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실련 최장수 사무총장 고계현, 시민 없는 시민단체…“소비자주권운동으로 시민 찾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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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부 본격적인 시민운동의 시작은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의 출범을 꼽을 수 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정치·경제·사회·노동·시민단체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기운이 싹 틀 때 경제정의를 기치로 내건 시민단체가 출범한 것이다. 경실련이 출범하자마자 제기한 토지공개념·금융실명제·공직자 재산공개 등은 그대로 정부 정책으로 수용됐다. 이런 이유로 경실련을 출세의 통로로 이용한 사람도 있다. 경실련을 통해 많은 정치적 인물이 오고 갔지만 흔들림 없이 조직을 지킨 사람이 있다. 바로 사무총장이다.

고계현 전 사무총장(52)은 1994년 경실련 간사로 시작해 부장-국장-실장-처장-총장(연임) 등 22년 동안 경실련을 지켜왔고, 사무총장을 6년이나 한 그야말로 경실련의 산증인이다. 그는 지난해 촛불혁명을 보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누구는 ‘촛불광장의 그 많은 시민이 어디로 갔는가’라고 한탄했다지만, 그는 ‘촛불에 애당초 시민이 없었다’고 절감했다. 그런 고뇌와 반성 속에 그는 시민운동의 새 길을 시작하고 있다.

“경실련 밑바닥에서 끝까지 활동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그때 공채 1기로 3명이 들어왔는데 나만 남고 다 중도에 다른 길을 갔다. 나도 정치권 유혹을 여러 번 받았지만 나는 정치만큼이나 시민운동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경실련 최장수 사무총장 고계현, 시민 없는 시민단체…“소비자주권운동으로 시민 찾겠다”

간사로 시작 22년 근무 경실련 산증인

1965년 전남 목포 출신인 그는 전두환 정권의 강압통치가 극에 달한 84년 대학(국민대 정외과)에 입학했다. 남북학생회담을 요구하다 수배생활을 하던 89년 봄 ‘광주 학살자 처벌’을 요구하며 관훈동 민정당사를 점거했다. 그리고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91년 복학했지만 학원은 더 살벌했고, 학생들은 분신투쟁으로 맞섰다. 그는 대학원을 다니다 군대로 ‘도피’했다.(그때 병역법이 바뀌어 2년 실형을 살아야 군대가 면제됐다)

94년 ‘예비군’으로 돌아온 학원은 달라져 있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 학원에서 데모는 사라졌다. 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다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했으니 경제적 민주화나 공익 차원의 시민운동이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해 경실련 상근자 모집광고를 보고 응시했다”고 말했다. 당시 면접관이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 김태동 전 경제수석, 유종성 고려대 교수, 서경석 목사 등이었다.

-경실련의 지도부는 끊임없이 정치권으로 충원됐다. 특히 경실련 출신은 보수·진보 정파도 가리지 않았다.

“많이 그랬다. 경실련은 양심적 보수에서 합리적 진보까지 회원 스펙트럼이 넓다. 경실련 주요 인사가 보수·진보 등 특정 정치권으로 갈 때마다 후원회원들이 집단적으로 탈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2004년 대표나 사무총장 등은 정치권 진출 6개월 전에 사퇴하는 내부 윤리강령을 만들었다.”

-경실련은 경제정의 문제를 포함해 의정감시운동, 심지어 통일운동까지 했다. 다양한 활동 중 경실련이 우리 사회에 가장 기여한 것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경제정의’라는 용어를 우리 사회에 토착화시킨 것 아닐까. 달리 표현하면 경제민주화다. 그런 가치에 따라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제도, 한국은행 독립, 정치자금 투명화, 선거법 개정 등이 이뤄졌다.”

-우리는 시민단체가 종합백화점식으로 거의 모든 영역을 다한다. 시민단체가 재벌 욕하지만, 시민단체도 재벌 닮아간다는 비판도 많았다. 그러니 전문성이 떨어지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유급 상근자가 필요하고, 인건비로 단체 재정이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경실련이 현대적 시민운동단체가 되면서 사회적 요구가 경실련으로 수렴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대 와서 환경·예산감시·보건의료·복지 등 각 부분 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경실련 개혁 TF에서 ‘잘하는 것만 하자’ ‘지속성 있는 사업은 별도 독립시키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국제개발협력은 지구촌나눔운동, 예산감시운동은 함께하는 시민운동, 환경운동은 환경정의 등으로 독립시켰다. 이것이 곧 우리 시민사회운동의 발전사다.”

-현재 시민운동의 양대 축은 경실련과 참여연대지만 요즘 경실련은 참여연대에 비해 밀린다는 느낌이 든다.

“경실련과 참여연대는 다르면서 상호보완적이다. 경실련은 중도우파도 포괄하지만 참여연대는 중도좌파 쪽이다. 경실련은 공익적 시민운동으로 전문성이 강하다. 참여연대는 후발주자(94년 창립)로 ‘민중단체’와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현안에 적극적이다. 경실련은 의제가 생길 때마다 내부 토론을 많이 하다 보니 입장 표명이 참여연대에 비해 늦다. 밖에서 보면 참여연대가 활발해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는 ‘민중단체’라는 말을 썼다. 시민(전통적 의미로 교육받은 화이트칼라)과 민중(노동자·농민·기층 도시인 등 블루칼라)의 정치적 차이는 엄청나다. 외견상 ‘정치적 중립’(이것 역시 매우 형식적이지만)을 내세우는 시민단체와 달리 민중단체는 정치적 구체성을 띤다.

경실련과 참여연대의 차이점은

그는 이번 촛불혁명에서 ‘시민운동은 초라하고 왜소하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고백했다. 그 역시 경실련 깃발을 들고 광화문광장에 개근했다. 그러나 그 촛불광장에서 시민단체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는 “제도권 전반에 대한 불신을 뒤집고자 일어난 것이 촛불혁명인데 시민단체도 제도권 내의 한 단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말 경실련 사무총장 임기를 마친 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1987년 6·10항쟁 때는 시민단체가 이끌었지만 이번 촛불에서 시민단체는 시작부터 끝까지 끌려갔다. 왜냐…. 첫 번째 이유는 그동안 시민운동에 대한 냉정한 평가다. 시민과 시민단체가 괴리된 운동을 했다. 보수정부 10년 동안 시민단체도 힘들다 보니 일상에서 시민들과 공유하는 의제를 다루지 못했다. 시민단체는 그냥 큰 의제에 관성적으로 입장을 내고 시위했다. 그 거대 의제운동도 정파성과 이념화로 신뢰를 잃었다. 두 번째는 이제 시민단체 외각에 평범한 시민과 회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후원회원은 있지만 활동을 공유하는 회원이 많지 않다. 90년대에는 깨어 있는 시민이 단체를 찾아 자기의 목소리를 시민단체를 통해 표출하는 권리위탁 방식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IT시대로 급속도로 전환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카페나 밴드,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직접 표출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모인다. 필요하면 직접 행동까지 한다.”

고계현 사무총장이 이사회에서 소비자주권시민회의 로고를 설명하고 있다. /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제공

고계현 사무총장이 이사회에서 소비자주권시민회의 로고를 설명하고 있다. /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제공

-공감한다. 촛불의 시작인 국정원 댓글 진상규명 요구도 카페와 페이스북에서 시작했다. SNS 상에서 서로 의견이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 만들어지고, 후원금이 모이고 즉시 대한문 앞 시위가 이뤄졌다.

“그렇다. 시민단체가 입장 정리를 위해 내부 토론을 하고 있을 때 SNS 상에서 의제들이 논의되고 즉석에서 행동화된다. 어느 순간 시민단체가 뒷북을 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시민단체가 공룡화됐기 때문 아닌가.

“공룡화라기보다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시민단체들이 이런 변화를 감지해 온라인이나 SNS를 수용해야 했는데 그것을 못했다. 시민단체는 지금까지 한 오프라인 틀 안의 운동을 신봉하는, 의외로 경로의존증이 강하다. 재정적 어려움 때문도 있다. SNS 활동가에게 투자하려면 기존 운동을 축소 내지 조정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나도 그것을 못했다.”

-명망가나 화이트칼라 위주의 느슨한 시민운동으로서는 조직과 자금을 가진 노조나 민중세력이 쉬운 해고, 청년실업, 비정규직 문제 등 자신의 문제를 갖고 투쟁하는 것과 애당초 경쟁이 안된 것 아닌가.

“그렇다. 해고·비정규직·취업 등 정말 국민들의 삶이 어려워졌다. 시민단체가 이런 살기 힘든 국민의 문제를 의제화하고 정책화를 촉구하고 시민들과 같이 가야 하는데 그것을 못했다. 그래서 노조나 민중단체가 주도한 것이다. 시민운동은 항시적이고 무정형의 설득운동으로 블루칼라 운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번 촛불은 특수한 시기에 혁명적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블루칼라는 계층운동으로 이미 노조·단체 등으로 조직화돼 있다.”

-결국 기존 시민운동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면 시민운동의 지속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젠 시민운동 의제도 생활화돼야 한다. 정치개혁이나 재벌개혁 의제는 대안이 없어 못하는 게 아니다. 그런 문제는 결정적 시기에 단체가 연대해 풀면 된다. 이제는 작지만 구체적으로 시민이 실생활에서 느끼는 문제를 발굴해야 한다. 그래야 시민단체에 시민이 몰리고, 지속성도 생기고, 재정적 어려움도 극복된다.”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설립 완료

그는 두 달여 고민한 결과 “몰랐어! 문제는 작고 구체적인 실생활 의제야”라는 답을 얻었다. 바로 ‘소비자주권시민회의’를 만들기로 했다. 지난 3월 이사회를 구성하고, 4월에는 비영리 공익법인 설립을 완료했다. 대표 발기인으로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전 상지대 총장),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전 우석대 총장),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전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등이 참여했다. 그동안 국회 정치쇄신자문위, 감사원 혁신위, 중앙선관위·관세청 자문위원 등의 경험도 요긴하게 쓰였다. 그는 다시 사무총장을 맡았다. 집행위원회에는 식품안전, 화학소비재, 통신, 자동차, 에너지, 금융, 프라이버시 등의 소송 전문가가 참여한다.

-이미 소비자 관련 여러 정부·시민단체가 있다. 그들과 차별화하는 것이 관건으로 보인다.

“우리가 G20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소비자가 걸맞은 대접을 받고 있느냐. 우리의 소비자 권리는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형편없이 낮다 못해 원시적 수준이다. 70년대부터 소비자운동이 있었지만 모든 가치가 급격히 변화된 요즘 시대에 맞는가가 의문이다. 이른바 유럽연합(EU)의 소비자 7개 권리 즉 안전할 권리, 알 권리, 선택할 권리, 보장받을 권리, 의견을 제출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서비스를 받을 권리에 맞춰 소비자운동을 하는 곳은 별로 없다. 이는 가습기 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났고, 자동차·휴대전화 분야도 마찬가지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렇게 소비자를 봉으로 여기는 나라는 없다.”

그는 지금 서울시내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회원을 모집하고, 지부를 구축하는 일에 바쁘다. 경실련에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소비자주권시민회의는 인터넷·모바일 중심으로 운영된다. 온라인 소비자 카페와 연대도 모색하고 있다. 그는 “인터넷 카페의 60%가 소비자 카페로, 이들 카페의 허브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9월 정식 출범을 위해 그는 올 여름 휴가를 포기했다.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우철훈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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