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제작 영화감독 이준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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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거리보다 생각할 영화 만드는 ‘역사적’ 감독

현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박열이라는 인물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일왕을 폭살시킬 기개를 가졌고, 무려 22년 2개월간 감옥에서 투쟁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열은 일본 여성과의 옥중 결혼으로 일본 열도를 열광시킨 국제적 ‘로맨스’까지 가졌다.

이석우 기자

이석우 기자

박열은 충분히 영화 소재가 될 현대사의 걸출한 인물이었지만 그는 조금 ‘껄끄러운’ 존재였다. 무정부주의, 사회주의로 평생을 일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활동했던 상당수 인사는 공산주의자가 되기도 했다. 박열 자신도 6·25 때 납북돼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했고, 1974년 사망해 북한 혁명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그런 말년 때문에 박열은 뚜렷한 항일투쟁 경력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인색한 평가를 받았다.

여전히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를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는 ‘몽매한’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1989년 비로소 박열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됨으로써 남·북에서 제 위치를 찾았지만 그를 ‘대중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6월 28일 영화 <박열>이 개봉됐다. 세상이 ‘거꾸로’ 가 평화통일 얘기만 해도 종북으로 매도되는 분위기에서 이 영화를 만든 것은 대단한 용기다. 바로 이준익 감독(58)이 그 주인공이다. 기자가 “박열을 영화화한 이 감독은 연구 대상”이라고 하자 그는 “박열을 연구해야지 왜 나를 연구하느냐”며 웃었다.

-왜 박열인가. 박열이라는 사람, 어디에서 매력을 느꼈나.

“20년 전 <아나키스트>를 찍을 때 독립운동사 안에 다양한 사람을 공부했다. 제국주의 본산인 도쿄를 중심으로 움직인 항일운동가 박열을 본 순간, 야~ 불과 20대 초반 나이에 저렇게 논리·이성적으로 일본 대법정에서 싸웠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21살에 박열을 만나 23살에 죽은 가네코 후미코는 더한 여자다. 나는 ‘저렇게 당당한 근대여성을 아시아에서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해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자료도 부족하고, 나의 역사관도 정립이 안돼 있고, 영화적 솜씨도 모자라고…. 그렇게 20년 기량을 쌓은 후 <동주>를 시도해 성과가 있으면, <박열>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동주>가 성공을 하자, 바로 <박열>을 만들었다.”

그는 “<박열>은 스펙터클이 없는 법정과 감옥투쟁이 소재라서 상업성을 목표로 하기에는 불리한, 생각할 거리만 많은 영화”라고 말했다. 사실 <박열>보다 <동주>는 더 상업성이 없는 영화였다. 그는 “시인이 무슨 영상거리가 있나, 시집을 읽으면 됐지…”라고 토로했다. <동주>의 성공은 적은 투자(불과 5억원으로 19회차만에 촬영)로 흥행에 성공했다는 외형적 성과만이 아니다. 그가 <동주>에서 확인한 것은 우리 관객이 ‘볼 거리 없고 생각할 거리만 있는’ 영화를 기꺼이 돈을 내고 본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우리 관객의 높아진 수준을 확인한 ‘희열’이다. <박열> 역시 6주(24회차) 만에 26억원이라는 저렴한 비용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부인 가네코 후미코가 만나는 영화의 한 장면. / 영화사 하늘 제공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부인 가네코 후미코가 만나는 영화의 한 장면. / 영화사 하늘 제공

-박열은 아무래도 다루기 예민한 소재였지 않았나.

“그런 점이 있다. 전 세계에서 한반도에만 남은 냉전 이데올로기가 있다.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프레임으로 일제강점기까지도 편가르기를 했다. 나는 이런 것이 70년간 이어온 일종의 식민지 프레임이라고 본다. 박열은 노태우 때 서훈을 받아 검증이 끝났다. 북한에서의 활동도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남북평화와 관련된 활동이다. 과거의 일부 흔적에 의해 박열이 젊은 시절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투쟁했던 가치마저 소홀히 다루는 것은 분단 프레임이나 식민지 프레임에 가두어진 시선 아닌가.”

2017년 우리는 박열만큼 뜨겁게 사는가

영화감독과 대화에서 ‘식민지 프레임’이나 ‘분단 프레임’이라는 용어가 거침없이 등장하는 것은 의외다. 바로 얼마 전 박근혜 정권이라면 종북몰이감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는 “영화를 다 찍고 나서 보니 탄핵이 되어 있더라”면서 웃었다. 박근혜 정권에서 이 영화를 제작한 것은 대단한 용기다. 특히 박근혜 정권이 영화계에 벌인 ‘만행’이 한둘인가. 상영관을 축소시키고, 국제영화제를 망가뜨리고, 심지어 영화 제작에 투자한 기업 부회장을 사퇴시키려 청와대가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업계에서는 이런 실상을 뻔히 절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그는 “표현의 자유가 있고, 거기에 크게 저촉이 되지 않는다면 뭐가 걱정인가”라고 반문했다. ‘간 큰’ 감독인가, 아님 어디 믿는 구석이 있는가. 그 역시 문재인 지지서명으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블랙리스트를 만든 사람, 당시 제 딴에는 대단한 정치적 성과라고 했겠지만 그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국민들은 다 알고 있어 그 영향은 대단히 미미하다. 역사의 흐름이나 세상의 이치는 한두 명의 조작된 의지로 바꿀 수 없다. 대한민국 역사, 아니 몇천 년 역사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히려 문화인의 각성을 일깨우는 순기능도 있다. 문화인은 탄압받지 않으면 각성하지 않는다.”

이 감독은 얄미울 정도로 대답에 막힘이 없다. 게다가 의외로 솔직했다. 미리 준비됐던 보도자료에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2017년 우리는 박열만큼 뜨겁게 사는가라는 박열과 같은 저항정신을 말하려고 했다’고 돼 있다. 기자가 ‘제작 의도를 이렇게 써도 되냐’고 묻자 “그것은 요즘 영화관객이 젊은층이니까, 청춘 어쩌구 붙여 젊은층에게 자극적인 정보를 제공하려는 수식어”라며 “그보다 박열이 지향하려 했던 세계관,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금 의외다. 스태프들이 공들여 만든 보도자료지만 그는 자신만이 가진 박열에 대한 소신을 강조했다. 게다가 그는 “보도자료는 흥행에 역할이 있는 것이고, 감독이 흥행까지 뭐…(하~하)”라고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흥행을 고민하지 않는 감독이 어디 있을까. 자신감인가?

사실 이 감독과 대화에서 영화 얘기보다 역사 얘기가 더 많았다. 그는 근·현대사에 관해 놀라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는 특히 “우리는 ‘근대’를 조선말 능동적인 민중의 자각을 거세당한 채 피동적으로 수혈받았다”며 “일제 식민지 역사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역사를 국가주의나 민족주의 안에서 해석하면 그 자체가 오류일 수밖에 없다”면서 “미래의 가치는 탈국가·탈민족이라는 것은 서구 인류학자들은 다 안다”고 말했다.

그는 한참 우리 근·현대사 얘기를 하다 프랑스혁명 얘기를 하고, 다시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 문화인류학을 언급하는 등 종횡무진이다. 그가 말하는 역사관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는 나름 정리된 과거·현재·미래의 안목을 가졌다. 무엇보다 역사의 순기능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음이 엿보였다. 자주 식민지 프레임, 분단 프레임을 깨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영화를 찍다가 역사를 깨우쳐

이석우 기자

이석우 기자

기자의 ‘역사를 따로 공부했나’라는 질문에 그는 “영화를 찍다가 깨우친 것”이라고 말했다. <황산벌> <평양성> <사도> <왕의 남자> 등 역사물을 해보니 현재는 어느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몇백 년 전부터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퍼즐을 맞추다 보면 역사의 맥락에서 어떤 지향점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과거 <아나키스트>나 지금 <박열>, 앞으로 만들 영화 <정률성>(정률성은 1914년 전남 광주 출신으로 1930년대 중국으로 건너가 음악을 공부하다가 마오쩌둥 등 중국 혁명가들과 대장정을 같이하면서 <옌안송>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 등을 작곡했다. 해방 후 북한으로 가 <조선해방행진곡> 등을 작곡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생을 마친 인물이다. 아직 대한민국에서 서훈을 받지 못했다)에서 보듯이 분단 프레임에서 정당히 평가받지 못한 진보적인 인물이 주제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세상의 모든 창작자는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많은 철학·예술가들이 정의해 놓은 것이다.(하~하~) 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니까. 창작자가 진보적이지 않다면 장식가일 뿐이다. 권력가에게 좋은 그림을 그려주고, 맘에 드는 연주를 하는 장식가다. 없는 것을 만드는 창조자는 당연히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현실을 비판해야 하는 기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기자도 진보적이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진보성은 정치적 성향이 아니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이 진보적이어야 하는 것은 운명이다.”

-<동주>에서 윤동주보다 고종사촌 송몽규를 발굴한 것은 현대사에 웬만한 내공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윤동주 평전>을 보면 다 나온다. 모든 인간은 혼자 세상을 살지 않는다. 송몽규를 빼고 윤동주를 설명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윤동주의 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송몽규를 모르는 것은 그 시인의 삶과 죽음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윤동주를 사랑한 자신을 사랑한 것이지, 윤동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윤동주의 껍데기를 사랑한 것이다.(하~하)”

-<박열>에서 1920년대 신문을 찾아내고, 당시 박열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서적까지 디테일하게 복원했다. 이것은 영화라기보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 기록이다. 원래 그렇게 꼼꼼한가.

“아니다. 내가 꼼꼼한 것이 아니라 스태프들이 꼼꼼한 것이다. 시나리오는 작가가 고증하는 것이고, 의상은 의상·미술감독, 그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이다. 감독이 어떻게 다하나.”

이준익 감독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동고를 나와 세종대 미대에 진학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그림을 잘 그렸다. 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아니 미대를 계속 다닐 돈이 없어 3학년 2학기를 다니다 그만뒀다. 그리고 곧장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20대 초반 학벌도 없고 빽도 없는 상태에서 돈벌이라는 것은 이 일 저 일 잡일뿐 아니겠나, 그런 일 다했다”고 말했다.

영화판에 뛰어든 그는 영화포스터 붙이는 마케팅부터 배웠다. 돈도 좀 벌었다. 그러나 외화 수입을 하다 망했다. 그는 “나는 두서없이 일을 벌이는 얼치기 청년으로 영어도 모르면서 외국 다니면서 외국영화를 수입했다”면서 “수입한 영화가 펑펑 깨지고 빚만 100억원이나 됐다”고 말했다. 남이 만든 제품(영화)을 팔다 자신이 직접 제품을 만들기로 했다. 영화감독이 된 이유에 대해 “기자도 오래 하다 보면 신문사 차려 자신만의 정론을 펼쳐보고 싶지 않나”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그래도 영화를 만들어 빚을 다 갚아 지금 가진 재산은 ‘서민 기자’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진 영상을 계속 만들 계획이다.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생각’은 변하게 마련이라고 했다. 살아있는 존재는 변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생각이 어디로 갈지는 아직 자신도 모른다. 그는 “지금 자각하는 현실에 충실하다 보면 영화로 나타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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