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년 전대협 초대 의장·국회의원 이인영 “대통령의 담대한 대북 제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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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9일은 전국대학생협의회(전대협) 창립 30주년이었다. 전대협동우회(회장 조정필) 주최 기념식이 열렸지만 한 인터넷 매체를 제외하고 중앙언론에선 한 군데도 보도하지 않았다. 전·현직 의원, 구청장 등 200여명이 참석한 기념식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축사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지선 스님 등이 격려사를 했다.

전대협은 1987년 전국 대학 총학생회가 연대한 결사체로 6·10 시민항쟁과 직선제 개헌투쟁을 완수한 주도세력이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6월항쟁의 수훈갑은 야당이나 재야보다 전대협을 더 많이 꼽았다. 그 전대협 초대 의장이 이인영 민주당 의원(53)이다. 그는 부의장인 우상호 의원과 나란히 기념식에 참석했다.(3기 의장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참석지 않았다) 먼저 당시 전대협을 만들게 된 이유부터 들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30주년 전대협 초대 의장·국회의원 이인영 “대통령의  담대한 대북 제안 아쉽다”

6·10항쟁을 주도한  ‘스튜던트 파워’

“86년 학생운동은 5·3 인천, 10·28 건대 등 너무 급진적이어서 심한 탄압을 가져왔다. 게다가 학생운동권이 자민투-민민투로 분열한 것에 대한 반성이 나왔다. 그래서 분열이 아닌 단결, 노선투쟁이 아닌 공동투쟁, 선도투쟁이 아닌 대중투쟁, 소수의 학생운동이 아니라 다수의 학생운동으로 가야 한다는 요구가 대대적으로 일었다. 그 내부 혁신을 고대 총학생회가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고대는 87년 4월 18일 1만명이 참여해 총학생회가 출범했다. 그래서 5월 서울지역대학생협의회 결성에서 의장이 됐고, 전대협을 만들며 자연스럽게 고대에서 의장을 맡게 된 것이다.”

4·19 학생혁명도 그랬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스튜던트 파워’는 가장 막강한 정치·사회세력이었다. 이는 6·10항쟁에서 그대로 재연됐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을 몰아낸 이번 촛불혁명 과정에서 스튜던트 파워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주목해야 할, 달라진 세상의 단면이다.

-전대협은 발족 선언문에 △외세 배격과 독재 종식을 통한 자주적 민간정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향한 연대 등을 명시했다. 30년 후인 지금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30주년 기념행사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우리는 세상의 소금돌로 남아선 안된다, 우리가 녹아야 짠 맛이 나고, 부패를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대협은 특정 개인이나 그룹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특정한 패권이나 권력집단으로 생각하지 말아달라.”

-역시 전대협의 관심사는 통일문제였고 이 문제는 3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주요 현안이다.(기념식 단상 왼쪽에 ‘1987년 통일의 물결로 굽이쳐라 내 사랑 한반도여!’ ‘1988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1999년 가자! 청년학도여! 민족통일 기치 높이 축전의 도시 평양으로!’라는 플래카드를 달았다)

“바로 ‘통일의 물결로…’ 구호를 내가 만들었다. 처음 전대협을 만들 때 1960년 4·19 이후 조국통일 문제와 민중생존권 문제가 왜 나왔을까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우리의 ‘사회적 DNA’라고 생각했다. 민주주의가 포문을 열면 민중 생존권 문제가 제기되고, 그리고 통일의 기운이 나온다. 6월항쟁 직후 7월부터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통일대장정이 나온 것이다. 우리 기수는 민주정부·군사독재와 싸우고, 2기(88년)는 통일투쟁을 벌이고, 3기(89년)는 실제 평양에 간 것이다. 이는 상황이 되면 저절로 터지는 일종의 DNA 같은 것이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하~하~)

“1997년 정권교체 이후를 보라. 외환위기로 제기된 민중 생존 문제를 김대중 대통령이 복지 확충으로 막았다. 이어 통일문제가 활성화되고 햇볕정책을 거쳐 결국 남북정상회담으로 갔다. 작년 촛불도 탄핵으로 민주주의를 정상화한 이후, 민중 생존권 문제가 대두되지 않나. 지금 최저임금·비정규직 문제를 해소해야 정권이 안정된다. 그리고 남북문제도 풀어야 한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8월 23일 “문재인 정부 들어와 청와대는 전대협·주사파 분들이 장악했고, 모든 분야에서 좌편향되고 있다”고 말했다. 전대협 3기 의장을 지낸 임종석 비서실장을 겨냥한 것이다. 박근혜 정권 시절 ‘조갑제 닷컴’에서 발행한 <종북 백과사전>에는 임종석 실장은 물론 이인영 의원도 ‘종북의원’으로 지목돼 있다.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전대협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의원은 “전대협 전체를 이적단체로 걸지 못하고 4기쯤 전대협 산하 ‘조국통일위원회’만 이적단체로 규정했다”고 분명히 했다. 전대협 기념식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지선 스님은 전대협을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6월 민중항쟁의 주역으로 평가했다.

“검찰에 불려가 ‘사상검증’ 비슷한 것을 받는 과정에서 나는 친북(북한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왜냐, 통일을 하려면 남북이 친해지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친북이 뭐가 잘못이냐. 그러나 종북은 다르다. 지금 통일운동·정치하는 사람 중 북한의 지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누가 있나. 설사 그런들 그것을 따르는 국민이 있겠나."

-박근혜 정권의 공안몰이에 민주당도 일부 동조하지 않았나. 특히 통합진보당 해산 사유로 든 ‘민중민주주의’는 전대협 강령에 비해 훨씬 부드럽다.

“전대협 활동과정에서 나온 일부 급진적 면에서 보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전대협 자체는 대중적 질서·체계로 형성된 시스템이었다. 통합진보당에 가해진 종북몰이를 스스로 헤쳐나가지 못한다고 비판하긴 했다. 그러나 정당은 국민이 선거를 통해 평가하는 것이지 공안적 방법으로 해산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나는 통합진보당이 종북정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비평가나 국어선생님 꿈꿔

이 의원은 1964년 충북 충주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1984년 고려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그는 현대문학비평을 하는 교수가 되고 싶어했다. 이유는 “그냥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게 안 되면 고향에서 후배를 가르치는 국어선생님이 되려 했다. 사실 그는 마른 문학청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외모가 부드럽다. 진한 담배연기 내뱉으며 문학비평 원고를 끄적거리는 것이 어울릴 스타일이다.

그가 검은 한복에 ‘자주통일’이라는 붉은 머리띠를 두르게 된 것은 ‘비극’이다. 그 비극은 1980년대 대학 상황이 만들었다. 그는 “강제징집됐다가 죽은 김두황 선배 추모제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돌멩이를 던졌고, 그즈음 광주 백서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운동권에 들어간 것에 대해 “부모님에게 받은 것과 다른 제2의 생명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표현했다.

전대협이 앞장서 쟁취한 직선제 헌법이었지만 1997년 대선에서 DJ(김대중)와 YS(김영삼)가 분열하면서 군사정권이 연장됐다. 이에 1989년 재야 민족민주운동 세력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만들었다. 그는 전민련 간사로 활동했다.(이 과정에서 민주화운동가 이해학 목사의 딸과 결혼도 했다) 그리고 1999년 고 김근태 ‘선배’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16대 총선에서 서울 구로에 공천을 받았으나 낙선했다. 그러나 17대 총선에서 당선됐고, 19대·20대 총선에서 연속 당선해 3선의 중진의원이 됐다. 주로 외무통일위, 정보위에서 활동해 ‘통일전문가’로 통했다.

이인영 의원을 비롯한 ‘통일걷기’ 대원들이 고성 통일전망대를 출발해 걷고 있다. / 이인영 의원실 제공

이인영 의원을 비롯한 ‘통일걷기’ 대원들이 고성 통일전망대를 출발해 걷고 있다. / 이인영 의원실 제공

주된 관심은 노동문제와 통일문제

그는 8월 3일 새벽부터 15일 저녁까지 12박 13일 동안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경기도 파주 임진각까지 한반도 허리 248km를 걸었다. 그와 지역구 동지·친구 등 200여명이 함께했다. 원래 비무장지대(DMZ)를 걸으려 했지만 허가가 안나 민통선을 걸었다. 그가 이렇게 걸은 이유는 통일이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민통선을 ‘민족통일선’으로 바꾸고 싶은 열망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왜 통일이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도 그랬지만 새 정부가 하려고 하는 것이 안되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 북한 정권이 할아버지(김일성)·아버지(김정일) 세대와 같을까.… 남북관계 개선이 뒤로 가는 것 아닌가.… 이런 말을 직설적으로 얘기하고 싶은데, 지금 그러고 싶지는 않다.”(그는 말을 아끼려는 표정이 역력했다)

-민통선 걷기 후기에 ‘문재인 대통령의 좀 더 담대한 제안이 아쉽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하다 결심한 표정으로) 첫 번째는 북한 정권이 할아버지·아버지와 다르다. 빠르게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북·미관계를 복원시키는 것이 균형 있게 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평화통일이 멀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번째는 한국이 할 수 있는 옵션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도적인 매개자·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것도 미국 때문에 간단하지 않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이 우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들어간 담대한 선언이 아쉽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은 ‘한반도 비핵화’가 전제다. 그러나 북한은 체제 유지의 마지막 보루인 핵·미사일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하고 있다. 문정인 교수의 비핵화가 아닌 ‘현 수준 동결’이 합리적이 아닐까.

“비핵화는 할아버지·아버지가 한 오래된 약속이다. 민족적 합의였다. 또 당사자 정신(남북의 자주적인 통일)도 그렇다. 그런데 북한이 남쪽과 얘기 안하는 것, 통미봉남(미국과 회담하지만 한국과는 안한다)도 안 맞는다."

-비핵화 대가로 원전과 중유 제공을 약속했지만 이를 파기한 것은 미국과 우리다. …비록 사퇴했지만 미국 트럼프 대통령 특보가 ‘북핵·미사일 동결과 주한미군 철수’까지 언급하는 급변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너무 소극적이라는 평가가 있다. 문 대통령 주변을 강경한 매파가 장악했다는 소문도 있다.

“문 대통령이 매파에 둘러싸여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좀 실용적이고, 신중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다만 문 대통령이 생각하는 속도만큼 주변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다만 가만히 앉아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선 안된다. 좀 더 담대한 구상을 북에 제안해야 한다. 특사 교환이나 경제협력, 이산가족 상봉, 평창올림픽 단일팀 등 가리지 말고 대화를 해야 한다.”

그는 30년 전 전대협 의장 시절과 비교해 변한 듯하면서도 변하지 않아 보였다. 전대협이 그랬듯이 지금도 통일문제를 천착하는 것이 그렇다. 그의 블로그 머리글은 ‘통일로 더 커지는 대한민국의 꿈’이라고 돼 있다. 그는 스스로 “정치에서 나의 주된 관심은 노동문제와 통일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 정권에서 환경노동위 간사를 자임했다. 그는 “박근혜 정권이 제출한 쉬운 해고 법안에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은 구속됐고, 한국노총도 강하게 저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노동법 개악에 1점 1획도 양보하지 않았다”면서 “깔때기(자화자찬)일 수도 있는데, 노동법 개악을 내가 막았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자신을 내세우거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정치인이 아니다. 그래서 ‘언론 쑥맥’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3선의 중진이 됐으면서 변변한 상임위원장을 맡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지 모른다. 그래선지 모처럼 그의 깔때기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는 이번 ‘통일걷기’에서 온통 통일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원래 아내와 같이 걸으려 했지만 갑자기 몸이 아파 같이 하지 못했다. 이 의원은 “하루 2시간 이상 아내의 쾌차를 기도하며 걸었다”면서 “이 말은 꼭 써달라”고 말했다.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우철훈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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