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억울하고 힘든 상황에서 듣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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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 큰 하급생과 놀다 일방적으로 맞았을 때 맞서 대들지 못했다. 그때 선생님은 하급생과 싸운다고 자신을 혼냈고 가방도 팽개치고 울며 집에 갔을 때 엄마 역시 바보같이 동생한테 맞고 다닌다고 야단쳤던 장면이 생생하다.

새벽부터 창밖에서 새소리가 요란하다. 알람소리가 아닌 새소리에 잠을 깨다니 이게 실화인가 싶었지만 그 소리에 끌려 결국 방밖으로 나왔다. 도시에서만 자란 나는 유독 시골 정서에 둔하다. 나무 이름은 물론 새 이름도, 나물조차 무슨 풀인지 모르고 살았다. 이른 새벽 산마루에 있는 숙소는 온갖 살아있는 것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자연 속에서 나는 마치 유일한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지만 자연은 그런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은 나를 품으며 ‘괜찮아 함께 놀자’고 권유하는 것 같았다.

김상민 기자

김상민 기자

집단상담이 끝나고 모두가 돌아간 산마루 숙소는 유독 한가로웠다. 어제까지 시끌벅적했던 열기는 어디 가고 온갖 새소리, 새벽안개, 하얀 나방의 나풀거림만이 이곳이 살아있는 곳임을 알려줬다. 지난밤에 그 무시무시하게 생긴 시커먼 나방들과는 사뭇 다르게 나비인지 나방인지 알 수 없는 하얀 나풀거림만이 청초한 새벽아침을 깨운다. 사랑스럽다. 내 평생에 나방이 사랑스럽다고 느낀 건 처음이다. 대체 무엇이 우리의 마음밭을 이토록 부드럽게 개간했을까.

부모의 횡포를 온몸으로 받는 아이

집단상담에 참여한 며칠 동안 우리들은 수많은 마음속 돌덩어리들을 하나씩 캐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누가 내 마음에 던진 것인지조차 몰랐던 돌덩어리들. 마치 처음부터 나와 함께 살아온 듯, 무거움이 차라리 익숙하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하나 하나 이야기를 꺼내다보면 뭔지 모르게 아프고 쓰리고 눈물이 난다. 상대의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돌이 되어 하나씩 튀어나올 때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도 아팠다. 남의 얘기인 줄만 알았던 응어리가 파장을 만들며 내 속을 두드린다. 울컥 감정이 올라온다.

바쁜 현실 속에서는 필요한 것만 듣기를 요구한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잘 듣고 따라야 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걸맞은 정보들을 찾고 중요 포인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귀는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들에 최적화가 되어 있나 보다. 그러다보니 내 내면의 소리침에는 외면한 지 오래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나를 향한 수많은 소리들이 있지만 당장 내게 필요한 소리만을 듣게 된다. 다른 소리를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언젠가 TV에서 외국 오지마을의 아낙네들이 그들이 사는 산골의 동물들과 얘기를 나누는 프로를 본 적이 있다. 놀라웠다. 여인이 휘파람 비슷한 소리를 내면 저편 어디에선가 비슷한 휘파람 소리가 들리며 계속 대화하며 걸어가는 모습이 무척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다른 종들의 소리에 관심을 보였고 드디어 소통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들도 다른 생명체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있었을 텐데 혹시 퇴화된 건 아닐까 생각했다. 행복지수가 높은 그녀들은 다른 종들과 대화를 시도하며 더불어 살기를 원했다. 더불어 살기를 원할수록 우리는 상대의 언어를 배우려 한다. 내 안에 응어리가 별로 없다면 내 안에 기꺼이 다른 대상을 받아들일 여유가 생겨서일까.

우리는 외국여행을 하려면 최소한 그 나라 언어를 몇 개 배우고 떠난다. 흔히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정도는 아주 기본으로 배운다. 또한 아기들에게 말을 가르치는 부모들 역시 처음에는 생존에 필요한 단어들 즉 ‘엄마, 맘마, 물’ 등을 가르치고 차츰 ‘아빠, 할머니’ 등 가족들을 가르치다 점점 세상 속으로 들어가며 ‘안녕’과 ‘고마워’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어린아기들을 안고 들여다보면 옹알이를 한다. 뭐라고 열심히 옹알거린다. 엄마와 아빠는 아이의 말을 알아들은 듯 사랑스런 표정으로 “어, 그랬어. 그랬구나”를 되풀이하며 바라보면 아기는 한참을 옹알거린다. 그순간 부모는 아기와 하나가 되어 기뻐한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서로 하나가 되는 정서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외국여행에서도 마찬가지다. 짧은 언어 실력으로 떠듬거리며 전달하려는 우리의 노력과 어떻게든 이해하려는 그들의 애씀으로 서로 소통하고, 끝내는 “고맙다”로 마무리하고 함께 웃는다. 이렇듯 우리는 타인을 향한 열린 마음 즉 타인과 잘 지내고 싶은 기본욕구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과 인내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아이와 말이 통하고 외국인과 소통이 되기 시작하면 점점 상대의 잘잘못을 지적하며 조언을 시작한다.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제대로 가르쳐준다는 이름으로 우리는 상대를 향해 지적하기 시작한다. 우리들의 열린 마음은 어느 틈에 상처를 주고 상처받는 위축된 상황이 되고 서로 단절된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여행은 그만둘 수 있지만,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내 맘대로 벗어날 수 없다. 아이는 고스란히 부모의 횡포를 온몸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이는 어느 틈에 점점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신을 이것도 저것도 모르는 수치스런 존재로 각인하기 시작한다. 내면에 알 수 없는 응어리가 둥지를 틀기 시작한다.

상황극 통해 사건 속 인물을 만나다

집단상담에서 있었던 K의 절규가 떠오른다. 그는 수십 년 전 초등학교 때 일을 떠올렸다. 덩치 큰 하급생과 놀다 일방적으로 맞았을 때 맞서 대들지 못했다. 그때 선생님은 하급생과 싸운다고 자신을 혼냈고 가방도 팽개치고 울며 집에 갔을 때 엄마 역시 바보같이 동생한테 맞고 다닌다고 야단쳤던 장면이 생생하단다. 얼마나 그날의 사건이 머리에 각인됐으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리 억울하고 수치스럽고 힘든 상황에서도 누구에게도 대들지 못했단다. 그는 그런 자신을 보며 오열했다. 이것이 어찌 K만의 일인가.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비합리적인 자기상을 품고 산다. 아무리 옆에서 그건 아니라고 얘기해도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은 어린 그 시절에 고착되어 있다.

K가 그토록 절규했던 대상은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K는 집단상담 속에서 상황극을 통해 어릴 적 불합리한 사건 속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을 지금까지 괴롭히고 주눅들게 했던 사건 속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가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의 기억이 이끄는 대로 그 당시 인물들을 만나게 했고, 역할을 배정해주는 등 상황극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짧지만 강렬하게 수십 년 전 일을 재경험할 수 있었다.

“어떻게, 왜 나한테 그렇게 했어!” 그는 온힘을 다해 소리쳤다.

다시 경험하는 그날의 사건 속에서 그 당시 하급생도 만났고 선생님도 만났다. 사실상 같은 사람도 아니고, 말 그대로 상황극일 뿐인데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K의 어깨가 들썩이더니 바닥에 무너져 울음이 터진다. 상대방 역을 맡은 사람은 바닥을 향해 아무 말도 없이 오랫동안 흐느끼는 K를 향해 충분하다고 여겨질 때까지 마음을 전달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억울하고 많이 힘들었지.” “그동안 얼마나 억울하고 슬펐겠니. 그때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엄마가 얼마나 야속하고 혼자 외로웠겠니. 정말 미안하구나.”

꽉 채워진 5분이 흐르자, K가 고개를 든다. 눈가가 아직 촉촉하게 불그스름한 것 외에는 상당히 환해진 얼굴이다. 쑥스러운 듯이 살짝 웃는다. “너무 오랫동안 듣고 싶은 말이었어요….” 나도 그의 손을 잡고 미소로 화답했다.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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