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재 부원장 이광재… 초야에서 시대를 바꾸겠다는 무서운 실용·진보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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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재 여시재 총괄부원장(52)은 초야 아닌 초야에 묻혀 있다. 그는 북악산 뒤편 부암동 숲속에서 먹을 갈아 붓글씨를 쓰며 전통한옥에서 회의를 하는 외형으로 보면 초야에 묻힌 생활을 한다. 전통한옥에는 엄격한 급수가 있다. 왕이 거주하는 전(殿)에서 당(堂·전보다 한 단계 낮은 집회공간)-합·각(閤·閣)을 거쳐 재(齋·궁궐을 보좌하는 사람의 기거공간)-헌(軒)-루(樓)-정(亭) 순이다.

그와 연구원들이 일하는 여시재(與時齋)는 ‘시대와 함께하는 집’이라는 의미이고, 이사들이 모여 회의하는 ‘대화당’(大化堂)은 ‘큰 변화를 일으키는 집’이라는 의미다. 결국 ‘재’와 ‘당’의 건물 작명에서도 ‘시대를 바꾸겠다’는 매우 치밀한 의도가 엿보인다. 겉으로는 초야에 묻혀 있지만 시대를 바꾸겠다는 ‘무서운 의지’를 품고 있는 것이다.

통일 한국 준비 새로운 헌법 연구

대통령 선거 다음날인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탄생한 날 이 부원장을 만났다. 이 부원장과 문 대통령은 2003년 국정상황실장과 민정수석으로 같이 청와대에서 근무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우광재 좌희정’이랄 정도로 그는 ‘실세’였다. 게다가 이 부원장은 당시 정치신인 문 수석보다 훨씬 ‘정치적 짬밥’이 오래됐다.

“이번 대선 결과를 보고 세 가지를 생각했다. 첫 번째는 10년 만의 정권교체인데 정말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유승민·안철수와 같은 중도보수를 길게 보고 넉넉한 마음으로 키워줬으면 우리가 진일보할 수 있었는데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는 문 대통령에게 닥친 과제들이 엄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박민규 선임기자

/ 박민규 선임기자

이 부원장은 인생에서 결심을 밝힌 것이 세 번 있었다고 한다. 결혼할 때 아내로부터 ‘당신 인생의 목표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일가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첫 번째 결심이다. 두 번째 결심은 1992년 노무현을 만나 스물일곱에 ‘이 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결국 이 일을 성취했고, 좌절도 있었다. 그 후 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리고 “통일된 한반도의 주민이 되고,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아시아인이 되는 것을 인생 목표로 세웠다”고 말했다. 그는 여시재가 하는 프로젝트 세 가지를 꼽았다.

“첫 번째는 통일된 한국을 준비하는 것이다. 미국의 연방제를 넘어서는 헌법, 남북한을 관통하는 새로운 헌법을 연구한다. 또 앞으로 뭘 먹고 살 것인가 하는 미래산업을 연구한다. 두 번째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실제적 경제협력과 이곳의 지도자를 어떻게 네트워크화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다. 세 번째는 앞으로 새로운 문명이 만들어 낼 미래도시를 설계하는 것이다.”

이 부원장은 문재인 정부가 당면한 ‘엄중한 과제’는 바로 통일문제를 푸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럽의 독일 같은 나라가 되기 위해선 먼저 통일문제를 풀어야 한다”면서 “전쟁의 위기와 공포에서 벗어나야 미래와 희망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 부원장과의 대화가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근 20년 전부터 서로 알던 처지여서 대화는 편안했다. 첫째, 둘째 등으로 말을 논리적으로 요약하는 그의 버릇은 여전했다. 게다가 그의 사무실 벽은 온통 큰 종이에 각종 아이디어를 큼지막하게 적은 차트로 가득찼다. 끊임없이 새로운 무엇을 구상하는 그는 자타가 일아주는 ‘기획통’이었다.

-이번 대선은 유례 없이 통일논의 없는 대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재인 후보마저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시골에 계신 아버님이 ‘이번 대선 답답하다’며 전화했다. 내가 ‘왜 그러시냐’고 하니 아버지는 ‘이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통일문제인데 왜 대통령 후보들이 통일 얘기를 하지 않냐, 통일 얘기 하면 빨갱이로 몰릴까봐 그런 모양인데 1971년 그 서슬 퍼런 시절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과감한 통일방안을 제기했다’고 말씀하시더라. 하~하~(그는 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현실이 암울해도 통일의 열망을 잃어버리면 안된다. 나는 곧 (통일논의가) 시작될 것으로 본다.”

-지난 대선 TV토론에서 이 부원장이 건전한 보수로 평가한 유승민 후보조차 ‘낡은 주적’을 강요했다.

“6·25전쟁이라는 참혹한 경험 때문에 그런 심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일 남부와 북부는 1000년 동안 한 번도 같은 나라이지 않았지만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이뤄냈다. 2차 대전으로 갈라져 있던 동·서독은 1990년 다시 통일을 이뤄내 지금 유럽을 끌고 나가는 나라가 됐다. 원대한 꿈을 가져야 한다. 5000만명의 섬나라(분단국)로 어떻게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겠나. 대한민국 보수의 큰 가치가 경제성장이라면 그 경제성장을 실제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이 통일이다.”

-여시재가 통일문제에 방점을 찍는데, 이헌재 이사장을 비롯해 안대희·김현종 등 이사진을 보면 보수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최근 홍석현 전 회장은 실용·진보적인 인물로 생각되지만.

“대부분 실용·진보적인 사람들이다. 북한을 돕는 NGO활동을 한 분도 있다. 사실 기업하는 사람이 가장 진보적일 수 있다. 기업인들은 북한을 기회로 보는데, 정치가 이것을 시스템화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 변혁기에 정작 주인공인 우리가 소외되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는 “미국 핵항모 칼빈슨호가 오고 전쟁 난다고 관광객이 급감하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국민은 큰 좌절감과 열패감을 느꼈다”면서 “중국도 북한과 미국의 협상 테이블을 만들려 하는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차세대 지도자를 향한 동북아포럼

이 위원장은 특히 통일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주변국 정치지도자들과의 네트워크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2002년 노무현 정부 인수위 시절, 북한에 갔다 온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노무현 당선자와 북한문제 얘기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또래의 중국·러시아 친구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미국·중국·러시아·일본의 정치 친구를 사귀기 시작해 13년 동안 적잖은 지도자급 인맥을 만들었다. 이 인맥을 묶는 공식 프로그램이 바로 동북아포럼이다. 지난해 11월 안희정 충남지사·남경필 경기지사·원희룡 제주지사, 김부겸·김영춘 의원 등과 첫 번째 동북아포럼을 가졌고, 올 11월에 더욱 확대한 2차 포럼을 준비 중이다. 그는 “왜 우리가 다보스 포럼에만 참석하는가”라며 “우리의 차세대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포럼도 하나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남북 경제교류와 통일헌법, 이를 국제적으로 담보할 주변국 정치지도자 포럼, 그가 주도면밀하게 추구하는 ‘그림’의 구도가 잡힌다. 그는 “7월 7일 G20 정상회의, 내년 2월 동계올림픽에 세계 정상이 다 온다”면서 “남북 정상회담을 ‘퍼주기’라는 남남갈등 없이 중재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도 생각해 봤고, 새로운 독일 대통령도 상상해 봤다”고 말했다. 그는 말끝을 약간 흐렸다. 기자가 “분명 이 부원장의 주특기인 모종의 기획을 하고 있지 않나”라고 따져 물었다. 이에 그는 ‘그렇다’고 시인도, ‘아니다’라고 부인도 안 했다. 분명 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해 획기적인 남북화해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다.

-적폐청산이 우선이냐, 협치가 우선이냐 논란이 있다. 원래 협치(거버넌스)란 정부와 민간의 업무협조를 얘기하는 말이다. 정치세력 간에는 연정이다. 이번 대선에서 대연정·소연정 논란이 계속됐다. 이 부원장도 대표적인 연정·협치주의자다.

“대연정이든 소연정이든, 연정 실험을 했으면 좋겠다. 적폐청산을 하려면 연정을 해야 한다. 전두환·노태우 사법처리하기 위해 3당이 합의한 적은 있지만, 협치를 제대로 할 때 적폐청산도 이뤄진다.”

-자유한국당과의 협치는 정치 가치의 혼돈뿐 아니라 책임정치에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

“헤게모니 이론을 들지 않더라도, 주(主)가 뭐냐가 중요하다. 장관 1~2명 준다고 정권이 바뀌는 게 아니다. 나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유가 있다’고 본다. 과거 DJP연정처럼 사람 중심 연정이 아닌 정책 중심 연정이 필요하다. 시스템과 정책을 믿자.”

-독일은 내각제에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해 다당제를 낳고, 그러다 보니 연정이 불가피한 구조다. 우리는 소선거구제에 대통령중심제다. 지금의 4당(다당구조)체제는 새누리당과 민주당 거대 양당에서 각각 분당한 기형적·일시적 구조일 뿐이다. 앞으로 이 다당체제가 계속 간다는 보장도 없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바른정당, 국민의당 존폐 얘기가 나온다. 선거제도와 권력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연정은 일시적인 화두일 뿐 아닐까.

“안철수 후보가 21.4%를 받은 것은 의미 있는 것이다. 물론 종국적으로 선거구제를 바꿔야 한다. 이번에 연정을 통해 신뢰를 얻는 징검다리가 돼야 한다고 본다. 협치의 구체적 방법으로 정무차관제를 도입해 국회와 전면적인 협력을 강화하고, 안보는 국회 내에 국제전략연구처를 만들어 세계를 면밀히 보면서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본다.”

이광재 부원장은 여시재 뒤편에 있는 대화당에서 매달 이사진과 함께 회의를 한다. / 박민규 선임기자

이광재 부원장은 여시재 뒤편에 있는 대화당에서 매달 이사진과 함께 회의를 한다. / 박민규 선임기자

평창올림픽 통해 획기적 이벤트 기획?

여시재는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이 출연한 300억원으로 시작됐다. 그는 조 명예회장과의 관계에 대해 “중국에서 누가 소개해 알게 됐다”면서 “조 명예회장의 학습량과 통찰력은 놀라울 정도이고, 이런 싱크탱크에 대해 고민을 오래한 분”이라고 말했다.

-이사진이 홍석현 전 회장과 가까운 사람이고, 연구 맥락이 최근 홍 전 회장이 강조하는 ‘리셋코리아’와 매우 유사하다. 소문에는 여시재는 홍 전 회장 대권캠프라는 얘기도 있다.

“돌아보면 알겠지만 이곳은 특정 정치인이나 개인을 위해 뭘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이사진 스펙트럼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여야를 떠나 정책 솔루션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참여정부에 공과가 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였고, 그 책임이 이 부원장에게 있다는 지적이 있다.

“(허~허) 그런 비난 많이 받았다. 이라크 파병 결정과 아마 한·미 FTA가 컸을 것이다. 물론 김현종 본부장은 내가 발탁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참여정부가 재벌개혁에 실패한 이유 중 하나가 이 부원장이 삼성과 연결 창구였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 부분에는 오해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삼성경제연구소와 일한 것은 1993년 지방자치연구소 때부터다. 당시 삼성경제연구소는 ‘정부혁신’ ‘강소국’ 등 정부혁신 관련 연구를 많이 했다. 그래서 내가 삼성경제연구소에 부탁해 한 달 만에 정부혁신에 대한 보고서를 받았다. 이것을 대통령과 진보적 인수위원에게 한 부씩 돌린 것, 그게 전부다. 딱 한 번이다. 그게 정상 아닌가.”

이 부원장은 20대에 세상을 크게 바꾸자는 이상을 추구한 적이 있다. 당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 대부분이 그랬다. 그 중에서 그는 ‘현실파’에 속했다. 그가 서울 창신동에서 야학을 할 때도 ‘학생들에게 노동의식을 일깨워야 한다’는 주장에도 그는 ‘당장 검정고시가 필요하니 국·영·수를 가르쳐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재야에 머물던 친구들이 ‘변절자’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노무현 보좌관으로 국회에 들어가는 ‘개량주의자’가 됐다.

세월이 흘러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지나며 남북문제는 극도로 보수화됐다. 지금 그는 진보진영에서 ‘금기시’하는 통일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분명 새로운 용기가 필요한 분야이고 상황이다. 그는 여전히 “통일문제는 보수나 진보의 낡은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다”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초야에 묻힌 척하지만 시대를 바꾸겠다는 무서운 생각을 가진 실용·진보주의자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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