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민회 집행위원장 이요상-촛불대모, 3·1혁명완수 선봉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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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는 1992년 온라인서비스 유료화 반대시위 때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촛불시위는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두 여중생을 추도하는 행사에 다시 나타났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시위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시위에서 절정을 이뤘다. 2008년 5월 12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광우병 촛불시위에 참석한 이후 지난 민중총궐기와 탄핵행동 촛불시위까지 ‘거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이 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3·1민회 집행위원장 이요상-촛불대모, 3·1혁명완수 선봉에 서다

이요상 3·1민회 집행위원장(67)이다. 그는 2008년 촛불시위에 참석하기 위해 경기도 양주에 있는 집을 마다하고 광화문에 오피스텔을 얻어 생활했고, 이번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에 ‘개근’하기 위해 종로2가에 있는 사업장(문화공간 온)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박근혜 탄핵 촛불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한 이유로 “민주정부 탈환을 위해 촛불과 함께했다”고 말했다. ‘탈환’이라는 표현에 기자는 섬뜩 놀랐다. 그는 운동권 학생도 민주화 투사 출신도 아닌 평범한 주부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탄핵 촛불에 한번도 빠지지 않아

이 집행위원장은 오는 3월 1일 촛불을 들었던 심경으로 다시 광화문에 선다. 그는 ‘3·1민회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내년 ‘3·1혁명 100년 대회’의 대장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이 3·1혁명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한민국에 쌓인 산적한 문제를 생각하면 정권교체라는 촛불혁명의 작은 성과에 자족할 수 없었다.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한 특단의 대장정이 필요하다. 그것이 3·1혁명이고, 이것이 바로 시대의 요구이자 촛불 시민혁명의 과제라고 판단했다.”

이는 1월 8일 동학실천시민행동과 국민참여개헌시민운동, 언론소비자주권행동, 평화어머니회, 정의연대 등 70여개 단체가 ‘2019, 다시 3·1혁명’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위원장은 황선진(밝은마을 대표), 문국주(주권자전국회의 대표), 안승문(동학실천시민행동 공동대표)이 맡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작은 풀뿌리 단체들이 행사를 제안하고 주도하려 했다”면서 “그러나 촛불혁명 이후 처음 맞는 광화문 촛불이라는 의미와 함께 시민들의 자각이 충만한 상태라 점점 규모가 커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풀뿌리 단체가 제안하고 주도하는 본래 의미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3·1민회에는 그동안 많이 알려진 시민사회·민중단체의 명망가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일단 3·1혁명 개념 정리부터 하자. 이 집행위원장은 “100년 전 왕의 나라였던 제국에서 민국 즉 시민의 나라로 대전환한 것은 혁명이었다”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혁명은 동학민중혁명으로, 이후 3·1혁명, 독립투쟁, 4·19혁명, 5·18항쟁, 6월항쟁으로 이어져 왔다”고 말했다. 사실 1948년 유진오 박사가 기초한 제헌헌법 초안에는 ‘3·1혁명’으로 돼 있다. 그것을 초대 국회의장이자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혁명을 ‘운동’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건국절을 통해 이승만을 ‘국부’로 만들려다 촛불혁명으로 저지되고 정권 자체가 몰락했다.

-민회의 의미는 무엇인가.

“민회는 1893년 3월 11일 충북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동학집회(동학보은취회)가 원조격이다. 일본이 개입해 미완으로 끝났지만 동학은 최초의 민중농민혁명이었다. 3·1혁명이 일어나기 전 마을마다 민회가 일어났다. 민회는 정부나 권력에 대응하는 주권자 시민들이 주도하는 대중적 집회다. 지난 촛불집회도 거대한 규모의 민회라 할 수 있다.”

-왜 민회를 하는가.

“대의정치로 국민의 민의가 왜곡되는 일이 없기 위함이다. 시민의 힘으로 생활 속 자치를 만들고 가꾸는 것이 필요하다. 직접민주주의가 꽃 피는 참다운 민주공화국, 자치공화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올바른 역사의식과 민주주의로 깨어있는 시민이 많아야 한다. 3월 1일 광화문에서 시작되는 민회는 앞으로 전국으로 확산시킬 것이다.”

3월 1일 행사 웹포스터

3월 1일 행사 웹포스터

-행사 내용을 보면 신(新)독립선언서도 채택한다고 돼 있다.

“새로운 100년을 여는 데 있어 진정한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회제도 개혁과 식량주권에 대한 독립, 외국자본 특히 진정한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미 각 분야·주체마다 신독립선언서를 제안 받고 있다. 그날 광화문광장에서 채택된 몇 건을 발표할 예정이다. 3·1평화주권선언도 발표한다.”

1000개 북을 앞세운 시민만세단 행진

집행위는 이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33인에 맞춰 조직위원 3만3000명을 모집하고 있다. 전국 278개 시·군·구에서 최소한 100명씩 모아 지역민회를 만들 예정으로 이미 수백 명이 들어와 있다. 이번 행사는 풀뿌리 시민의 자발적 행사이기 때문에 경비도 자체 조달한다. 1만명이 1만원씩 모아 1억원을 경비로 사용할 예정이다.(계좌번호 우리은행 1005-603-402068 3·1민회 조직위원회)

행사는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1000개 북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1000개 북을 앞세운 시민만세단이 일본대사관~미대사관을 거쳐 광화문광장으로 행진한다. 광화문광장에서 ‘통일비빔밥’을 나눠 먹고, 오후 2시부터 본격 3·1혁명 100주년 기념식을 연다. 여기서 핵심은 평화주권선언과 신독립선언을 발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핵심 개혁과제를 제안하는 만민공동회도 연다. 2일에는 3·1민회 평화영화상영회, 3일에는 국민개헌 1000인 원탁회의와 전쟁 없는 한반도 만들기 화백회의, 시민문화제 등이 열린다. 그는 “제주 4·3 70주년 행사에 사람들의 관심이 많다”고 전했다.

-이 집행위원장은 시민사회단체에서 ‘요요천사’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매일 시민사회단체의 행사·집회를 ‘시민사회일정’이라는 제목으로 카카오톡으로 전달하고 있다. 기자들에게 이 카톡은 어디에서 어떤 집회가 열리는지 알 수 있는 유용한 정보다.

“요요천사(yoyo1004)는 광우병 시위 때 인터넷 닉네임이었다. 시민단체 집회 소식을 전하는 것은 2012년부터 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실망한 ‘촛불’이 모두 흩어졌다. 단체가 기자회견할 때 대략 10명이 모여야 플래카드라도 펼칠텐데 그럴 사람조차 없었다. 그래서 단체 행사를 카톡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최소한 활동가라도 행사 개최 사실을 알고 있어야 달려가 플래카드라도 거들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처음 200명 정도로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500명이 넘는다.”

-오늘까지 ‘전국시민활동가방’ 가입자는 526명이다. 그 전에 언론소비자주권연대(언소주) 사무총장을 했다.

“오래전부터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생각을 했다. 언소주는 광우병 사태 때 보수언론의 행태에 분노해 2011년 만들었다. 언소주는 광우병 촛불 이후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NGO단체다. 한창 때는 전국에서 7만명 회원을 가졌고 지금도 4만~5만명은 된다. 지금도 계좌이체로 매달 400만~500만원 회비가 들어온다. 그때 언소주 사무총장을 하면서 각 시민단체와 연대했던 자산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이요상 집행위원장이 2017년 아들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김에 워싱톤 백악관 앞에서 반전·평화시위를 벌이고 있다. / 이요상 제공

이요상 집행위원장이 2017년 아들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김에 워싱톤 백악관 앞에서 반전·평화시위를 벌이고 있다. / 이요상 제공

-2016년 성공회 등이 주최한 제1회 한경희 통일평화상을 받았다.

“2012년 카톡이 유행되기 시작할 때였다. 박근혜 정권의 등장에 대한 패배감으로 광장을 떠난 촛불을 카톡으로 연결한 것이다. 그렇게나마 연결됐던 촛불이 박근혜 탄핵국면에 다시 광장으로 나올 수 있게 하는 데 작은 힘이 됐을 것이다. 상을 받은 주요 이유가 그것이었다.”

-사이버상 연대뿐만 아니라 도심 한복판에서 ‘문화공간 온’을 통해 촛불시민과 연대활동을 했다.

“2016년 4월 20대 총선에서 ‘박근혜당’이 무려 200석을 얻는다고 떠들었다. 야당은 패배감에 젖어 있었다. 촛불만 들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도심에 시민 거점을 만들겠다고 생각해 2016년 5월 이곳(종로2가)을 만들었다. 나는 상임이사인데 운영도 잘된다. 이곳은 촛불들의 화장실·찻집이고, 촛불집회가 끝나면 막걸리 마시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를 탄핵했을 때 밤 12시까지 무료 축하파티를 열었다.”

시대의 촛불이 만든 ‘촛불소녀’

이 집행위원장이 촛불을 들고 언론소비자운동을 하며 삼성 불매운동을 할 때 정작 그의 아들은 ‘삼성장학생’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아들이 삼성장학금을 받으며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다녔다”면서 “아들은 어머니 투쟁에 누가될까봐 받은 장학금(매월 200만원)을 한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모아두었다”고 말했다. 학위를 마친 아들은 삼성연구소에서 근무했지만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결국 아들은 억대 연봉을 포기하고 연봉이 훨씬 적은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연구원으로 갔다고 한다. 거대한 정치·경제적 흐름 이면에는 이런 기막힌 사연이 있는 것이 또한 세상사다.

이 집행위원장은 1951년 충남 온양 출신이다. 부친은 시골에서 읍의원(당시 지방자치는 읍·면·동까지 선거했다)을 할 정도로 깨어 있었지만 딸을 대학에 보낼 경제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한 오빠와 같이 서울에 올라와 서울여상에 진학했다. 입학시험을 보던 당시 서울여상은 경기·이화여고 수준의 명문고 반열에 있었다. 기자가 ‘공부를 잘했는가보다’라고 하자, 그는 “어렸을 때 꿈이 기자였고, 인문계 여고에 진학한 친구 중에는 기자했던 친구도 많다”고 말했다.

서울여상을 졸업하고 회사 경리과에 취직했던 그는 야무지게 일해 대졸자가 근무하는 사장 비서실에 발령 받았다. 그는 비서실에서 매일 신문 스크랩을 하면서 세상을 배웠다고 말했다. 사장의 배려로 1971년 야간대학(한양대 섬유공학과)에 진학했으나 대학 3학년 때 결혼하는 바람에 졸업하지 못했다. 평범한 주부였던 그는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때 8만원 남편 월급 중 3만원을 떼어 광고를 하기도 했다. 그는 “1987년 박종철·이한열이 죽었을 때 검은 리본을 매고 다녔다”고 말했다.

언소주 사무총장을 시작으로 2014년에는 동학실천시민행동 공동대표, 2016년에는 제주 ‘강정국제평화영화제’를 제안해 시민대표로 일주일 만에 1억원을 모금하는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이 100개가 넘는 단체가 연대해 치르는 이번 ‘3·1혁명 100년, 3·1민회’로 이어진 것이다.

평범한 주부였던 그가 촛불을 통해 ‘민주주의 탈환’이라는 격렬한 단어를 외치게 된 것은 박근혜의 민주주의 퇴행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면에서 그는 시대의 촛불이 만든 ‘촛불소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그는 “소녀는 아니고, 촛불시민의 대모(大母) 정도”라면서 웃었다. 그는 내년 이 3·1혁명 100년 행사가 모두 끝나면 파주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해마루촌 ‘평화사과농장’에서 사과농사를 하면서 통일운동에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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