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포럼 대표 양길승-사람보다 정치·사회 치유하는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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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승 6월 민주포럼 대표는 공식적으로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이사장 명함을 가지고 다닌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주권자 전국회의 상임공동대표, 평화철도 공동대표, 통일맞이 부이사장, (사)일과건강 이사장, 참여연대 고문 등등 본인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직함이 많다. 그렇다고 나이 69세에 ‘자리’ 욕심 때문이 아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은 몸 보시, 사람 채워주기, 기자회견하면 옆에 서주기, 제일 중요한 것이 밥값 내주기”라고 말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6월 민주포럼 대표 양길승-사람보다 정치·사회 치유하는 마법사

그는 민주화·통일단체 모임 후 식당에 가면 일부러 계산대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는다. 가장 먼저 밥값과 술값을 내기 위해서다. 기자가 ‘돈이 많으시냐’고 질문하자 “그래도 내가 의사이지 않나”라고 말했다. 한 운동권 현직 의사는 “양 선배도 형편이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양 대표는 비상근 이사장으로 한 달에 한 번 회의수당 5만원을 받는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한두 시간 정도 검진을 한다”면서 “이 나이에도 의사들은 다 알바를 해. 그래도 의사는 돈 벌기가 쉬운 직업’이라고 말했다.

6월항쟁 9주년인 1996년에 만들어

그는 6월 민주포럼 대표를 맡고 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6월항쟁에 대해 지난해 30주년 때 잠깐 관심이 높더니 지금은 시들하다. 6월항쟁이 낳은 소위 ‘386세대’(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는 지금 486을 거쳐 586으로 여전히 건재하다. 그러나 변변한 단체 하나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역사에 진지함이 없다는 방증이다. 그나마 선배 격인 6월 민주포럼이 ‘간판’을 달고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6월 민주포럼은 6월항쟁 9주년인 1996년 최열·안병욱·황인성·정상모 등과 함께 발의했다. 6월항쟁 10주년을 그냥 보내면 되겠느냐 해서 준비위를 만들었다. 다음해 10주년 행사에서 학술토론도 하고 책자 2권과 자료집을 냈다. 6월항쟁이 가진 새로운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10주년 포스터가 참 멋있었다.”

-6월항쟁이 가진 새로운 힘은 무엇이었나.

“6월항쟁의 중요한 포인트는 민주화운동이 학내 서클 차원에서 사회·시민사회조직으로 커진 것이다. ‘호헌철폐’ 서명과정에서 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모임이 만들어졌다. 변호사는 민변, 대학은 민교협, 선생님들은 전교조(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 등이다. 의료계만 해도 인도주의의사회, 건강사회약사회, 참된 의료를 위한 한의사회, 보건과 사회 등 무려 7곳이나 생겼다. 6월 민주포럼은 바로 그 단체들의 연대 혹은 ‘대동제’ 성격이다.”

그는 인의협을 창립하고 직접 상근했다. 무엇보다 그는 학생·노동자·농민들의 분신과·타살·의문사 등 참혹함 주검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 1991년 전투경찰이 대학생을 폭행해 숨지게 한 명지대 강경대 치사사건, 성균관대 김귀정 질식사 사건, 연세대 노수석 변사사건 등 민주화 과정에서 숨진 사람들의 ‘한’을 위로했다.

“강경대 치사사건 때 진상조사단장으로 정부 측과 유족 측 쌍방 의사 4명이 참여했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가슴을 맞고 부러진 갈비뼈가 심장막을 뚫었다. 출혈로 심장이 혈액에 둘러싸인 사진이 나왔다. 우리는 ‘사인이 분명하다’고 했고, 정부 측 부검의도 ‘사인일 수 있지만 부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가족이 부검을 원치 않아 부검을 하지 않고 장례를 치렀다. 그때 정부 측 의사가 황적준 박사다.”

군사정권이 눈엣가시 같은 그를 가만둘 리 만무했다. 뚝섬에서 성수의원을 운영하던 그는 “한 달 매출 2000만원도 안되는 의원급에 일주일간 계속된 감사를 두 번이나 받았다”고 말했다. 그나마 30년 전 6월항쟁 때는 의사 양길승, 부검의 황적준이 있어 진실을 가렸다. 그러나 최근 촛불혁명 과정에서 서울대병원 교수는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끝까지 ‘병사’라고 우겼다.

-6월항쟁 때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진실을 말하려는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촛불에서 의사의 태도는 실망스러웠다.

“의사는 남들보다 더 교육받은 것에 대한 선민의식이 있다. 의사는 전문지식으로 사회에 봉사해야 하는데 우월의식을 갖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의대교수 정도 되면 거의 신성한 ‘홀리닥터’가 된다. 내가 녹색병원 원장 하면서 전문의 채용 면접 때 몇 가지 얘기했다. 여기서는 인턴이 없어 당신이 다 해야 한다, 또 대학병원이 아닌 이곳 환자는 당신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의사를 믿지 않는 환자에게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나마 양 대표가 만든 인의협이 백남기 농민 사망진단서의 ‘병사’ 문제를 처음 제기했다.

“그보다 나는 서울대 의대생들의 ‘선배에게 묻습니다’라는 대자보가 걸작이었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학생들의 대자보는 촛불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양 대표의 견해에 기자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2017년 9월 25일 백남기 농민이 오랜 투병 끝에 숨지자 경찰은 시신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았다. 부검을 통해 병사라고 사인을 조작하기 위해서였다. 양 대표를 포함한 백남기농민대책위원회는 2017년 9월 29일 오전 11시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에서 백남기 농민 시신을 지키기 위해 ‘백남기 농민 사망 국가폭력 규탄 시국선언’을 가졌다. 긴급하게 마련된 노상 기자회견이었지만 여론이 호응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인 9월 30일 서울대 의대생 102명이 ‘선배님에게 의사의 길을 묻습니다’라는 대자보를 붙였다. 자신의 실명을 공개한 의대생들은 “외상의 합병증으로 질병이 발생해 사망했으면 외상 후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사망의 종류는 외인사라는 것은 저희가 법의학에서 배운 내용”이라며 “직업적 양심이 침해되는 사안에 대해 침묵하지 말아달라, 저희가 어떤 의사가 돼야 하는지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이 대자보는 선배 의사·약사·한의사를 넘어 많은 대학생들에게 이어졌다. 결국 10월 1일 열린 백남기 농민 추모제에 3만명이 모여 촛불혁명의 방향을 바꿨다.

대학때 긴급조치 반대 수업거부 주도

양 대표는 최근 대한의사협회가 ‘문재인케어’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를 보면서 같은 의사로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사람이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됐느냐고 묻는다”면서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으로 미화하기보다 맹점이라는 점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보 대상을 확대하면 의사 수입이 줄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 아닌가. 의사들이 그렇게 어렵나.

“노동자의 50%가 비정규직으로 어렵다면 어려운 의사는 채 5%도 안될 것이다. 의협은 그 어려운 의사 5%가 늘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초음파 의료수가를 보면 의원급은 더 벌고, 병원급은 그대로이며, 대학병원만 깎인다. 실상이 이러니 회원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양길승 대표가 서울 인사동 주권자 전국회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양길승 대표가 서울 인사동 주권자 전국회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녹색병원은 과잉진료를 하지 않아도 잘 운영되는가.

“녹색병원은 첫 투자에 대한 금융비용이 없었다. 원장 시절 흑자를 내 직원에게 보너스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환자에게 제대로 서비스 하기 위해선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고 낡은 건물을 보수하는 등 투자가 계속돼야 한다. 3년 전 원장을 그만뒀지만 지금은 좀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서울시와 협약을 맺어 산재나 감정노동자 피해자 정신과 치료를 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나라 공공의료는 채 10%도 되지 않는다. 최소한 공공의료가 30%는 돼야 안정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맞다. 공공의료가 30%는 돼야 공공성이 확보되고 이를 기반으로 민간의료가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공공의료를 확대하면 민간의료가 축소된다고 반대한다. 서울시가 공공의료를 확대하려 해도 서울시 의사회가 반대한다.”

그는 1949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사업으로 성공한 부친 덕분에 ‘자유롭게’ 학교생활을 했다.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하면서 해양대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평발로 낙방, 1967년 서울대 사대(수학교육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1학년을 다니다 실망해 고향에 내려가 ‘놀다’ 1969년 다시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부친이 “집안에 검사도, 수녀도 있는데 의사가 없다”는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양 대표는 “긴급조치에 항의해 수업 거부를 주도, 1년 10개월 동안 도피 끝에 보안사에 붙잡혔다”면서 “보안사 33일, 다시 중앙정보부에서 30일 도합 63일간 불법구금·고문을 당했다”고 말했다. 보안사는 그를 간첩사건으로 엮으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오히려 민간인을 영장 없이 33일이나 구금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됐다. 그러나 <자본론> 등 불온서적을 가지고 읽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년여 실형을 살았다. 출소 후 서점을 운영하다 1978년 여성문화운동가 이혜경과 만나 결혼했다.

정치 참여했다 환멸, 다시 시민사회로

1980년 대학에 복학했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다시 제명됐다. 1982년 김수환 추기경의 신원보증으로 아일랜드 골웨이의대에서 의사수업을 받고 귀국, 86년 1월 한국 의사자격을 땄다. 의대 입학 17년 만이다. 그의 활동은 이때부터 본격 시작됐다. 1987년 인의협을 만들고, 1988년 노동과건강연구회 초대 대표를 맡으면서 노동자의 직업병과 산재 문제에 천착했다. 지금은 산업의학 전문의 제도가 있지만 당시에는 없었다. 그는 전문의가 아니지만 전문의를 상대로 강의했다. 그는 2003년 경기도 구리시에 있던 원진레이온에서 직업병 판정을 받은 노동자들이 모은 기금으로 세운 녹색병원 초대 원장으로 참다운 ‘인술’을 구현하려 노력했다. 의학계에서 그의 행적은 의학사(史)학회에서 ‘한 의료인이 겪은 70~80년대 민주화과정’이라는 제목으로 요약돼 있다.

그의 활동은 의료계보다 시민사회운동에 더 왕성했다. 참여연대 출범부터 참여해 시민위원장·집행위원장·운영위원장을 지냈다. 2004년 총선 물갈이 국민주권연대에서 낙선 정치운동을 하다 급기야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최고위원으로 직접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때 같은 당 대변인이 현 이낙연 총리다. 그는 곧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6개월 만에 다시 시민사회로 돌아왔다. 당시 일부의 반대가 있자, 33명 원로들이 “양길승이 정치권으로 간 것은 시민사회 요청으로 간 것이니 다시 받아줘야 한다”고 ‘윤허’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촛불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는 30년 전 6월혁명과 이번 촛불의 차이점을 이렇게 말했다.

“올 신년 하례식 인사말에서 나는 6월항쟁과 이번 촛불은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6월항쟁은 최루탄에 맞고 백골단에게 깨지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번 촛불은 축제였다. 촛불은 우리 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보여준 것이다. 6월항쟁 이후 지난 30년 동안 가부장적 권위나 직장 내 여성관계, 기업 간 갑질 등 우리 생활 속의 민주화에 대한 노력과 훈련이 미흡했다. 그것이 바로 요즘 미투나 대한항공 사건 등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제 배려와 존중과 나눔이 없으면 안된다. 이것이 민주화의 기본이다.”

양 대표는 긴 수염을 기르고 다닌다. 마치 J R 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마법사 간달프와 비슷하다. 소설에서 간달프는 가장 지혜로운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친구인 이수호 전 전교조 위원장은 국회 앞에서 촛불을 들고 밤새는 양길승을 이렇게 묘사했다. “…문도 안 열어주는 국회의사당, 그 쇠담을 에워싸고 촛불 하나 들고 떨고 있으니….” 그는 지혜로운 간달프라기보다 ‘우직한’ 간달프였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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