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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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전쟁 대신 초식동물의 평화주의

초식동물이 만물의 영장이 된 사회는 훨씬 더 온화하고 화합과 공존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육식동물에서 진화한 우리에게 일종의 대안을 보여준다.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 한국어판 표지. |아작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 한국어판 표지. |아작

과학소설에는 ‘하드(Hard)SF’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보통 과학기술의 경이가 우리 삶에 어찌 녹아들지 그 인과관계를 낱낱이 그리는 데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는 작품들을 일컫는다. 그래서 사회성 짙은 과학소설을 선호하는 이들은 하드SF에 대해 선입견이 없지 않다. 겉으로는 가치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인 척하나 인간사회의 제반 모순을 꿰뚫어보는 일을 등한시하기에 결국 기득권 지지 이데올로기에 기여한다는 논리다. 실제로 하드SF가 과학적 경이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사회비판적 SF보다 인간과 사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데 소홀한 경우가 없지 않으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외계에서 온 인류의 과학적 알리바이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The Gentle Giants of Ganymede)(1978)은 제임스 P. 호건의 대표작 <거인 시리즈(The Giants series)>(1977~2005) 속편으로, 앞의 선입관을 뒤흔드는 하드SF다. 외계인과 인류 간 최초의 접촉을 그린 이 이야기는 양자(兩者)의 만남이 실제라면 어찌 진행될지, 그리고 우리와 동떨어진 외계인사회라면 어찌 운영될지 사고실험한다. 이 소설은 논리정연하게 전개되는 하드SF이면서도 끝에 가서 정치·윤리적인 자기성찰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그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다시 쓰는 인류의 기원이 시사하는 함의다. 첫 권 <별의 계승자(Inherit the Stars)>(1977)가 인류는 지구 토종이 아니라 외계에서 유래했다는 의혹을 풀어가는 미스터리물이라면,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과학적인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지금으로부터 2500만년 전 지구에서는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쯤 될 프로콘술(Proconsul)이 네 다리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갈 무렵,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던 ‘미네르바’라는 지구형 행성에 우리보다 과학기술문명이 월등히 앞선 휴머노이드들이 살았다. 미네르바는 지구보다 훨씬 추웠으나 목성의 조석력(끌어당기는 힘) 덕에 내부마찰로 열이 나고 대기가 두꺼우니 온실효과를 일으켜 지구에서보다 훨씬 일찍 생명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다 대기 속 이산화탄소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자 미네르바인들은 지구의 동물들을 자기네 행성에 데려온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은 대기에서 진화한 지구동물의 DNA를 추출해 미네르바 행성의 토착동물에게 이식하는 유전공학실험을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들은 고향행성을 버리고 먼 외계로 떠난다. (왜 미네르바인들은 가까운 지구에 정착하지 않았을까? 해답은 조금만 기다리시라.)

그 결과 무주공산이 된 이 행성에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바로 토종동물들의 멸종이다. 이들은 모두 느림보 초식동물들이라 지구에서 온 포식자들에게 죄다 먹힌 것이다.(왜 미네르바의 동물들이 죄다 초식성인지는 조금만 기다리시라.) 지구동물(특히 육식동물)들이 미네르바에 와서 지능이 비상하게 발달한 까닭이다. 지구에서라면 육식동물들은 잡아먹은 초식동물의 몸에 들어 있던 독소를 혈액 속에서 중화시키고자 늘 어느 정도 독에 중독(면역)되어 있다. 게다가 산소와 영양분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뇌기능까지 최상으로 끌어올릴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미네르바의 초식동물들은 더 이상 체내에서 독을 만들어내지 않게 미네르바인에 의해 유전공학적으로 개조되었으니 지구에서 온 육식동물들은 더 이상 독을 중화하는 데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어졌다.(그 이유 또한 조금만 기다리시라.) 덕분에 지금으로부터 5만년 전쯤 아주 비상한 두뇌를 지닌 지적인 종이 나타나 첨단과학기술문명을 구가한다. 문제는 이들이 고도의 과학기술력을 보유했으나 지구의 현대인류보다도 잔혹하고 이기적인 약육강식 습성을 버리지 못해 툭하면 전쟁을 벌이다 급기야 고향행성까지 말아먹었다는 점이다. 행성이 가루가 되자 가장 큰 조각은 바깥 궤도로 밀려나 오늘날의 명왕성이 되고 나머지는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 벨트를 이룬다. 한편 미네르바에는 큰 위성이 하나 있었는데, 이 또한 궤도를 이탈하여 태양에 끌려가다 우연히 지구에 낚여 우리가 알고 있는 달이 된다. 다행히 마침 달에 있었기에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지구로 이주해 네안데르탈인으로 평행 진화한 지구인류와 혼종결합 끝에 오늘날의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된다.

제임스 P. 호건의 <거인 시리즈> 연작 영문판 표지.|Del Rey

제임스 P. 호건의 <거인 시리즈> 연작 영문판 표지.|Del Rey

초식동물이 만물의 영장이 된 사회

하드SF답게 비비 꼬인 역추리과정이 흥미로운 이 이야기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무엇일까? 단지 인류의 외계기원설로 독자의 눈길을 끄는 정도? 최근 남북정상회담의 최우선 화두는 핵 폐기문제 아니었던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 2년 뒤인 1947년 원자과학자들이 만든 지구 종말시계는 미·소냉전 시절 이래 노상 자정 2~3분 전을 오갔다. 지금이라고 뭐가 다를까? 대외협상력 발휘에 절대적 지렛대라 할 핵무장 권리를 포기할 리 없는 북한과 이를 묵과할 수 없는 미국 간의 힘겨루기는 다른 핵보유국들의 핵무기 경쟁 못지않게 국제정세의 불안요인이다. 노골적으로 말해 지구 역시 미네르바처럼 산산조각나지 말란 법 없잖은가. 과연 인류는 먼 조상처럼 다시 어리석은 자살골을 넣을 것인가?

두 번째는 초식동물이 만물의 영장이 될 가능성이 갖는 의미다. 미네르바 지상은 워낙 춥다보니 대기 속 산소 농도가 낮아 육상동물들은 애초 이중순환계를 지닌 신체로 진화했다. 원래의 순환계는 종전처럼 산소를 공급하되 새로 생긴 순환계가 노폐물(독) 처리를 맡아 세포의 신진대사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인 것이다. 미네르바에도 처음에는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공존했지만 후자가 멸종한다. 초식동물이 노폐물을 처리하는 체내순환계의 독성 수치를 매우 높이는 쪽으로 진화한 까닭이다. 잡아먹는 족족 자신도 죽게 되니 육식동물이 남아날 재간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중순환계는 초식동물 자신에게도 위험했다. 작은 상처만 나도 혈관의 독이 몸에 스며들어 죽었으니까. 그래서 초식동물만 사는 세계의 만물의 영장인 미네르바인(지적인 초식동물)들은 유전공학을 동원해 자신들은 물론이고 토착동물들을 다시 하나의 순환계로 돌려놓는다. 더 이상 육식동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고향 떠난 미네르바인들이 지구에 정착하지 못한 것도 약육강식의 맹수가 날뛰는 정글의 법칙에 오금이 저려서다. 이러한 논리 전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결과 우리가 만나게 되는 새로운 인간형(또는 사회형)이다. 초식동물이 만물의 영장이 된 사회는 훨씬 더 온화하고 화합과 공존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육식동물에서 진화한 우리에게 일종의 대안을 보여준다.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두 가지 흥미로운 가설을 통해 자멸로 치닫는 무모한 전쟁을 자제하고 초식동물의 평화주의를 벤치마킹해보라고 말한다. 아주 이성적인 논법으로 전개되는 하드SF적 평화주의 이데올로기라고나 할까.

<고장원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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