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MBC 블랙리스트’ 이렇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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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4대강이, 노동문제가 PD수첩에서 다룰 수 없는 아이템이 되어갔지만 변변히 저항할 수 없었다. 저항하면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적히고,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얼마 전 비제작부서로 쫓겨난 MBC 기자들은 일제히 ‘새로운 친구를 만나보세요’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받았다. 새로운 친구로 등장한 주인공들은 황당하게도 MBC 김장겸 사장, 최기화 기획본부장, 오정환 보도본부장 등 MBC 내 주요 경영진들이었다. 현재 MBC 분위기에서 이들이 갑자기 친구 신청을 할 리가 만무한 상황.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이들이 모두 휴대전화를 일제히 교체했다는 것. 교체하면서 앱을 새로 깔면 이들의 전화번호가 저장된 휴대전화로 문제의 메시지가 뜬다고 한다. 만약 이 추측이 정확하다면 주요 경영진들은 같은 날 손 붙잡고 함께 휴대전화를 바꿨다는 것이데, 경영진 주변 행정부서에서도 비슷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들이 6개월 전에 새로 받은 휴대전화를 갑자기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이 이상한 현상이 매일 폭로되고 있는 MBC의 불법행위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으로 100여명을 불법 징계하고 200여명을 유배 보낸 MBC 경영진에 대한 사법처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그런 와중에 최근에는 MBC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는 강력한 증거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는 8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노조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카메라기자 성향분석표’, ‘요주의인물 성향’이라는 블랙리스트 내부작성 문서를 공개했다. MBC 권혁용 영상카메라기자회장이 65명에 대해 4개 등급으로 분류하여 성향을 분석, 주시하며 불이익을 준 것에 대한 입수문건을 공개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는 8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노조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카메라기자 성향분석표’, ‘요주의인물 성향’이라는 블랙리스트 내부작성 문서를 공개했다. MBC 권혁용 영상카메라기자회장이 65명에 대해 4개 등급으로 분류하여 성향을 분석, 주시하며 불이익을 준 것에 대한 입수문건을 공개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블랙리스트 종용한 방송문화진흥회

블랙리스트. 이 무시무시한 단어에서 블랙은 사악하다는 뜻이다. 사악한 사람들의 리스트라는 것인데, 어원에 의하면 절대왕조 시절 영국의 한 왕이 처음으로 썼다고 한다. 블랙리스트건 살생부건 절대권력자들이 자신의 정적을 처리하기 위해 고안한 전근대적인 폭력이고 당연히 현행 헌법이나 법률에서는 금지하는 불법행위다. 그런 단어가 지금 21세기 대명천지 공영방송 MBC에서 횡행하고 있다.

MBC 카메라기자들 65명에 대한 성향을 등급으로 표시하고 경영진에 대한 충성도, 노동조합에 대한 태도 등을 꼼꼼하게 기록한 블랙리스트가 공개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MBC의 이사회격인 방송문화진흥회의 고영주 이사장과 이사들의 녹취록이 공개되었다. 그는 올해 2월 MBC 사장을 뽑는 자리에서 ‘언론노조 소속의 구성원들을 제작과 보도에서 배제하라’고 시종일관 요구했다. 녹취록을 보면 그와 김광동·유의선 이사는 언론노조 소속의 기자와 PD들에 대해 ‘올바른 프로그램을 만들 리 없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고, 언론노조 소속 구성원 전체를 매도하고 있다. 사실상의 블랙리스트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방문진 이사들 역시 사법처리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블랙리스트는 리스트의 존재만으로는 증명될 수가 없다. 블랙리스트를 만들라는 부패한 권력의 지시, 지시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중간관리자, 블랙리스트의 존재와 피해자를 방관, 혹은 방조하는 이해당사자들에 의해 완성이 된다. 이런 총체적인 시스템이 있어야 블랙리스트는 제대로 작동된다. 불행하게도 MBC에는 이런 시스템이 있었던 것 같다.

MBC 노동조합은 2012년 유례가 없는 170일 파업을 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파업의 목적이었던 공정방송에 대한 전망이 사라졌던 시점부터 경영진들의 탄압은 교묘해져갔고, 노동조합이 저항할 무기는 별로 없었다. MBC 구성원들의 저항은 유예되었고 중간간부들은 윗선의 명령이라며 과거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을 실행했다.

표창원의 섭외가, 안철수의 인터뷰가 박근혜 탄핵촛불 촬영분이 다큐멘터리에서 사라지는 검열이 일상화되었지만 파열음 하나 나지 않았다. PD들이 캐스팅하고자 하는 아나운서의 출연이 이유 없이 불허되었지만 나서서 항의할 수 없었다. 세월호가, 4대강이, 노동문제가 PD수첩에서 다룰 수 없는 아이템이 되어갔지만 변변히 저항할 수 없었다. 저항하면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적히고,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 한마디로 내쫓긴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미 주위에는 아나운서가 송출업무를, PD가 스케이트장 관리를, 기자가 드라마 홍보를 하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부당한 경영진 요구 실행한 중간관리자

그래도 경영진은 불안했다. 대부분의 내부 구성원이 언론노조 소속이었다. 쫓겨난 사람들을 대신하기 위해, 또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너 아니어도 프로그램, 뉴스 할 사람 많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채용과정에서 지역을 보기도 한다’는 경력사원을 부지런히 뽑았다. 신입사원 공채는 사실상 폐지했다. 그렇게 경영진은 블랙리스트가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MBC 경영진은 블랙리스트를 실질적으로 실행할 중간관리자들에게 관대했다. 지난 5년간 동료들이 해고와 징계와 유배생활을 전전할 때 ‘평범한’ 중간관리자들에게는 동료들보다 1000만원 이상 많은 연봉과 수당, 각종 선물과 해외연수, 그리고 승진이 주어졌다. 간부를 하려면 전향서가 필요했다. 부장 이상의 보직을 맡으면 발령 즉시 노동조합에서 자동 탈퇴하는 시스템이 있는데도 경영진은 굳이 보직을 맡은 이가 직접 작성한 노동조합 탈퇴서를 요구했고, 그 탈퇴서를 노동조합에 제출해야 했다. 강을 건너면서 다리를 불태우라는 의미였을까. 사실상의 부당노동행위임에도 누구 하나 노동조합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중간관리자가 되면 경영진의 부당한 요구라도 실행하는 영혼 없는 관리자로 전락했다. 동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경영진의 부당한 오더 프로그램 요구에는 경영진 탓을 하면서 조직 보호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아이템 검열에도 저항하면 ‘유배당할 수 있고, 경력사원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니 받아들이라’는 부탁을 했는데,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부당한 징계와 해고가 계속되는데도 문제제기하는 중간간부는 아무도 없었다. 자기의 처지를 풍자한 웹툰을 개인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젊은 예능 PD를 해고해도, ‘기자·PD들을 동의 없이 경인지사 등 업무와 관계없는 곳으로 보내지 말라’는 법원의 판결을 계속 무시해도 국·부장들은 외면했다. 사장들은 유난히 확대간부회의를 좋아했고, 때때로 함께 외유(外遊)를 즐겼다. 노동조합의 피케팅과 소송이 있었을 뿐 회사 내부 시스템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MBC 수뇌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행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오죽하면 지난 2월, 대통령 탄핵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을 때조차도 그들은 MBC 사장을 뽑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언론노조 구성원, 올바른 가치관이 없는 사람은 앵커·기자·PD에서 배제’하라는 아무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만용은 꼼짝없이 증거가 되어 그들을 심판하게 되었다. MBC 정상화를 앞당길 수도 있는 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 앞에 나는 전혀 즐겁지 않다. MBC가 범죄의 현장이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처참하다.

<김재영 PD(PD수첩 등 연출, 현재 송출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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