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가 박래군, 죽음의 끝에서 생명운동으로 거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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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은 뭘까. 바로 죽음 아닐까. 세상에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을까. 또 세상에서 가장 깊이 있고 숭고한 것 역시 죽음 아닐까. 죽음은 철학을 낳고 종교를 낳지 않았나. 그런 죽음의 근처를 가면 항상 그가 있다. 보통 ‘인권운동가’라고 부르지만, 그래서 그는 ‘재야의 장의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인권운동가 박래군, 죽음의 끝에서 생명운동으로 거듭나다

그는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56)이다. 그는 1988년 동생(박래전)이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자살하자 유가협(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으로 시민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과장, 인혁당 사건 유족 모임인 4·9통일평화재단 이사,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집행위원장, 세월호 유족 모임인 4·16연대 상임운영위원 등 그의 활동은 주로 ‘죽음’과 관련됐다. 사실 그에게 붙은 ‘재야의 장의사’라는 별명에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자의 첫 질문도 “죽음과 밀접한 일을 하는 자신의 팔자가 기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였다.

‘죽음’ 관련 일 많이 한 ‘재야의 장의사’
“그렇게 됐다(하~하~). 동생의 죽음에서 비롯되기는 했지만 1988년 이소선 어머니(전태일 모친)가 유가협으로 날 인도했다. 그 해 10월 의문사 가족 35명이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그 전까지 개별적으로 진정하던 수준에서 처음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들을 지원하면서 의문사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유가협 사무국장을 하니 전국에서 분신·자살하면 나에게 연락이 왔다. 달려가서 장례 치러주다 보니 그게 업(業)이 됐다. 91년 5월 강경대군이 죽고, 6월까지 연이어 13명이 분신하고 죽었다. 하루하루가 끔찍해 아침 신문 보기가 두려웠다. 전국을 돌며 ‘더 이상 죽지 마라’ ‘죽을 힘이 있으면 독재와 싸우자’고 외치고 다녔다.”

2014년 4월 16일 300명이 넘는 사망·실종자를 낸 세월호 참사는 이번 촛불혁명의 중요한 동인이 됐고, 특히 박근혜 탄핵에 실제적·헌법적 원인이 됐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시민사회단체의 대응이 과거와 달랐다. 4·16연대는 과거와 달리 사회운동세력이 연대한 특이한 조직형태였다. 4·16연대는 광화문광장에서 다양한 이벤트와 함께 장기 농성을 이어갔고, 교황 방문까지 연계하는 치밀한 국제전략이 구사됐다. 이 4·16연대를 엮은 사람이 바로 그다.

“무슨 사안이 터지면 1~2주 만에 대책위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세월호 문제는 장기적으로 대처해야 하는데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참여한 운동세력이 빠지기 시작했다. 참여단체들도 노동은 노동, 통일은 통일 등 자기 사업을 해야 했다. 내가 범국민 시민연대조직으로 가자고 설득했다. 처음 유가족들도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2015년 2월 4·16연대 조직에 착수해 1주기 추모대회를 마치고 6월 28일 정식으로 연대조직을 발족했다. 장기적으로 싸울 수 있는 연대조직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때 판단이 옳았다.”

그는 이번 촛불혁명에 세 가지 요인이 있다고 본다. 첫 번째는 세월호 유가족이 싸움을 멈추지 않고 광화문을 지켰던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번 촛불혁명의 불씨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바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꼽았다. 경찰이 직접 물대포를 쏘고 쓰러진 사람에게 또 쏘는 장면은 국민을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부검한다며 시신을 탈취하려는 경찰의 모습을 보면서 국민은 너무한다는 분노를 갖게 됐다. 거기에 서울대병원 의사의 사망 원인 왜곡도 공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마지막으로 정유라의 이화여대 특례입학은 공정성에 대한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무너뜨렸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권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지 않아 (혹은 언론이 보도하지 않아) 그렇지 백남기 농민 말고도 박근혜 정권에 목숨으로 저항한 사람이 있다. 2013년 7월 9일 국정원 댓글조작을 주도한 원세훈 국정원장과 이 수사를 방해한 김용판 서울경찰청장 구속을 요구하며 자살한 홍만희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회장이 있다. 또 2014년 1월 1일 역시 국정원 댓글조작 특검을 주장하며 분신한 이남종씨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이남종씨 장례식에 참석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죽음으로 남기신 말씀 잘 새기겠습니다’라고 방명록에 기록하기도 했다.

김영한 전 정무수석의 업무일지나 안종범 전 경제수석 수첩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세월호 대응’이다. 최근 청와대에서 노골적으로 ‘세월호 특조위를 무력화하라’는 문건이 발견되기도 했다. 세월호를 잠재우기 위한 정부의 무자비한 조치에도 세월호 이슈가 수그러들지 않은 것에는 희생된 어린 학생들의 ‘한’도 있었지만 박 소장의 집요함이 주효했다. 그런 면에서 박 소장은 박 정권에는 정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아마 이즈음 박 정권이 손볼 인물 1순위로 박 소장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꼽을 수 있다. 민주노총 한 위원장도 2015년 1월 임기를 시작하자 조직을 동원해 정권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2015년 4월 18일 세월호 1주기 추모집회에 3만명을 동원하는 위력을 발휘하자 두 사람은 ‘사정권’에 들었다. 박 소장은 7월 15일 구속되고, 한 위원장도 도피를 이어가다 11월 16일 조계사로 도피한 지 3일 만에 체포됐다.

박 소장은 근 4개월 만인 11월 2일 겨우 보석으로 출소해, 다시 민중총궐기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자신의 주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박 소장은 “2015년 백남기 농민을 그렇게 죽여놓고 사과도 안 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시대를 1970년대로 돌리는 것을 보고 2017년 1월 ‘박근혜는 올해를 못넘긴다’고 예언 아닌 희망섞인 전망을 했다”고 말했다.

-청와대 블랙리스트에 박 소장은 ‘종북성향의 악질 활동가’로 낙인 찍혀 있었을 것이다.

“(하~하~) 나는 억울한 게 인권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유엔 인권기구가 권고하는 기준에 비추어 말하는 것이다. 북한의 사주를 받는 것도 아닌 나보고 종북이라니 말이 되나. 이석기 내란음모사건 때 아무도 대책위를 맡지 않으려고 주저주저할 때 내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내가 그들을 아는데 내란음모할 실력도 안 되는 친구들이다. 이것은 확실히 정권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정치적 음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촛불 국면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작년 촛불 직전이 가장 힘들었다. 세월호 특조위가 조사 방해를 넘어 강제해산에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싸워야 하느냐’고 묻는데, 민주당은 싸움도 제대로 못하고….”

-문재인 정부는 세월호 재조사를 약속했다. 4·16연대는 세월호의 어떤 부분에 대해 재조사를 요구하는가.

“지금까지 싸움은 진상규명을 가로막은 정부를 바꾸는 싸움을 한 것이다. 새정부의 선체조사위원회가 재조사를 결정했다. 정부 차원의 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진다. 2~3년이 중요하다. 청와대 조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정원 같은 곳을 조사하는 것이다. 지난번 조사를 방해한 해양수산부 등도 조사하고. 언론계(공영방송)도 조사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하고, (4·16연대는) 그런 것을 모니터해야 한다.”

-‘기레기’도 조사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하~) 이번에는 진상규명과 함께 책임자 처벌까지 요구하려 한다.”

-공감한다.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에서 사건을 조작한 검사들을 처벌하지 못했다.

“맞다. 책임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또 반복된다. 처벌 대상자 리스트를 만들어 책임자 처벌운동을 지속적으로 할 것이다. 또 4·16 이후 안전에 대한 의식이 많이 달라져 전국 시민들의 가칭 ‘안전사회시민네트워크’를 만들려고 한다. 준비위원회를 마련했고, 하반기에는 출범할 것이다.”

안전·생명운동을 하겠다는 그의 말을 의심했다. 놀라운 변신 아닌가. 1961년 경기도 화성 출신인 그는 81년 연세대 국문과에 진학했다. 소설가를 꿈꿨지만 동생의 죽음으로 시민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은 ‘운명적’ 변신이었다. 재야의 장의사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30년간 그렇게 ‘죽음’과 관련된 운동을 했던 그가 이제 ‘살자’는 운동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삶과 죽음이 한 장 차이라고 하지만 이는 놀라운 변화이고 반전이다.

2016년 7월 2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구속된 인권운동가 박래군씨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서성일 기자

2016년 7월 2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구속된 인권운동가 박래군씨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서성일 기자

소설가 꿈꾸다 동생 죽음이 운명 바꿔
그는 “살자는 운동도 세월호 유가족들이 하는 얘기”라며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가 생명을 경시하고 안전을 뒷전으로 민 채 돈만 좇는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안전에 관련된 단체를 네트워킹하고, 이를 내년 지방선거에서 공약으로 채택하게 하는 등 이슈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가 세월호의 진실을 찾고 끊임없이 ‘잊지 말자’고 되새기는 것은 보복이나 한풀이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교훈을 통해 다시는 이런 참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세월호의 어린 죽음이 가져온 ‘한’과 ‘교훈’은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운동이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고 한 것과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달라져야 한다는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소장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 대해 기대도 크지만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질곡을 뚫고 시민들이 만든 문재인 정부는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면서 “문 대통령은 촛불정신이 각인돼 있지만 여당 의원이나 장관 등은 촛불정신을 절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지금까지는 청와대 문 대통령의 원맨쇼로 지지율이 고공행진했지만, 이제부터 장관들이 정부 시스템으로 정착되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장관들이 관료들에게 매몰되면 모두 헛것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촛불혁명과 관련해 키워드 분석을 해보니 제일 많이 나온 핵심 키워드가 ‘불평등’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적 불평등은 건강·교육·주거불평등으로 이어진다”면서 “불평등이 이 사회의 모든 것을 망가뜨렸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자가 ‘소설은 언제 다시 쓰려고 하나’라고 질문하자 이렇게 말했다.

“만 60세까지 일선에서 활동하고 한적한 곳에서 텃밭을 가꾸며 소설을 쓰겠다. 사람들은 ‘박래군이 이렇게 일을 저질러놓고 못갈 것이다’라고 하지만 나는 가야 할 이유가 있다. 진보운동도 혁신이 돼야 한다. 진보운동이 혁신이 안 되는 이유는 사람이 바뀌지 않아서다. 시민사회운동에서도 과감하게 40대 대표가 나와야 한다. 나 없어도 분명히 된다. 후배들이 더 잘할 수 있다. 나부터 모범을 보이겠다. 대신 ‘인권운동 사람’에 대한 후원은 계속해 달라.”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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