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한통> 낸 소설가 남정현… 시간을 뛰어넘어, 한반도를 사랑한 해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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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가 세계적으로 시끄럽다. 북한은 얼마 전 잠수함발사미사일(SLBM) 시험발사도 공개했다. 여기에서 ‘핵심’은 이미 북한이 개발한 핵무기다. 핵무기는 워낙 무서운 위력으로 인해 국제정치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무기’(Cold weapon)로 꼽는다. 핵 보유 자체가 전쟁 억지력인 것이다. 북한이 노린 것은 그것일 것이다. 한반도에서 핵문제는 그만큼 다면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부터 한반도의 ‘반핵과 평화’에 천착한 사람이 있다. 그는 정치인이나 학자도, 환경운동가도 아니다. 소설가 남정현이다. 그는 60년대 소설 <분지>를 통해 미국의 핵을 비판했고, 70년대 세계 핵무기철폐운동본부 한국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80~90년대에는 ‘한반도 군축과 평화통일을 위한 선언’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요구했다. 똑똑하다는 대학가에서 ‘반핵·반미’ 구호가 등장한 것이 80년대 중반이고, 북핵문제도 90년대, ‘원전 제로’도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본격화됐다. 그런데 ‘세상물정 어두울’ 농고를 나온 시골 출신 한 소설가가 40~50년 전부터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은 대단한 혜안이다.

최근 그의 작품집 <편지한통>(도서출판 말)이 나왔다. 1965년 작품 <분지>와 1990년 작품 <신사고>, 2011년 작품 <편지한통>을 묶은 것이다. 세 작품은 45년이 넘는 시간적 괴리를 갖지만 관통하는 주제는 같다. 바로 ‘한반도 반핵과 평화’다. 솔직히 80년대 초 그의 첫 작품 <분지>를 읽고 느낀 감정은 복합적이었다. 소설에 묘사된 기지촌 모습은 ‘부끄러운’ 장면이었고, 미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20대 초반에 ‘충격’이었다. 그때 소설 제목 <분지>(糞地)의 똥 분(糞)자를 보고 ‘쌀이 위로 들어가 달라져 아래로 나오는 것’이라는 의미로 똥 분자를 외웠다.

[원희복의 인물탐구]<편지한통> 낸 소설가 남정현… 시간을 뛰어넘어, 한반도를 사랑한 해학가

1960년대부터 한반도 반핵과 평화 주장

이제 소설가 남정현은 더 이상 펜을 들지 못한다. 손도 떨리고, 귀도 어둡고, 무엇보다 머리도 어지럽다고 한다. 몇몇 후배와 대학로에서 만난 것은 어쩌면 그의 마지막 인터뷰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이번 광화문 촛불시위에 여러 번 참여했다고 했다. 그는 “대단한 민중이고, 엄청난 민족”이라고 촛불혁명에 대해 찬사를 반복했다. 그는 “서양은 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동격으로 생각한 사상이 없다”면서 “동학을 만든 대단한 민족의 저력을 보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 나온 책 서문에 이렇게 썼다.(손이 떨려 구술했다)

“내가 살아온 이 생생한 현실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 …우리 현대사의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를테면 1960년 4·19혁명이 그렇고, 1980년 광주의 5·18 민주화투쟁이 그리하며, 또한 2000년 남북이 합의한 6·15선언이 그렇고, 동시에 2016년 10월 말쯤부터 시작돼 연인원이 2000여만명을 헤아린다는 광화문의 촛불항쟁이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혁명과 선언과 항쟁의 그 밑바닥에는 예외 없이 다 민족자주에 대한 우리 민중들의 간절한 열망과 조국의 평화통일,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절절한 비원이 금방이라도 위로 솟구쳐 오를 기세로 펄펄 끓고 있다는 느낌이었다.”(<편지한통>-작가의 말)

60년 가까이 문학에 천착한 노(老)소설가지만 그는 문학가라기보다 치열한 시대 흐름을 좇는 ‘시사지 기자’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그를 50년 넘게 ‘지배한’ 문학은 뭔가 궁금했다.

“법정에서 ‘문학은 인간을 사랑하는 작업이다’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인간은 약육강식을 피해 사회를 만드는 터전을 잡고 사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 관점에서 사랑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문학은 정치·경제·사회의 메커니즘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작업이다.”

기자는 깜짝 놀랐다. 문학에 대한 첫 질문에 토마스 홉스나 루소가 말하는 자연상태론이 대뜸 나올 줄이야. 이것은 근대 사회과학의 출발인 사회계약론이다. 기자의 ‘사회과학을 따로 공부했나’라는 질문에 “해방 후 우리말로 번역된 사회과학서적이 없을 때 일본 와세다대 철학과를 다니던 친구의 형 집에 있던 사회과학·철학 번역서 300권을 다 읽었다”고 말했다. 역시 그의 문학은 이렇게 ‘묵직한’ 사회과학적 바탕 위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가 중학교 시절 이런 책을 읽게 된 것에는 사연이 있다. 그는 193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교장선생님으로 매우 부유했다. 그는 “전기와 전화기가 없는 집에서 살아보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다. 해방되던 해 그는 도고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산농림학교에 진학했으나 폐결핵에 걸렸다. 그는 “결핵에 걸려 힘이 빠지고 누워만 있다보니 책만 읽었다”고 말했다.

남정현의 대표 세 작품을 모은 「편지한통」. / 도서출판 말 제공

남정현의 대표 세 작품을 모은 「편지한통」. / 도서출판 말 제공

시대흐름을 치열하게 좇는 노소설가

남 선생은 폐결핵이 장과 임파선 등으로 전이돼 여러 번 수술했다. 체격이 작은 것도 어린 시절 그 병치레 때문이다. 그는 “임파결핵에 걸리면 다 죽었는데 목만 13번을 수술해 안 죽고 지금까지 산 것도 기적”이라고 말했다. 병마에 시달리며 겨우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사범학교에 진학했지만(그것도 1등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6·25가 나는 통에 중단하고 말았다. 그는 전시 홍익대가 대전으로 이전했을 때 무작정 들어가 강의를 들으며 ‘문학을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남 선생은 서울로 올라와 병을 치료하며 ‘이런 저런’ 직장생활을 했다. 그때 부인을 만났다. 그는 “당시 중앙청 옆에 사무실이 있던 사학연합(한국사학법인연합회)에서 방학책을 만드는 일을 했다”면서 “집사람은 영어과목 사원으로 합격해 같이 근무했다”고 말했다. 부인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나온 재원이었다. 하지만 번듯한 직장을 가지지 못했다. 마침 부인은 우연히 길에서 당시 공보부 차관이 된 대학 은사를 만났다. 초라한 차림의 제자는 ‘생활이 좀 어려운데 일거리 좀 달라’고 부탁했고, 그 은사 덕에 방송국에 취직해 영어 번역일을 했다.

남 선생은 “집사람은 방송국에서 외화 번역을 30년 했다”면서 “(나를 만나) 엄청나게 고생했지, 엄청나게… 엄청나게…”라며 말끝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고생만 하던 부인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남편은 지독한 반미(反美)주의자인데 부인은 영어를 통해 가정경제를 책임졌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하~하) 맞다. 우리는 영어로 먹고 살았다. 적(敵)을 알아야지. 그때 영어 그렇게 잘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 미국대사관에서도 집사람을 알아줬다. 집사람이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사설을 해석해 읽어주기도 했다. 그런 신문 구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미국 정체를 잘 알아야지.(하~하)”

기자는 ‘정보도 부족한 당시 미국의 핵정책을 비판하는 풍자소설을 쓸 수 있었던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남 선생은 부인으로부터 ‘밥’만 얻어 먹은 것이 아니라, 소설의 자양분까지 얻은 것이다.

첫 작품을 쓰게 된 계기는.

“거의 매일 소설가 최인훈·신동엽, 신문사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때 이화여고 영어선생이었던 누가(이름 기억이 안 난다) 소설 한 번 써보라고 해 120장을 썼지. 그게 <경고구역>이다. 해방 직후 주변은 온통 ‘들어오지 말라’ ‘뭐 하지 말라’는 경고판 투성이였다. 그런 시대를 빗댄 작품이다.”

이 <경고구역>은 1958년 <자유문학>을 통해 발표됐다. 이어 <굴뚝 밑의 유산>(1959), <기상도>(1961) 등을 발표하고, 1961년 <너는 뭐냐>로 제6회 동인문학상 후보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활동은 1965년 <현대문학> 3월호에 <분지>를 발표하면서 ‘본 모습’이 드러났고, 결국 필화를 당했다. 이 <분지>는 곧 남정현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질 정도로 그의 대표작이다. 제목부터 ‘똥같은 땅’이라는 이 소설은 서간문체로, 반어법과 풍자로 쓰여졌지만 노골적인 ‘반미소설’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현대문학> 3월호에 실린 <분지>는 처음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북한 매체가 이를 인용해 실으면서 사달이 났다. 남산의 안기부로 끌려가 두들겨 맞고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것이다. 이 사건은 작가가 반공법 위반으로 법정에 선 첫 사례였다. 이 사건이 언론과 문인들에게 관심을 끈 것도 그 때문이다.

반공법 위반으로 법정에 선 첫 작가

당시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반미감정을 어째서 불법으로 속단할 수 있는가. …북괴가 반미한다고 하여 대한민국 국민이 반미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논법이 선다면 지금 한창 반미노선을 걷고 있는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을 추켜올려도 북괴 동조라는 삼단논법이 성립되지 않는가”라고 썼다. 당시 정부를 비판하는 원고를 실었던 <조선일보> 남재희 문화부장과 문학평론가 백낙청도 남산으로 끌려가 고초를 받았다.

소설가 남정현이 지난 6월 26일 대학로에서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도서출판 말 제공

소설가 남정현이 지난 6월 26일 대학로에서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도서출판 말 제공

왜 그렇게 미국을 싫어하나. 무슨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나.

“국민의 힘으로 이승만을 때려 엎었는데, 이 4·19 학생혁명을 뒤집은 사람이 박정희다. 미국이 박정희 쿠데타를 용인하고 우리는 미국에 예속됐으니, …작전권 없는 군대가 어디 있나.”

그랬다. 그의 반미감정은 5·16 쿠테타를 용인하고, 박 정권을 승인한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소설가 전숙희로부터 여비를 받아 소설가 이호철과 함께 미국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는 “높은 계곡에 아슬아슬하게 가설된 미국 철도를 보며 침목 하나하나가 흑인의 시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미 여류작가의 소개로 미국 육사를 방문해 사열까지 받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50년 전 <분지>나 이후 소설이 편지나 풍자·우화 형식으로 쓰인 이유는 무엇인가.

“글에는 그 시대 진실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글로써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화를 입어. 그래서 자연스럽게 스타일이 풍자와 해학이 됐다. 직설법으로 얘기하기는 어려운 시대였으니. 대놓고 ‘미국 나가라’ 이렇게 쓰기는 어렵잖아.(하~하~하)”

결국 그는 유신시대인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다시 투옥됐다. 긴급조치 1호 위반이었다. 그는 “대학에 강연하러 다녔을 뿐인데, 대학생 배후로 엮었다”면서 “필화사건 때는 많이 맞지 않았는데 이때 많이 맞았다”고 말했다. 그는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으로 온몸이 파랗게 멍든 사람을 봤다. 그는 나중에 “파란 잉크통 속에 담갔다가 며칠 지나 꺼낸 것 같았다. 사람을 저렇게 만든 사람과 같이 인간으로 불린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다”고 쓰기도 했다. 그는 고문으로 까무라쳐 병원에 실려가는 등 5개월여 남산과 서대문구치소를 오가다 74년 8월 긴급조치 1호가 해제되면서 겨우 풀려났다.

이번에 한 권으로 엮은 대표작 3편 <분지> <신사고> <편지한통>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반핵과 반미를 통한 한반도 평화다. 이 주제는 그의 문학 50년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글을 쓰지 못하지만, 혹 기회가 된다면 쓰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그는 “전 세계가 봉쇄하고 압박하는데, 북이 핵무기를 만들었다, 상상이 되나?”라고 반문하면서 “세계 석학들도 설명하지 못하는 그 문제, 북한이 어떻게 저렇게 존재하는가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글은 낮은 사람들이나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로 공자도 자기 사상을 자기가 쓰지 않았고, 예수도 복음서를 모두 제자가 썼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부처도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높은 사람(성인)은 글을 쓰지 않고 낮은 사람이나 글을 쓴다는 것이다. 새까만 후배 앉혀놓고 유쾌한 농담을 하는 것을 보면 그는 천생 해학가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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