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평화운동가 고은광순 “반대하는 삶이 아니라, 지향하는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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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바뀌긴 바뀐 모양이다. 그가 정부가 주는 ‘감투’를 썼으니 말이다. 그 감투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여성분과 상임위원이다. 민주평통은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 자문기구이긴 하지만 번듯한 자리나 보수도 없는 명예직이다. 그래도 정부가 주는 감투를 그는 ‘자랑스럽게’ 명함에 새기고 다닌다. 그는 여성운동가 고은광순 평화어머니회 대표(63)다.

사실 기자가 그를 여성운동가라고 표시했지만, 고은 대표는 정확하게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20~30대에는 민주화운동을 했고, 40~50대에는 여성운동, 그리고 지금은 평화·통일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학실천시민행동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충북 옥천에 개업한 솔빛한의원 원장이지만 전화도 잘 안 받는 것을 보면 ‘영업’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워낙 여성운동 분야에서 한 일이 많아 일단 여성운동가로 표시했다.

그는 2010년 시골(충북 옥천)로 내려가 조용히 살았다. 단 1분도 속세의 TV뉴스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를 보고 다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평화어머니회를 만들어 박근혜 ‘엄마부대’와 맞서기도 했다. 그는 요즘 평창올림픽을 남북 평화의 계기로 만들기 위해 북한 참가를 호소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여성·평화운동가 고은광순 “반대하는 삶이 아니라, 지향하는 삶을 살았다”

뭐라 딱 규정할 수 없는 한의원 원장

“지금 얼어붙은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사안이 평창동계올림픽이다. 남북을 가로 막는 이 두꺼운 얼음을 깨야 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너무 미국에 휘둘리고 있는 느낌이다. 아마 이명박근혜가 망쳐놓은 딱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간이 밀고 끌고 가겠다.”

-평화어머니회는 어떤 단체인가.

“2015년 6월 25일부터 시작했다. 그 전까지 어머니들은 6·25만 되면 ‘상기하자 6·25’라며 보리주먹밥을 만들었다. 나는 전쟁을 기억하기보다 평화 만들기가 중요하다고 본다. 화목하게 살자는 의미에서 매주 화·목요일 미국대사관 앞에서 피케팅 시위를 한다. 북·미 간 평화협정을 체결하라는 것이다. 이게 한반도 평화의 핵심으로 240회를 넘겼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은 평화담론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평화어머니회는 무슨 일을 하나.

“우리와 민주평통여성분과위, 여성평화걷기조직위원회 등이 1월 15일부터 19일까지 ‘오라 평화여! 2018 평화평창여성평화걷기대회’를 한다. 여성들이 생명·평화·상생의 기치를 내걸고 평창에서 강릉~속초~고성 비무장지대(DMZ)까지 걷는다.”(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지만 회원들이 사무실에 모여 이날 행사에 입을 분홍색 조끼에 구호를 쓰는 작업을 했다)

-지금 한반도 분위기로 보면 북한이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아~하.(그는 긴 한숨을 내쉰다) 우리는 바늘구멍이라도 내야 한다. 얼음을 깨는 것은 바늘이다.”

대통령의 평화통일정책에 자문하는 임무인 민주평통은 권위 있는 헌법기구이지만, 그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명박근혜 기간 내내 평화통일 정책이 뒷걸음질쳤고, 사실상 무력·흡수통일을 주장해도 민주평통은 끽소리도 못했다. 그는 2017년 9월 여성단체를 통해 민주평통 참여 요청이 와 수락했다고 한다. 기자가 ‘어용단체 대명사로 통하던 민주평통에 고은 대표가 참여한 것은 의외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그는 “민주평통은 관제단체가 맞다, 그러나 평화통일을 위해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맡았다”면서 “내부를 보니 4분의 3은 과거 정부에서 인선한 사람들로 지금 활발히 뒤집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평화어머니회 얘기로 돌아갔다. 지난 촛불시위 국면에서 엄마부대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박근혜를 ‘찬양’했다. 이에 맞서 평화어머니회는 성조기를 거꾸로 들고 ‘반미’를 외쳤다. 두 어머니들이 맞붙기도 했다. 고은 대표는 “미 대통령 트럼프가 왔을 때 우리가 국회에서 핑크빛 천을 들고 평화를 외치는데, 저쪽에 조원진(의원)과 엄마부대 무리들이 와서 우리 핑크빛 천을 찢었다”면서 “한바탕 접전을 벌였는데(하~하~), 그들은 대단히 폭력적이고 상스럽다”고 말했다.

이들이 미대사관 앞에서 평화시위를 벌이는 이유는 한반도 평화에서 미국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첨단무기가 한반도 평화를 지킨다고 70년간 말했지만 결국 허탕이지 않았나”라고 반문하며 “미국 군산복합체와 무기 로비스트 때문에 한반도 평화가 위협 받는다”고 주장했다. 평화어머니회를 상징하는 모습은 어머니가 남북한 아기를 양쪽에 안고 젖을 먹이는 모습이다. 2015년 8월 평화어머니회가 미국 백악관 앞에서 한 달간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고 김봉준 화백이 ‘내 그림을 이미지로 쓰라’고 해 받았다.

엄마부대와 맞서 싸운 평화어머니회

“‘남북 군인 모두 어머니 자식’은 대단히 훌륭한 그림이다. 악한 인간만 태어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전쟁이라는 것은 정치·외교가 실패하고 최후로 찌질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죽어야 하는 군인은 모두 어머니가 낳아 소중히 키운 자식들이다. 우리의 오빠고, 동생이고, 남편이다. 누구의 총알받이로 내놓을 존재가 아니다.”

-평화어머니가 주장하는 북·미 평화협정은 종국적으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적화통일로 가기 위한 시나리오라고 보수·우익단체들이 주장한다.

“그것은 수십 년간 도식화된 얘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공식·실무적으로 남북대화가 활발했던 시기가 언제였나?”

-1990년대 노태우 정권 시기였을 것이다.

“맞다. 1992년 노태우 정권 말기였다. 그 해에만 88회 고위급회담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렸다. 북한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한반도 한·미 군사훈련이다. 한반도 한·미 군사훈련은 1969년 미군의 월남참전에 대한 대가로 ‘포커스 레티나’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50년간 계속되고 있다. 1992년 그때 팀스피리트가 중단됐다.”

-노태우 정권인 1991년 9월 남북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서로의 체제를 인정한 것이다. 그 시절에는 군사훈련 중단뿐 아니라 남북 군축회담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해 92년 9월 이동복 안기부장 특보가 평양에서 남북회담 훈령을 조작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노태우 대통령은 북한이 요구하는 비전향장기수 이인모씨를 송환하는 조건으로 판문점에 이산가족 면회소를 만드는 협상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동복은 납북어부 송환을 요구해 남북회담을 결렬시켰다. 그리고 10월 이동복은 직접 남조선노동당 간첩사건을 발표했다. 이후 팀스피리트 훈련이 재개됐다. 그 이동복이 얼마 전 우리가 평화운동을 하니 빨갱이라고 하더라.”

(이동복 안기부장 특보 대통령 훈령 조작사건은 당시 매우 심각한 이슈였다. 정부는 대충 무마하고 넘어갔지만 이 사건은 그 해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남북 긴장완화를 주장하는 김대중 후보와 차별화하기 위해 안기부를 중심으로 보수세력의 조직적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이는 2012년 국정원과 국군기무사가 문재인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댓글공작을 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은 이인모씨를 북에 송환하고, 이동복 특보를 해임했다)

고은 대표는 “대통령이 없는 상태에서 김관진이 미국 가서 사드 반입에 사인하지 않았나”라고 반문하며 “남북문제에서 대통령보다 더 큰 파워를 가진 국정원·국방부를 중심으로 한 극우보수세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 보수세력 배후에 바로 미국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친일·분단·반공·종북몰이를 통해 탄탄하게 부와 권력을 장악한 세력이 굳기름처럼 떠 있다, 이를 걷어내는 것이 적폐청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1955년 서울 토박이로 이화여중·이화여고·이화여대(사회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인 1975년 후배들에게 유인물을 몇 장 돌리다 긴급조치로 구속·제적됐다. 다행히 선고유예를 받고 복학했지만 77년 다시 후배들에게 ‘시위를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가 또 구속·제적됐다. 그는 항소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으로 꼬박 1년 정도 감방에 있었다. 1980년 서울의 봄에 다시 복학했으나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며 또다시 제적되는 기록을 세웠다.

고은광순 평화어머니회 대표와 여성평화걷기조직위원회 회원들이 ‘2018 평창여성평화걷기대회’에 쓸 조끼를 제작하고 있다.

고은광순 평화어머니회 대표와 여성평화걷기조직위원회 회원들이 ‘2018 평창여성평화걷기대회’에 쓸 조끼를 제작하고 있다.

시골에 집 짓고 명상 공동체 마을 조성

그는 1984년 대전대 한의학과에 입학했다. 10년 만에 다시 한 입시공부에도 한의대에 합격한 것을 보면 머리는 좋았던 것 같다. 그는 ‘운동권’과 인연을 끊고 조용히 공부만 했다. 대학 2학년 때 결혼까지 했다. 한의사 자격을 따고 1992년 개업했다. 그러나 평범하게 살자고 마음 먹은 그를 세상이 가만두지 않았다.

“한의사가 되어보니 아들 낳는 처방을 해달라는 요구가 너무 많았다. 설문조사를 해보니 무려 20번 낙태한 여성이 있고, 아들을 못 낳아 신경과민에 걸린 여성이 숱하더라. 대략 추산하니 80년대 중반 초음파장비가 들어온 이래 2000년까지 태아를 감별해 여야(女兒)들을 매년 평균 6만명씩 15년 동안 90만명이나 죽였다. 그 원인은 바로 호주제에 있더라.”

수백 년간 지속된 것으로 알던 남성 호주제는 사실 1915년 일제강점기 조선 호적령에 의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여성 호주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 학술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특히 남자들)은 ‘호주제 폐지가 가능하겠나’라고 했지만 헌법재판소는 2005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결국 호주제가 폐지됐다. 헌재 홍보관에서는 이 결정이 30년 헌재 역사상 매우 의미 있는 판결이었다고 꼽고 있다. 이는 우리 여성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받고 있다. 아마 ‘찌질한’ 남성들이 의도적으로 외면한 탓이리라.

숨어 있던 ‘운동가’의 기질이 다시 발현되기 시작됐다. 고은 대표는 1999년부터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을 시작했다. 본인부터 이름을 부모 모두의 성씨인 4자 이름으로 개명했다. 한 걸음 더 나가 ‘내 제사 거부 운동’까지 폈다. 그는 “제사·명절문화는 완전히 여성을 도구로 만드는 것”이라며 “호주제 폐지는 법·제도를 바꾸는 것이고, 내 제사 거부는 문화를 바꾸는 운동이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2010년에는 종교인 과세운동에까지 나섰다.

그러다 2010년 가을 갑자기 모든 사회활동을 접고 옥천으로 내려갔다. 그는 “20대부터 늘상 이러고(그는 손을 치켜들며 구호를 외치는 시늉을 해보였다) 살다 한 명상 스승으로부터 들은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너 자신을 바꿔라’는 조언이 가슴에 박혔다”고 말했다. 2012년 아예 시골에 집을 짓고 명상 공동체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가 자리잡은 충북 옥천군 청산면이 바로 해월 최시영 선생의 동학 본부가 있었던 곳이다. 그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10여명과 함께 동학 다큐소설 <해월의 딸 용담할매> 13권을 썼다. 그는 “동학혁명 때 신식 소총을 가진 일본군이 조선의 ‘형형한 눈빛을 가진 젊은이’를 학살했다”면서 “이 역시 무기산업의 폐해”라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다시 세상을 봤다고 한다. 그는 “박근혜가 테러방지법을 만들고, 박정희를 미화하는 국사교과서를 만드는 등 굉장히 위험한 일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서둘러 ‘속세’로 내려와 평화어머니회를 만들어 평화·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옥천에서 혼자 살고 아들과 남편은 서울에 있다. 그는 “남편은 옥천에 있으면 ‘언제 오냐고 묻고, 서울에 오면 언제 가냐’고 묻는다. (하~하~) 아주 잘 산다”고 말했다.

-호주제 폐지, 내 제사 폐지, 아버지 성씨 폐지, 반미운동 등 평생 그렇게 앤티(반대)하게 사는 이유가 뭔가.

“나는 평생 앤티(반대)하며 산 것이 아니라 평생 프로(지향)하는 삶을 살았다.(하~하~) 평등을 지향하고, 자유를 지향하고, 평화를 지향하며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피곤하지 않나. 팔자일까?

“운명이다. 속박·무지 속에 사는 것보다 자유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게 좋지 않나?”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우철훈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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