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노래>-함께 손잡고 들었던 희망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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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심장 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5년 전,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다음날 아침 해는 떴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밤을 꼬박 샜지만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출근을 했다. 한참이 지나도 사무실에 아무도 출근하지 않기에, 하루 쉬자는 문자를 후배들에게 보냈다.

아, 이제 어찌 살아야 할까, 앞으로의 대한민국은…. 이런 걱정도 있었지만, 어떤 생각도, 그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은 멍한 상태와 극도의 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 인권단체 소장으로부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걱정과 위로 전화를 받았고, 그 친구도 나처럼 혼자 사무실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어서 일단 만나기로 했다. 둘은 전날 개봉한 <레미제라블> 영화를 보면서 각자 과거, 현재, 미래의 늪으로 빠졌다.

1991년 대학 입학과 함께 만났던 최루탄과 지랄탄, 그리고 백골단. 눈물범벅, 콧물범벅에 눈밑 코밑에 치약을 처벅 처벅 바른 채 철없이 웃던 그때는 몰랐다.

아스팔트 학번이 될 줄이야. 4월 26일 같은 또래인 명지대 1학년 강경대가 경찰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전남대 박승희 열사가 분신을 했고, 이어서 김영균·천세용, 그리고 경찰의 토끼몰이에 성균관대 김귀정 열사까지.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젊은 청춘들이 하나둘 불꽃처럼 사라져 갔다. 분노는 커졌고, 지금 그 마음 절대 잊지 말자며 우리는 거리에서 수많은 노래를 가슴에 새겼고, 주먹을 쥐었었다. 문학 동아리였지만 4년 내내 마라톤 동호회처럼 전국 곳곳 아스팔트에서 뛰었다. 졸업 후 지역신문사를 거쳐 여의도 방송 공장에서 일할 때도 노동법 파업, 방송법 파업으로 거리에 있는 날이 많았다.

나이가 들고, 가족이 생기고, 스무 살 시절 가슴에 새긴 노래들은 입 밖으로 소환할 일이 없었지만, 시민이자 활동가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구나 싶었었다. 그런데 시민군 한 명 한 명 깃발을 흔들며 <민중의 노래(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장내로 울려 퍼지자, 20여년 이상 감춰뒀던 아픔과 슬픔, 분노가 눈물·콧물로 쏟아져 나왔다. 당황스러울 만큼 주책없이 몸 안의 모든 수분들이 밖으로 외출을 했다. 감정 제어기능 상실. 왜 그랬을까. 부끄러움이었을까, 암담함이었을까?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세상이 바뀌는 걸까?

박영선 전 언론개혁시민연대 국장

박영선 전 언론개혁시민연대 국장

2012년 12월 20일 참담함으로 들었던 <민중의 노래>를 2016년 11월 박근혜 탄핵 촉구 광화문 촛불에서 다시 만났다. 그런데 껌껌한 극장에서 펑펑 울며 듣던 그 노래가 아니었다. 백만 촛불 속에서 교복 입은 딸과 아이들과 함께 손잡고 들었던 민중의 노래는 가사처럼 심장 박동을 요동치게 하는 희망의 노래였다.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를’을 새기면서 나라다운 나라, 내일의 희망을 위해.

<박영선 전 언론개혁시민연대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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