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에게는 칼 오르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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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오르프의 대표작이 ‘카르미나 부라나’가 포함된 칸타타 <트리온피>(3부작)이다. 원시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건강한 남녀들이 영웅적 행동을 하는 이 작품은 히틀러의 문화정책과 미학적으로 결합되었다.

한스 제들마이어는 20세기 유럽 문화가 처한 상황에 대해 ‘중심의 상실’이라고 표현했다. 2차 대전 전후는 가히 모든 중심이 상실된 시대였다.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는 제들마이어의 낭만적(혹은 고전회귀의) 향수는 두 차례의 대전으로 괴멸했다.

1차 대전의 포화 속에서 학도지원병 파울 보이머는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공허한 메아리 속에서 한 줌의 잿더미로 변해가는 참상을 지켜본다. 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파울 보이머는 결코 ‘신의 형상’과는 거리가 먼 참혹한 소년병이었다. 화가 오토 딕스는 바로 이 서부전선에 투입된 병사였다. 1914년 8월에 한 차례 징집된 바 있고, 이듬해 9월에는 자원해서 서부전선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애국의 화신’이나 ‘신의 형상’을 한 인간이 아니라 극한상황에 내몰린 파탄 직전의 인간이었다. 그는 <전장 일기>에서 “이, 쥐, 철조망, 벼룩, 유탄, 폭탄, 구멍, 사체, 피, 포화, 술, 고양이, 독가스, 캐넌포, 똥, 포탄, 박격포, 사격, 칼, 이것이 전쟁! 모두 악마의 짓거리!”라고 썼다. 그리고 그것을 격렬한 화폭에 담았다. 그의 그림 속에서 인간은 팔다리가 잘려나간 해골일 뿐이다.

이러한 ‘중심의 상실’을 본 제들마이어는 그러나 다시 ‘중심의 회복’을 상상했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중심의 회복은 정치적로는 히틀러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히틀러 파시즘이 오토 딕스의 그림을 이른바 ‘퇴폐 미술’로 간주하고 이를 1937년의 전시회에 내걸었는데, 그것은 딕스가 인간의 나약함과 추악함을 그렸기 때문이다. 물론 제들마이어는 나치당에 가입하긴 했지만 히틀러 문화정책을 주도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한계상황에 봉착하고 파멸의 직전에 이르러 인간이 한낱 벌레처럼 처분당하는 전쟁의 상황에서 ‘중심의 상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영원성의 추구나 유럽 전통정신의 회복을 꿈꾼 것은 정신적으로 히틀러와 연결되는 것이다.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공연 장면.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공연 장면.

파시즘 문화 정책을 실시했던 히틀러

그러니까 히틀러는 ‘중심’을 세우기 위해 강력한 파시즘 문화 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선전장관 괴벨스는 ‘바이마르 정신을 침몰시켜야 한다’는 유명한 심야연설을 통해 ‘독일 정신’에 위배되는 서책의 화형식을 거행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른바 ‘독일 정신’을 구현하는 ‘건강한’ 예술이었다.

‘건강’하지 않은 예술은 중심을 교란시키는, 퇴폐적인 예술이 되었다. 딕스, 베크만, 코코슈카의 일그러진 형상이 나란히 놓인 결함 많은 세계라고 강변한 것이었다. 파울 클레나 오토 딕스 같은 사람들이 학교에서 쫓겨났고 그들의 작품과 함께 에밀 놀데, 막스 베크만 등의 작품들 그리고 독일 미술계 바깥의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같은 작가의 작품도 독일 전역의 미술관에서 대거 압수되어 ‘퇴폐 미술전’의 목록이 되었다.

그렇다면 ‘중심’은 어떻게 재현되었는가. 히틀러의 다큐멘터리 감독 레니 리펜슈탈은 독일인의 ‘강건한 육체’와 그들의 ‘고대 신화’를 전쟁상황 아래에 펼쳐놓았다. 나치 전당대회를 다룬 <의지의 승리>와 베를린올림픽을 다룬 <올림피아>는 히틀러 시대의 광기어린 순혈주의를 증거한다.

1937년 7월 18일. 히틀러는 뮌헨의 독일 예술의 전당에서 행한 라디오 연설을 통해 일부 화가들과 그 작품을 ‘타락한 정신’이라고 비난했다. 전국으로 생중계된 이 라디오 연설을 듣고 바로 다음 날 막스 베크만은 가방 하나만 들고 국경을 넘어 네덜란드로 망명을 떠났다.

빌헬름 라이히는 ‘억압된 성’과 ‘가부장적 권위주의 통치’라는 개념으로 이 시대의 증후, 즉 권력과 성의 결합관계를 밝혔다. 극심한 경제위기와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면 나약한 ‘개인’은 최고의 권력자, 즉 히틀러 총통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며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 총통을 무한한 감정으로 승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감정은 권력과 개인의 성적인 감정으로까지 이어진다. 히틀러에 부응한 미술가와 조각가가 강건한 육체의 남녀를 장대한 크기로 재현했던 것은 이런 맥락이다.

이 현상은 히틀러 시대만이 아니라 20세기 곳곳의 여러 독재 상황에서 반복되었다. 스탈린 시대의 건장한 러시아인이 그렇고, 우리의 경우에도 박정희 독재체제나 김일성 체제 모두 강건한 남녀가 ‘민족’을 위하여 기립하는 형상을 세웠다. 이들은 모두 ‘순혈주의’를 강조하였고, 대중들에게 제복을 입혔으며, 군 연병장이 아닌 곳에서 사열식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때에 어떤 음악이 울려퍼질 것인가. 히틀러에게는 칼 오르프가 있었다. 바이에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오르프는 어려서부터 음악과 철학, 신학 등을 공부하였다. 15세 되던 1911년에는 여러 개의 성악곡을 작곡, 출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1914년에 뮌헨의 음악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는 곧장 독일 각지의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자로 일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입증하였다. 그는 복잡하고 기괴한 쇤베르크 식의 ‘파괴적인 양식’ 대신 형식적 단순성과 내용적 민족주의의 비장한 음악을 추구하였다.

대위법적 수사학을 완전히 배제한 음악

그 대표작이 ‘카르미나 부라나’가 포함된 칸타타 <트리온피>(3부작)이다. ‘카르미나 부라나’, ‘카툴리 카르미나’, ‘아프로디테의 승리’ 등으로 구성된 3부작을 통해 오르프는 대위법적 수사학을 완전히 배제하고 단선율을 적극적으로 선택하여 철저하게 단순성을 추구한 음악을 만들었다. 1936년에 작곡되고 그 이듬해에 프랑크푸르트 가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그때는 히틀러가 독일 전역에서 이른바 ‘퇴폐 예술’을 박멸하던 상황이었다.

이 작품은 지극히 독일적인, 독일의 민속성과 사랑과 영웅주의가 교직된, 독일인의 작품이다. 오르프는 이 작품에서 각 성악 파트와 대규모 합창단 및 관현악단을 동원하여 특정 주제나 악구의 반복, 무반주로 배치된 독창부의 내레이션, 그레고리언 성가를 연상시키는 기본 화음에 의한 전개 등을 통해 단순 명쾌하고 반복 확산되는 압도적인 세계를 구현했다. 원시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건강한 남녀들이 영웅적 행동을 하는 이 작품은 히틀러의 문화정책과 미학적으로 결합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오르프는 자신이 히틀러 문화정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압록강은 흐른다>로 유명한 이미륵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히틀러에 저항하여 싸웠던 뮌헨대 학생들이 체포의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밀고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고도 한다. 그나마 한 가지 교훈이자 위안이라면, 히틀러 몰락 이후 오르프는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스스로 자제하고 최소한의 음악교육자 위치에 머물렀다는 점이며, 그의 호쾌한 음악 역시 오늘날에는 파시즘의 징후로 들려오기보다는 역사물 영화나 신제품 광고 배경음악으로 들려올 뿐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현대의 복잡한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존재하는 국가가 자신들의 정치적·사회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오래전의 전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작은 사실들을 확대하여 엄청난 위용의 영웅 신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20세기 국가, 특히 전체주의 국가의 일반적 양상이다. 그 과정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은 ‘순박한 누이’나 ‘어머니의 모성애’로만 정형화되며, 남성은 위대한 ‘민족 역사’의 정신적 구현자가 되도록 요구받는다. 그와 어울리지 않는 여성이나 남성은 ‘순수함’과 ‘위대함’을 결여한 인간으로, 그러니까 ‘중심을 상실’한 인간으로 자칫 매도되기도 한다. 최근의 상고사 논쟁, ‘환빠’ 논쟁, 저 만주 벌판은 물론이고 중국을 지나 유라시아 일대에 걸쳐 고대의 ‘한국인’과 그 문화가 널리 널리 퍼져 있었다는 신드롬이 위험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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