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아리랑> 음악가 한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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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아리랑> 한돌은 ‘문재인 판박이’였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통해 남북이 화해하는 요즘 국면에서 남북이 가장 공감한 노래를 꼽으라면 단연 <홀로아리랑>이다. 지난 2월 8일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에서 북한 삼지연관현악단과 인민공훈합창단 등으로 이뤄진 예술단은 <홀로아리랑> 을 불렀다. 그리고 2월 20일 아이스댄스 프리 종목에서 민유라·갬린의 배경음악이 <홀로아리랑>이었다. 민유라는 노래가사에 정치적 논란이 일었음에도 “가장 한국적 정서를 세계에 보여주겠다”고 고집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민유라와 미국인(한국으로 귀화) 갬린이 한복을 입고 한 경기였지만 ‘한국의 선을 댄스 연기로 잘 표현했다’는 평가로 역대 최고점수를 받았다. 무엇보다 전세계에 중계된 경기의 배경음악으로 아리랑이 처음 쓰여 감동의 무대를 만들었다는 점 때문이다.

[원희복의 인물탐구]<홀로아리랑> 음악가 한돌

저 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 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 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아리랑 아리랑 홀로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 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 설악산 맑은 물도 동해 가는데/ 우리들 마음은 어디로 가는가 언제쯤 우리는 하나가 될까/ 아리랑 아리랑 홀로아리랑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 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 타고 떠나라 한라산 제주에서 배 타고 간다/ 가다가 홀로 섬에 닻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해를 맞이해 보자/ 아리랑 아리랑 홀로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 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가수’라는 표현 대신, ‘타래마니’를 고집

이 <홀로아리랑>의 작사·작곡·그리고 노래까지 한 사람이 한돌(65·본명 이흥건)이다. 그는 ‘가수’라는 표현 대신 ‘타래마니’를 고집한다. ‘노래를 캐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순우리말이다. 예명인 한돌도 ‘작은 돌의 역할’이라는 의미다. 지난 4월 2일 일산에서 그를 만나자마자 기자가 “지금 평양 공연장에 있어야 할 사람이 이렇게 일산에 있어서 되겠느냐”고 묻자, 그는 (허~허~허) 웃으며 “나는 노래를 못해 그런 공연장에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민유라·갬린의 아이스 프리댄스 경기가 열리는 날 여수 금호도에서 점심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을 때 그 음악이 나오더라. 나는 동계올림픽이 우리 평창에서 열리는 줄도 몰랐다. 소향이 부른 <홀로아리랑>이 피겨음악으로 잘 안맞을 수 있는데, 의외로 잘 맞더라. (허~허~) 왜 그 피겨댄스 선수가 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썼는지 궁금하다.”

-북한에서 <홀로아리랑>이 매우 인기 있는 노래로 알려졌다.

“오래전 사할린에 갔더니 북한 근로자들이 <홀로아리랑>을 부르더라. 그래서 ‘그 노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민요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남한 노래인데 바로 내가 작사·작곡자다’라고 했더니,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더라. (하~하~) <홀로아리랑>은 2002년 김연자가 처음 평양에서 부르고, 2005년 조용필이 다시 불렀다.(평양 관객들이 앙코르송으로 조용필에게 <홀로아리랑>을 요청했다. 노래를 모르던 조용필은 급히 악보를 구해 다음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하게 북에서는 백두산, 한라산이 나오는 3절은 안 부른다.”

-<홀로아리랑>이 독도에 대한 서사시라기보다 통일을 갈구하는 노래 아닌가.

“통일에 대한 노래다.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어떻게 <홀로아리랑>을 만들게 됐나.

“1989년 4월 독도에 갔다가 태풍으로 서도에 일주일간 고립됐다. 식량도 떨어져 갈매기 알을 삶아 먹고 배탈이 나 손끝을 바늘로 따면서 겨우 버텼다. 설사가 났지만 태풍에 배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선장이 신문지에 볼일을 보고 둘둘 말아 창밖으로 던지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동작이 굼떠 신문지만 날아가고 내용물인 ‘×’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하~하~) 겨우 창밖에 얼굴을 내놓고 바람에 세수를 한 다음 촛불 켜놓고 벽에 붙은 한반도 지도를 가만히 보니까 한반도 혈자리가 독도라는 생각이 났다. 배탈이 났는데 손끝을 따니 편해진 이유가 뭔가. 그런 논리로 독도에 침을 놓으면 휴전선에 막힌 피가 뚫릴 것 같았다. 그게 모티브가 돼 노랫말이 만들어졌다. <홀로아리랑>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용왕님이 노랫말을 던져준 것 같다. 그 ‘×’도 용왕님이 던져준 것이다. (하~하~).”

독도에서 배탈이 나 ‘×’ 맞은 얼굴로 만든 노래가 <홀로아리랑>이었다는 것도 재미있다. 그는 자신을 포크가수라고 소개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스스로 ‘타래마니’라고 한다. 그는 “일본에는 엔카, 프랑스는 샹송, 이탈리아는 칸소네라는 나라마다 자부심 가진 가요의 고유명사가 있다”면서 “우리 음악의 70%가 가요인데 번듯한 이름 하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찾은 이름이 몸과 마음을 파고드는 노래라는 의미의 ‘타래’다. 여기에 산삼을 캐는 심마니에서 ‘마니’를 따 ‘타래마니’라고 붙였다.

독도에서 태풍으로 고립돼 만든 노래

그는 노래를 만들 때 작사를 먼저하고, 다음에 곡을 붙인다. 노래 1절을 만들고 2절이 떠오르지 않아 1년을 그냥 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음악생활 40년 동안 만든 노래가 채 100곡이 안된다. 같은 연조에 1500~2000곡을 만드는 것에 비하면 20분의 1 수준이다. 자신의 음반 이름도 ‘한돌타래 1집’ ‘한돌타래 2집’이다. 40년 음악생활 중 콘서트는 국내에서 딱 6번, 일본에서 6번한 것이 전부다. 그는 “내 콘서트는 관객들이 ‘저 사람은 노래를 못한다’는 것을 알고 오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타래마니’ 한돌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타래마니’ 한돌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사실 이번 평양 공연을 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노래도 중요하지만 이런 공연은 스토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함경도에서 ‘씨를 배고’ 경남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바로 문재인 대통령과 똑같이 53년 1월 거제도 출생이다. 그는 “출생코스가 나와 문 대통령이 똑같은 것을 보니 아마 우리 부모님과 문 대통령 부모님이 같은 배를 타고 월남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촛불혁명 때 가수 한영애가 광화문광장에서 부른 <홀로아리랑>과 <갈증> <조율> 등은 모두 그의 노래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대통령이 ‘한 배’를 탄 인연이라는 것도 기막힌 인연 아닐까. 게다가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 18번이 바로 <홀로아리랑>이다. 유튜브에서는 2011년 ‘Change 2012 유시민·이정희 토크쇼’에서 사회자 조국 당시 서울대 교수가 무반주로 <홀로아리랑>을 부르는 동영상이 13만3000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의 부모님은 북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남겨두고 월남했다. 그는 “평생 무뚝뚝했던 아버지는 유언으로 ‘통일 되면 고향 가서 형을 만나 부모가 너희들을 버리고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꼭 전하라고 했다”면서 “부모가 한꺼번에 사라졌으니 남아있던 세 자매가 ‘부모가 우리를 버렸다’고 오해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의 이 유언을 아직 따르지 못하고 대신 노래로 만들었다. 노래 <가고 싶다>(부제 ‘아버지의 마지막 심부름’)는 “가고 싶다/ 아버지의 고향으로/ 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그곳에 가고 싶다/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통일이 되면 고향 가서/ 너의 형을 만나라고/ 산내들을 만나라고/ 만나거든 버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고”로 이어진다.

이밖에 그는 <터> <가시담> <금강초롱> 등 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갈구하는 노래를 많이 만들었다. 그는 “이산가족 신청을 하러 대한적십자사 앞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면서 “나보다 나이 많은 노인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데 내가 신청하면 새치기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고향을 찾아 북으로 올라간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춘천에 정착했다. 초등학교 때 전국체전 강원도 스케이트 선수로 뛰다 넘어져 8등 한 기억을 되살린 것이 <꼴찌를 위하여>라는 노래다. 북에서 약국을 하시던 아버지는 남에서도 ‘보생약방’을 했다. 교육열이 남다르던 아버지는 자식 교육을 위해 경기 성남으로 이사했고, 그는 서울에서 경복중·고를 다녔다. 하지만 그는 중학교 때부터 공부보다 다방에 드나들며 노래를 배웠다.

-경복고를 다닐 정도면 공부를 잘한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잘했다. 그런데 고2 때 공부를 그만하고 노래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대학은 낭비고, 억지로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학 안 가면 친구들에게 왕따당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잘했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새벽열차> <갈래> <터>는 대학가에서 널리 불려진 노래다. 그런데 방송금지처분을 받았다.

“방송금지처분 받은 이유가 사상적 문제가 아니라 ‘가창력 부족 때문’이다. (하~하~) 진짜다. 당시 앨범에는 건전가요를 꼭 한 개씩 넣어야 하는데, 나는 <향토방위의 노래>를 넣기 싫어서 <터>가 건전가요라고 우겼다. 나는 그것 때문에 방송에 안 나오는가 생각해 물어봤더니 ‘가창력 부족’이라고 하더라. 가창력 부족으로 세 번 떨어졌다.”

-가창력 부족으로 세 번이나 떨어졌으면 음악을 접고 대학에 가야 하지 않았나.(하~하~)

“음악을 접은 것이 아니라, 그래서 가수를 접은 것이다.”(하~하)

부모님 몰래 음악 만들기 위해 예명 사용

그의 본업은 노래를 만드는 일이다. 제일 처음 만든 노래가 72년 만든 <못생긴 얼굴>이고, 가장 최근에 만든 노래가 고려인 노래인 <까레이스키 살랏>이다. 김광석의 <외사랑>은 성남 중앙시장 뒤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의 사연을 담은 노래이고, 설악산 대청봉을 보며 만든 <터>는 가수 신형원이 불러 66만장의 레코드 판매를 기록하기도 했다. <개똥벌레> 역시 인기를 끈 노래다.

이 노래들은 80년대 초·중반까지 성남 아버지 약국에서 종업원으로 월급 25만원 받으며 틈틈이 만든 노래다. 그는 노래를 만들어 중간 제작사에게 넘겨주고 변변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누가 부를지도 모르고 <여울목> <완행열차> 등의 악보를 줬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김광석·한영애·노찾사 등이었다”면서 “<개똥벌레>로 최소한 1억원은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불과 100만원밖에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에는 노래 만들어 돈을 벌겠다는 개념도 없었고 계약서도 안 썼다”면서 “그런 얘기는 하지 말자”고 말문을 닫았다. <홀로아리랑>을 부른 서유석과 관계도 비슷했다.

그는 스스로 약간의 ‘자폐기질’이 있다고 고백했다. 한 가지에 몰두하는 예술가들이 흔히 가지는 특징인지도 모른다. 부모님 몰래 음악을 만들기 위해 한돌이라는 예명도 그때 만들었다. 그는 “부모님은 살아있을 때 모자란 아들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해 동네 어른들과 짜고 결혼시켰다”면서 “결혼식 때까지 아내 얼굴을 보지 못한 ‘토종혼례’를 했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아니 구한말도 시골 무식쟁이도 아니면서 서로 얼굴도 안 보이고 결혼시킨단 말인가. 그래도 그는 아내와 잘 산다. 그는 “되돌아보면 남편은 경제적으로 무능하지, 시부모를 다 모셔야지, 보통여자였으면 나는 벌써 이혼당했을 것”이라며 “내가 처복이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요즘 저작권협회에서 챙겨주는 저작료로 생활한다. 그는 “넉넉하지 않지만 밥 먹고 살 정도로 고마운 돈”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까지 휴대전화조차 가지지 않을 정도로 ‘홀로 삶’을 고집했다. 인터뷰도 한사코 안 한다고 거절하다 겨우 응했을 정도다. 노래는 계속 만들고 있고, 발표하지 않은 것도 많다. 그는 “지금까지 노래에 대해 지은 죄를 반성하는 책을 내려고 원고를 썼다”면서 “기회가 된다면 DMZ를 걸으며 공연도 하고 얘기도 하는, 분단을 총정리하는 이벤트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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