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혁명회 상임의장 정동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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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이은 2대 해직기자·천생 선비

4월 9일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4·9 통일열사 43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4·9 통일열사란 1975년 4월 조작된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희생된 8명을 가리키며, 이 날을 ‘사법사상 최악의 날’로 기록하고 있다. 이 행사 마지막 단상에 4·19합창단이 올라왔다. 1960년 4월혁명 주역으로 구성된 합창단이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사월혁명회 상임의장 정동익

정동익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은 “단원 평균연령이 80세가 넘는 최고령 합창단으로 기네스북 감”이라며 “첫 외부 공연”이라고 소개했다. 합창단은 <4월 혁명의 노래>와 <해방가>, 그리고 백남기 농민이 좋아했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불렀고, 마지막으로 <님을 위한 행진곡>은 관객들과 합창했다. 합창은 힘이 넘쳤고, ‘노병은 살아있다’를 보여준 공연이었다.

정동익 사월혁명회 상임의장(75)을 만났다. 그는 “노인들이 주책이라고 보지 않았을까,(하~하)”라며 “옆 사무실에 폐를 끼칠까 조용조용 연습했는데 탁 터진 공간에서 마음껏 부를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사월혁명회는 4월혁명에 참가했던 주역들이 4월혁명의 올바른 이념 정립과 구현을 목적으로 1988년 설립했다. 일절 정부나 기업 지원 없이 회비로만 운영돼 4·19정신을 가장 순수하게 계승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나 기업 지원 없이 회비로만 운영

“4월 19일 우리가 주관이 돼 민주·민족단체들이 4·19묘소 합동 참배를 한다. 그동안 4월 영령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었는데 올해는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4월혁명의 싹을 잘라버린 박정희 쿠데타 세력 후예들의 국정농단을 막은 것을 이번에 보고 드릴 수 있어 기쁘다.”

-이번 촛불혁명에서 사월혁명회는 한 번도 빠짐 없이 시위에 나섰다. 노인들은 태극기부대만 있는 줄 아는데 요즘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이다.

“우리 사월혁명회는 세월호 참사 항의시위,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 박근혜 퇴진 촛불 등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나이 든 우리 회원들이 앞장은 못 서지만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후배들에게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지난해 57주년 선언문에는 ‘촛불정신으로 자주·민주·통일의 국민 주권 시대를 힘차게 열자’고 했다. 이번 58주년 선언문에는 무엇을 강조할 것인가.

“4월혁명 정신은 반외세로부터 자주, 독재로부터 민주, 분단으로부터 통일이다. 이것을 지향하고 이루려는 전민족적 힘이 4월혁명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번 58주년 선언문에는 ‘4월혁명 정신으로 평화통일·민주번영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민주화 과제는 촛불혁명으로 어느 정도 이룩됐고, 앞으로 민족사적 과제는 통일 즉 분단 극복이다. 이번 촛불혁명의 요구가 적폐청산이다. 우리는 적폐 중에서도 적폐가 바로 분단적폐라고 생각한다.”

58주년 선언문에는 △적폐청산을 방해하는 수구 냉전세력의 횡포를 막아내자 △반통일 반인권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라 △대북 적대정책 폐기하고 평화협정 체결하라 △파렴치한 역사왜곡, 독도 침탈, 통일 방해 일본 만행을 박살내자 등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 1960년 4월 19일 서울대 문리대생의 4·19 제1 선언문인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는 지금 다시 읽어도 명문장이다. 그러나 이 선언문을 쓴 이수정은 나중에 박정희의 해외공보관과 전두환의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다.

정 상임의장은 “혁명 주역의 99.9%가 시류에 영합했고 독재에 부역했다”면서 “그래도 4·19정신을 지키고 민주화와 통일에 기여하려는 사람들이 이만큼 있는 것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일제 강점 하에서도 대부분 일제에 투항했지만 그래도 독립운동한 사람들이 있다”면서 “우리 4월혁명회원들은 일제 때라면 모두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약간 허탈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젊은 시절 불살랐던 4월혁명 정신을 외면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왜곡하는 것은 자기부정 아닌가. 4월혁명 주역인 유모씨처럼 극우논객으로 4·19정신에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도 있다.

“연민의 정을 느낀다. 꼭 저렇게 살아야 하는가. 떳떳하게 살다 가는 것도 인생이다. 우리 회원들은 변절해 호의호식한 친구들에게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산다. 그게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모양도 아름답다.”

-이번 촛불혁명은 최순실과 태블릿 PC만 기억한다. 그러나 현장에서 지켜본 기자의 판단에 따르면 촛불은 박근혜의 친일역사·민주화 역사 왜곡, 국정원 댓글과 통합진보당 해산 등 민주화 퇴행, 쉬운 해고와 비정규직 양산, 신자유주의 농업정책에 대한 노동자·농민의 저항, 세월호 유족의 진실 요구 등이 바탕이 됐다.

“그렇다. 촛불혁명은 역사왜곡에 항의한 세력과 통합진보당 해산 등 민주화 퇴행에 반대한 세력이 처음 시작했다. 통합진보당 해산을 시도할 때 나는 과거 80년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보다 더 강력한 운동기구를 제안했다. 그게 바로 원탁회의였다. 이번 촛불은 국민들 마음에 살아있던 4·19정신이 박근혜 정권의 퇴행적 모습을 보면서 분출한 것이다.”

-물론 58년 전이지만 4월혁명에 대한 연구나 논의가 뜸한 것 같다. 요즘 4월혁명과 관련해 학위논문을 쓰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할 정도다.

“아쉬운 대목이다. 프랑스혁명은 20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계속 연구하고, 새로운 책이 나온다. 우리는 너무 빨리 잊혀지고 있다. 우리 회원이 사라졌을 때 누가 4월혁명 정신을 계승할 것인지 걱정된다. 역사책에서 배우는 4월혁명보다 현실적으로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나마 민중들은 4월혁명에서 지금 촛불혁명까지 독재에 항거하고 결국 타도한 위대한 국민이라는 것이다.”

사월혁명회는 매년 4월혁명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을 선정, 사월혁명상을 시상하고 있다. 올해 수상자는 한상균 전 민주노총위원장과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이다. 사월혁명회는 두 사람 모두 이번 촛불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꼽고 있다.

4월 9일 인혁당 사건 추모제에서 4·19합창단이 첫 공연을 하고 있다. / 사월혁명회 제공

4월 9일 인혁당 사건 추모제에서 4·19합창단이 첫 공연을 하고 있다. / 사월혁명회 제공

“99.9%가 시류에 영합했고 독재에 부역했다”

“한상균 전 위원장은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를 주도하는 촛불을 처음 들었다. 다른 사람보다 1년 먼저 촛불을 든 것이다. 이석기 전 의원도 내란음모는 무죄, 합법적인 정당 연설을 내란선동으로 몰아 9년이나 가둔 것은 정치적 탄압이다. 민주화·통일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통합진보당을 해산한 것도 말이 안된다. 당연히 두 사람은 양심수로 풀어줘야 한다.”

8대 종단 지도자들도 두 사람의 사면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눈에 아른거린다’는 표현을 하면서도 석방하지 않았다. 정 상임의장은 “YS와 DJ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양심수부터 석방했다, 적폐의 최대 피해자가 바로 양심수이기 때문”이라며 “문재인 정부가 다 잘하는데 그 대목만큼은 이해가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촛불의 마지막 연대기구인 퇴진행동 공동대표 때 “촛불이 꺼져서는 안된다”며 해체를 반대했다. 그 이유는 “4·19혁명도, 6월항쟁도, 이번 촛불도 혁명의 주역들이 뒤로 물러나 결국 반동세력에게 넘겨준 뼈아픈 과거가 있다‘면서 “혁명 주도세력이 계속 주도권을 잡아야 적폐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정 상임의장이 촛불을 계속 들어야 하는 보다 중요한 이유로 한반도 상황을 꼽고 있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소장이 미국에 자신의 사상적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민주·진보인사를 죽이고 탄압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측하기 어려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모른다”면서 “여차하면 전쟁위기로 치달을 수 있고, 이는 곧 민족의 공멸”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시민들이 ‘전쟁 말고 평화’라는 촛불을 들어 전세계에 평화를 수호하는 모습을 보여야 트럼프도 전쟁을 못한다”면서 “촛불시민들이 평화의 길을 열려는 문재인 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문재인 정부에 미국이나 주변 강대국 눈치를 보지 말고, 국민을 믿고 당당하게 나가라고 주문했다.

민주언론협 의장과 <말>지 발행인 역임

정 상임의장은 1943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전주에서 다녔다. 서울대 사회학과 61학번으로 65년 졸업해 67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후배 서울대생이 동아일보사 앞에서 신문 화형식을 하고, 인혁당 가족들이 신문사에 몰려와 “왜 한 줄도 보도하지 않느냐”고 눈물의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에 각성한 기자들이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 선언을 하자 광고 탄압에 들어갔고, 결국 75년 대량 해직사태를 야기했다. 그의 부친 정희남 선생은 <전북일보> 편집국장을 마치고 고문으로 있다가 1973년 해직됐고, 아들인 그는 1975년 해직됐다. 그러니까 정 상임의장은 ‘부자 언론인 해직’이라는 매우 드문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1985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만들어 초대 송건호 의장을 모셨고, 송 의장이 <한겨레신문> 사장으로 가자 2대 의장을 맡아 <말>지 발행인을 했다. 의장 시절 해직기자와 시민교육을 합한 언론학교가 현재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의 전신이다. 한편 생계를 위해 도서출판 ‘아침’을 운영하면서 처음 출판한 책이 <민중과 자유언론>이다. <김형욱 회고록>도 그가 출판했다.

정 상임의장은 1986년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기자가 1986년 6월 21일 한글회관에서 배포한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창립대회 보도자료’ 원본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와” 하는 소리를 지르며 “나도 보관하지 못한 이것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낡은 타자기로 친 이 보도자료에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민중세력에 이념적 지향을 둔다, 출판자유의 적극적 실천으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고 언론자유 쟁취에 나선다”고 돼 있다. 재미있는 것은 “국제저작권 조약은 현 단계에서 분명히 불평등 반문화 조약”이라며 ‘미국’의 아름다울 미(美)를 꼬리 미(尾)로 고쳐 ‘尾國’으로 표기할 것을 결의했다는 점이다.

그는 전두환 시절 이기형의 <지리산>을 출간해 국가보안법으로 1년 6개월, 국내 저작인 <노동당정책사>를 출판사 직원이 복사했는데 이를 사장에게 이적표현문 소지죄를 적용해 또 실형을 선고 받았다. 2007년 민주평화국민회의 대표로 “검찰은 BBK사건 제대로 수사하라”고 연설했다가 300만원 벌금을 받았다. 그는 “그때 내 주장대로 검찰이 BBK만 제대로 수사했어도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지 못했고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행동과 직언은 반민주·반통일 세력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직전 보수인사를 줄지어 영입하자 그는 “포용도 좋지만 민주화운동 정신을 살리라”고 면전에서 쓴소리를 했다. 이에 흥분한 DJ는 중국 국공합작 얘기를 20분간 하며 “그게 정치다”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박선숙 비서(현 바른미래당 의원)가 “DJ 앞에서 그런 소리 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 정 선배는 찍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재야운동 시절 정치인이 봉투를 가져와도 한 번도 ‘고맙다’고 인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그는 1975년 해직 이후 재야운동의 일선에 있지만 변변한 감투 하나 얻지 못했다. 기자가 ‘왜 좀 분위기를 맞추는 말도 하면서 사시지 그랬냐’고 묻자 그는 간단하게 “선비는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선비’라는 단어다. 요즘 선비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나 대상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선비라는 말 한마디로 그에 대한 인물탐구는 ‘끝’이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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