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여소리, 세상 슬픔을 위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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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나무’가 제작한 <한반도의 슬픈 소리>, 이 음반에 수록된 진도 상여소리의 한 대목 ‘혼맞이 노래’. 김대례, 조공례, 박병천 등이 부르고 연주하는 이 노래만큼 세상의 모든 슬픔을 위로하는 음악이 어디 있으랴.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은 70년대 구로공단을 시작으로 오늘의 구로 디지털밸리를 거쳐 동남아 여러 곳의 여성노동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그 내용의 절실함과 애틋함은 두루 확인되었거니와 최근에 이 작품을 다시 보면서, 나는 특히 그 형식에 집중해 보았다. 이 다큐멘터리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았는데, 이 95분짜리 다큐멘터리가 다른 장르가 아닌 국제 ‘미술’ 비엔날레에서 큰 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오늘날 예술의 형식과 범위가 얼마나 다양하게 확장되고 겹쳐지는지를 시사한다.

내가 주목한 것은 이 작품 군데군데에 펼쳐지는 제의적인 장치들, 조금은 분명하게 말하자면 샤머니즘적인 연출이다. 박찬욱/박찬경의 프로젝트 팀 ‘파킹찬스’가 만든 서울시 다큐멘터리 <고진감래>의 장중한 도입부도 한강을 가로지르는 무속적인 퍼포먼스다. <지슬>은 또 어떠한가. 제주도의 슬픈 현대사를, 그 눈물을, 그 죽음을 재조명한 이 영화에서도 오멸 감독은 억울하게 죽어간 자들을 위하여 흑백필름으로 위령제를 올린다. 내가 <위로공단>의 제의적 장치들에 주목한 것은 일련의 이러한 흔적들이 갖는, 즉 전통의 어떤 것이 대단히 파격적인 메시지로 전화되는 순간 때문이다.

임흥순 감독이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질서 속의 여성노동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위로공단」의 한 장면. / 경향신문 자료사진

임흥순 감독이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질서 속의 여성노동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위로공단」의 한 장면. / 경향신문 자료사진

<병신과 머저리>라는 뼈아픈 소설 제목

“깨어나 보니 우리는 원주민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을 출간하기 바로 전 해에, 그러니까 1977년에 한국의 소설가 최인훈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의 지식인이 겪어내야 했던 참혹한 자기 부정과 환멸을 응축한 소설 <회색인>의 한 대목에서 이렇게 썼다. 이 자기 모멸적인 선언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 사람들이 치른 세계사적 격변의 잔인한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냉전체제는 전통사회와의 급격한 단절, 익숙한 마을공동체와의 냉혹한 작별, 오랜 인간관계의 파탄, 가치 판단과 행위 규범의 혼란, 자기 부정과 자기 혐오의 재생산의 연속이었다.

최인훈과 더불어 냉전 이후 한국 지식인의 정신적 불안을 집중적으로 다뤄온 소설가 이청준이 전쟁을 직접 경험한 자와 그것을 간접적으로 목격한 자의 고뇌를 다룬 단편소설의 제목을 <병신과 머저리>라고 한 것은 뼈아프다. 또한 그가 다른 소설들에서 “너는 어느 편이냐”고 거듭 쓴 것은 어린 시절 한국전쟁 때 온가족이 함께 겪은 살벌한 순간의 고통스런 변주곡이다. 깊은 밤에 갑자기 들이닥친 무장한 청년들이 전짓불을 들이대며 묻는다. “너는 어느 편이냐?” 전짓불 때문에 상대방이 누군지, 빨치산인지, 경찰인지, 북한군인지, 남한군인지 분간할 수 없다.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어김없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이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에 의하여 갑자기 세계 지도의 한복판에 노출되면서 한국 사회는 ‘깨어나 보니 원주민’이 되었고, 2차 대전 이후 강대국끼리의 대혼란이 아슬아슬한 적대적 균형을 잡기 위해 벌인 한국전쟁에 의하여 ‘병신과 머저리’가 되었다.

아니, 말을 하되(어찌하여 말조차 할 수 없단 말인가) 우회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직설의 리얼리즘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복화술이나 은유가 우회로를 따라 전개되었다.

우리는 ‘원주민’이었기 때문에 폴 비릴리오가 말하는 ‘전쟁과 영화의 마술적 스펙터클’, 즉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화면은 우리의 언어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러한 스펙터클은 오카 마리가 <기억, 서사>에서 지적했듯이 “사건을 완결된 서사로 리얼하게 재현하고 싶어하는 스필버그의 욕망은 타자가 당한 폭력을 부인하고 망각”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대신 샤머니즘 장치 같은 우회로를 선택했다.

전쟁과 냉전을 ‘스펙터클’로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우회로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비록 직설의 언어가 차단된 상황의 결과들이지만, 우회적인 언어는 직설의 언어가 담지 못할 다층적인 발화와 해석을 더 많이 내장할 수 있었다.

특히 어린 시절에 전쟁을 겪었고 그 이후 냉전의 가혹한 정글에서 살았던 한국의 소설가들이 직설의 리얼리즘 대신 선택한 다양한 우회적 방법은 파블로 네루다가 말한 “야만의 정복자들의 군화 밑바닥에 박혀 있던 조약돌”을 찾는 일이기도 했다. 서구의 시선, 서구의 언어, 서구의 방법이 아니라 제3세계의 으깨지지 않은 ‘조약돌’, 즉 전통적인 사유와 신화와 화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이 우회적인 방식은 ‘오리엔탈리즘’의 극복까지 보여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윤흥길의 <장마>다.

샤머니즘으로 한을 풀어낸 소설 <장마>

“가야 헐 디가 보통 먼 질이 아닌디 여그서 이러고 충그리고만 있어서야 되겄능가. 자꼬 이러면은 못쓰네, 못써. 자네 심정은 내 짐작을 허겄네만 집안식구덜 생각도 혀야지. 자네 노친 양반께서 자네가 이러고 있는 꼴을 보면 얼매나 가슴이 미어지겄능가.”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의 장마철. 서울에 사는 외할머니 가족이 소년 동만의 시골집으로 피난을 온다. 순철(삼촌)은 붉은 완장을 차고 활동하다가 산으로 들어간다. 길준(외삼촌)은 국군에 입대했다가 전사한다. 이에 가족들이 쓰러지고 외할머니는 번개 치는 하늘에 대고 ‘뿔갱이’들을 전부 쓸어내라고 소리친다. 두 집안의 사이가 벌어진다.

할머니는 순철이 꼭 살아있을 거라 믿는다. 마을 무당이 순철이가 돌아올 날을 알려주고 할머니는 정성스레 잔치를 준비한다. 잔치가 끝나도 순철은 돌아오지 않고 대신 구렁이 한 마리가 집으로 들어온다. 죽은 자의 원혼이 구렁이가 되어 나타난다는 민간신앙 때문에 할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갈등하던 외할머니가 위에 인용하였듯, 구렁이를 삼촌인 양 극진히 대접하고 달래면서 돌려보낸다. 두 노인은 서로 화해하고, 이윽고 장마는 끝이 난다.

“자네 오면 줄라고 노친께서 여러 날 들어 장만헌 것일세. 먹지는 못헐망정 눈요구라도 허고 가소. 다아 자네 노친 정성 아닌가. 내가 자네를 쫓을라고 이러는 건 아니네. 그것만은 자네도 알어야 되네. 냄새가 나드라도 너무 섭섭타 생각 말고, 집안 일일랑 아모 걱정 말고 머언 걸음 부데 펜안히 가소.”

윤흥길은 전쟁의 원인과 분단의 상흔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는 가혹한 공안통치의 조건에서 샤머니즘이라는 장치를 통하여 그 원과 한을 풀어낸다. 이럴 때 샤머니즘은 우회가 아니라 차라리 절실한 직설의 언어다. 같은 맥락에서 <지슬>과 <고진감래>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위로공단>에서 이 전통의 제의적 장치들은 오히려 과감한 실험으로까지 느껴질 정도로 강렬하다. 이 작품들은 ‘당대의 문제’를 직시하고 있다. 그저 ‘전통의 현대화’ 같은 맥빠진 소리가 아니라 어떤 절실한 문제의 획기적인 재현과 문맥을 위해 과감하게 선택한 제의적 요소와 샤머니즘적 퍼포먼스가 상당한 미학적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꺼내 들어본다. ‘뿌리깊은나무’가 제작한 <한반도의 슬픈 소리>, 이 음반에 수록된 진도 상여소리의 한 대목 ‘혼맞이 노래’. 김대례, 조공례, 박병천 등이 부르고 연주하는 이 노래만큼 세상의 모든 슬픔을 위로하는 음악이 어디 있으랴. 슬픔의 극한에서 형성된 음악은 시공간을 달리한다 해도, 또 다른 상처와 죽음의 순간에 전혀 다른 힘으로 강렬하게 재현된다.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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