린다.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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