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록위마」 감독 경순 “이석기 사건도 김기춘의 ‘공안기획’ 가능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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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몇 번 뵌 고 리영희 교수의 신조이자 트레이드 마크는 ‘진실’이다. 그가 후배에게 강조한 “진실에 대한 충성심, 이를 표현하기 위한 용기가 바로 기자정신이다”라는 말은 변할 수 없는 가르침이다. 리영희재단 홈페이지 머리글에는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이라고 돼 있다.

리영희재단은 매년 ‘리영희 우수 다큐멘터리’ 지원사업을 한다. 올해는 경순 감독의 <지록위마>(‘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의 4자성어)가 선정됐다. 심사위원은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안정숙 관장, 김동원 푸른영상 대표, <뉴스타파> 김용진 대표였다. <지록위마>는 세 심사위원의 만장일치로 선정됐다.(그러나 이 소식을 전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안 심사위원의 심사평은 다음과 같다.

“<지록위마>는 통합진보당(진보당) 해산과정의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을 다시 보는 작품이다. 언론에 보도된 이석기 의원의 강연 녹취록 하나로 한 정당의 해산을 이끌어 내기까지, 말 그대로 ‘지록위마’는 없었느냐는 감독의 질문과 회의에 심사위원 전원은 의미를 부여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영화 「지록위마」 감독 경순 “이석기 사건도 김기춘의 ‘공안기획’ 가능성 크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추적 내용

<지록위마>는 2013년 8월 28일 새벽 국가정보원의 압수수색으로 시작된 이른바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이 사건은 현직 국회의원이 혁명조직(RO)을 결성해 내란을 모의했다는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발표됐다. 이 사건은 진보당 해산과 함께 6명의 현직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더 중요한 것은 국정원 댓글사건으로 위기에 몰렸던 박근혜 정권이 이 사건으로 기사회생했고, 진보세력을 비롯한 야권은 깊은 ‘종북몰이’ 수렁에 빠졌다는 것이다.

리영희재단이 지원금을 주며 4년 전 사건의 ‘진실’을 재규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이 영화는 제작위원회(위원장 함세웅 신부)까지 만들어졌다.(후원계좌-국민은행 543001-01-448701 지록위마 제작위원회) 이 사건에 대해 함 신부는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그들에게 돌을 던진 가해자라고 고백하고 진심으로 뉘우쳐야 할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는 어떤 진실이 숨어 있는가. 경순 감독을 통해 그 진실의 문을 노크해 보자.

“원래 작년 여름을 중국 만주에서 지내면서 역사가 단절된 항일무장투쟁 영화를 구상하고 있었다. 연해주에서 김알렉산드리아(최초의 여성 한인 공산주의자)를 찾고 싶었다. 그러던 중 문영심 작가의 책 <이카로스의 감옥>을 봤다. 나도 주사파를 싫어하고, 진보당 경선비리도 잘 몰랐는데 책을 보고 ‘이건 아니다’라고 직감했다. 문 작가의 북콘서트를 쫓아다니며 한 발 더 들어갔다.”

그는 이 사건에 꽂혀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항상 그랬지만 자금이 문제였다. 그는 “좋은 소식 소개하는데,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이 영화가 제작 지원대상에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활짝 웃었다. 정부가 이석기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영화 제작에 8000만원의 거액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기자는 ‘달라진 세상’을 실감했다. 영화계 블랙리스트가 횡행하던 시절이 바로 엇그제였기 때문이다.

-<지록위마>는 지난 7월부터 제작에 들어갔다. 전체적으로 어떤 구도로 작품을 찍고 있는가.

“단순히 ‘진보당이 옳았는데 진실이 왜곡돼 잘못 알려진 거야’라고 말하기보다 ‘왜 우리가 서로를 다른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것을 보여줄 생각이다. 그래서 1대 1 인터뷰가 아닌 피해자 가족과 당원, 변호인단, 그리고 언론인과 활동가를 상대로 그룹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가장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는 장면은 무엇인가.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의 경우 강연 녹취록 하나로 여론재판이 열려 일주일 만에 사실상 유죄로 확정시켜버렸다는 점이다. 정작 사람들은 이석기 의원의 강연이 뭐였는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130여명이 모인 바로 그 마리스타 수녀원 강연을 재연할 것이다. 그것이 결전의 성지였는지, 조작의 시작이었는지를 밝히자는 것이다. 당시 강연에 참석했던 사람을 섭외해 그대로 재연하려 한다. 그러나 구속된 분도 있고, 심리적 충격으로 나서기를 꺼리는 분도 있어 일부 재연배우를 쓸 것이다. 이 장면에 카메라가 많이 동원될 것이다.”

‘달라진 세상’ 덕에 영진위가 지원금 

다큐멘터리, 특히 독립영화는 증언의 나열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감독은 그 증언이 진실인지 확인을 하지 않는다. 씨줄과 날줄로 그 증언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이 감독이나 작가와 기자의 차이다. 이런 지적에 경순 감독은 “맞다, 영화감독도 증언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그런 것을 넘어서기 위해 집단·교차 증언을 하려는 것”이라고 동의했다.<

그는 당시 언론 보도와 단행본, 증언 등을 통해 폭넓게 자료조사를 했다. 그 결과 그는 “당시 진보당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바로 국정원 댓글사건 진상요구였다”면서 “당원들은 27일 밤 늦게까지 촛불시위를 하다 집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가 28일 새벽 국정원의 압수수색을 당했다”고 말했다.

-국정원 압수수색 직전(8월 5일), 정국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청와대 비서실장이 김기춘으로 바뀐 것이다.

“중요하다. 이석기 사건도 김기춘의 ‘기획’일 가능성이 크다. 이 사건은 과거 김기춘이 벌인 공안기획사건과 너무 흡사하다.”

그는 “한 신문이 문제의 녹취록을 터뜨렸지만 다른 언론도 부화뇌동했다”면서 “기자들, 돌대가리 아닌가? 국정원이 댓글사건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이런 것을 발표하면 한 번쯤 의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면박을 줬다. 이런 경순 감독의 면박에 기자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기자만 종북몰이에 휩싸였을까. 당시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자칭 진보정당까지 종북몰이 광풍에 일부 동조했다.

그는 이 사건의 ‘시작’을 2012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비리로까지 소급하고 있다. 그는 “경선비리 문제는 김기춘이 이석기 내란음모 조작을 가능하게 했던 원초적 분위기”라고 말했다. 비례대표 경선비리 역시 언론의 왜곡보도로 진실이 감추어진 사건이다. 대검찰청에서 깐깐하게 수사해 결과를 발표했고, 검찰총장이 인사청문회에서도 증언까지 했지만 기성언론은 여전히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이후 진실을 기록한 여러 책이 출간됐다.)

경순 감독은 “혹시 최승호 감독이라면 당시 왜곡보도한 기자를 찾아 카메라를 들이대며 ‘그때 왜 이렇게 썼냐’라고 묻겠지, (하~하~)”라며 “당시 언론이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 처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경순 감독의 본명은 이경순이고, 1963년 서울생이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이와 출신대학, 그리고 성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유는 “학벌타파와 양성평등을 주장하기 때문”이라며 “보통 아버지·어머니 성을 나란히 쓰지만 나는 두 성 모두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기자는 “나이와 본명을 밝히는 것은 기사의 기본”이라며 “대학은 밝히지 않을 것”이라는 타협안을 냈고, 그는 이에 동의했다. 그가 운영하는 ‘빨간 눈사람’이라는 프로덕션 이름을 따서 보통 ‘빨간경순’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경순 감독’으로 통일했다.

지난 8월 「지록위마」 경순 감독과 원작자 문영심 작가(사진 오른쪽)가 ‘감독과의 대화’에 참석하고 있다. / 「지록위마」 제작위원회 제공

지난 8월 「지록위마」 경순 감독과 원작자 문영심 작가(사진 오른쪽)가 ‘감독과의 대화’에 참석하고 있다. / 「지록위마」 제작위원회 제공

‘사회에서 비켜난 이야기’ 주로 다뤄

경순 감독은 고등학교 때부터 ‘데모 학생’이었다. 그는 중학교 때 몸이 아파 1년 휴학하다 보니 고3 때 친구들은 이미 대학생이었다. 그 틈에서 맨날 시위 얘기를 듣다가 아예 같이 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시위를 하기 위해서라도 대학을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대학 4학년 때 시위를 하다 구속됐는데 전두환의 8·15 사면조치로 한 달 만에 구치소에서 나왔다. 복학하지 않고 현장(성수동 공단)에 들어갔다가 1987년 6·10항쟁 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생기면서 노조 지원투쟁에 나섰다. 그때 서울시 지하철 노동조합 간사로 들어갔다. 지하철 노조에서 대정부 투쟁, 임금인상 투쟁 등 늘상 싸우다 보니 몸도 지쳤다. 나는 글을 쓰고 여성문제·사람들의 얘기 등을 하고 싶었다.”

노조 간사를 그만둔 1997년 그는 나이 서른 다섯에 방송작가협회에 등록해 영상을 배웠다. 싹수가 있어 보였는지 수료 후 곧장 프로덕션에 취직해 휴먼다큐를 만들었다. 돈을 벌기 위해 다큐를 만들었지만 맘에 들진 않았다. 그는 “돈이 없어도 내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영화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2년 만인 1999년 첫 작품 <민들레>를 만들었다.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숨진 인사의 가족들이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만들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422일간의 기록이다. 결국 1999년 12월 28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이어 만든 영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바로 이 의문사위원회 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이후 한국·일본·필리핀의 성노동자 생활을 기록한 <레드마리아> 1·2, 감독 8명이 공동으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기록한 「Jam Docu 강정」을 만들었다.

그동안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운파상(1999),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상(2006),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다큐 옥랑문화상(2009) 등을 수상했다. 이번 <지록위마>는 개인이 만드는 7번째 영화다. 지금까지 작품에서 보듯이 그의 영화는 ‘사회에서 비켜난 이야기’가 주제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는 “내 영화가 불편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Jam Docu 강정」은 독립영화 전용관에서도 틀 수 없다고 해 영화진흥위와 많이 싸웠다”면서 “그런 영화진흥위가 이번 <지록위마>에 거액을 지원한 것은 엄청난 변화”라며 크게 웃었다.

-다큐영화는 돈벌이가 안 될텐데, 최소한 다음 작품 제작비용은 나와야 하지 않나. 

“한 번도 돈이 된 적이 없다.(하~하~) 아르바이트 하면서 제작비를 벌었다. <민들레> 찍을 때는 새벽에 신문 돌리고, 낮에 영화 찍고, 밤에는 후배 치킨집 주방에서 일했다. 이젠 제작비가 워낙 높아져 감당이 안 된다. 독립영화는 대부분 기초·예술영화로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최근 <공범자> <자백> <다이빙벨> 등의 다큐영화에 관객이 몰리고 있다. <공범자>는 관객 20만이 넘었다고 한다.

“최승호 감독의 이름도 있고, 또 <뉴스타파>라는 매체도 있다. 영화도 잘 나왔다고 들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대부분 감독의 마케팅 능력은 이에 못미친다.”

-경순 감독도 최승호 감독 정도 수준은 되지 않는가.

“아니, 아니다.(고개를 흔들고 손사래를 친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했지만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독립영화 만드는 자체가 삶의 원동력으로, 몇백만 관객이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터뷰는 사무실(합정동) 근처 생맥주집으로 옮겨 계속됐다. 아예 저녁 대신 술로 때우기로 했다. 술김에 서로 ‘20만 관객 파이팅’을 외쳤다. 술 먹기 전에 한 ‘몇백만 관객이 부럽지 않다’는 그의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우철훈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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