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국회의원 배관공 이상규 “진정한 진보정치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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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의 특권은 헌법상 보장된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 말고도 무지하게 많다. 오래전 기자가 국회의원의 특권을 취재해 나열한 결과 40가지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특권, 즉 ‘권력의 맛’에 한 번 중독되면 헤어나지 못한다. 권력은 히로뽕이나 요즘 유행하는 프로포폴보다 중독성이 훨씬 강하다. 국회의원에서 떨어졌는데도 여의도 주변을 서성거리는 게 다 그런 이유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 모 건설회사가 짓는 주상복합아파트 단지 공사가 한창이다. 골조와 외장이 거의 완성된 건물 지하에서 스프링클러 배관공사를 하고 있다. 배관공 이씨는 능숙한 솜씨로 파이프머신에 파이프를 끼워 나사홈을 만든다. 그리고 리프트를 타고 4~5m 높이 천장에 스프링클러 설비를 조립한다. 지하의 어둠과 분진, 쇠를 깎는 파이프머신의 소음, 천장까지 올라가야 하는 위험 등 작업환경은 열악했다.

일당 15만원 받는 공사장 ‘이씨’

배관공 이씨는 바로 이상규 전 국회의원이다.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버스로 6시30분쯤 이곳 작업현장에 도착한다. 작업복을 입고 6시50분에는 체조를 시작으로 작업이 시작된다. 그나마 이곳은 집(신림동)에서 가까워 늦게 일어나지만 얼마 전까지 시내 명동에서 일할 때는 첫차인 4시50분 버스를 탔다. 그러려면 4시30분 전후에는 일어나야 했다.

“현장에 도착해 원청에서 하청업체까지 세 번 정도 공정회의를 통해 공지사항과 업무 배당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 팀(10명 정도)은 7시30분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12시부터 점심시간인데 분야별로 차등을 둬 최대한 빨리 먹고 쪽잠을 잔다. 1시부터 다시 일을 시작해 5시30분까지 이어진다. 하루 작업시작은 10시간이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전직 국회의원 배관공 이상규 “진정한 진보정치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작업은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8시간이 넘지만 보통 현장에서는 ‘포괄임금제’인 하루 얼마로 계약한다. 배관공의 경우 초보는 10개(현장에서 1만원을 ‘1개’로 부른다) 최고는 15개를 준다. 뛰어난 숙련공은 16개까지 받는다. 포괄임금제란 근로계약서에 시급 1만원(초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급 8000원 정도로 쳐 2시간 초과근로는 1.5배를 주는 것으로 계산해 최종 일당을 맞추는 방식이다.

그는 일당이 15개이니 최고 숙련공 수준이다. 게다가 요즘 그는 밤 8시까지 야근작업을 한다. 공수(일을 한 날짜)와 일당(개)을 곱하면 한 달 수입이 나온다. 이렇게 토요일까지 일해 받는 돈은 350여만원 수준이다. 그는 “복잡한 작업을 빼고 지금은 혼자 도면을 보고 어느 정도 작업을 할 수 있는 수준”이라며 “다른 팀에서는 13개나 14개 받았지만 이번에 팀 형님들이 좋아 15개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배관공은 무거운 쇠파이프를 가공해 천장에 매달려 잇고 용접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고되다. 속된 말로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면 며칠 버티기 어렵다. 그는 “현장에서 보면 일주일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나오지 않는다”면서 “여기 매일 나오는 분들은 매일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하루 일해 하루 먹고 사는 절박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이곳에서 그냥 ‘이씨’라 불린다. 이곳의 불문율은 일꾼들이 과거 뭐를 했는지 알려고 하지도, 또 알리지도 않는다. 나중에 알고 보면 전직 공무원도 있고, 돈 잘 벌던 사장도 있다. 그래도 얼굴이 많이 알려진 국회의원, 게다가 ‘권력의 맛’을 만끽했던 국회의원은 조금 다르긴 하다.

전직 국회의원의 노동현장 복귀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통합진보당 사무총장까지 역임한 김선동 의원이 의원직을 잃고, 플랜트배관공으로 노동현장에 복귀했다. 그때 주변 노동자들이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한 김선동이 현장에서 얼마나 버틸까 내기를 했다. 노동자들은 3달, 6달, 1년을 버틴다에 각각 내기를 걸었다. 김선동이 3개월 근무에 접어들자 3개월에 내기를 건 사람들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김선동은 그만두지 않았다. 다시 6개월에 접어들자 6개월에 내기를 건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김선동을 ‘갈구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선동은 6개월도 넘어섰다. 결국 내기는 1년 이상 버틴다에 건 사람이 이겼다고 한다.

다시 당원으로 대선에 참여할 준비

이 전 의원도 짧지만 2년 반 정도 ‘권력의 맛’을 본 사람이다. 기자가 “그때 달콤한 권력의 맛이 생각나지 않는가”라는 좀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그때 달콤했다는 걸 느낀다. 그런데 나는 진짜 권력의 핵심인 국가정보원과 사이버사령부, 선거관리위원회를 파헤치고, 이들과 싸우는 것이 즐겁고 좋았다. 내가 체험한 권력의 맛은 바로 그거였다. 국회의원의 힘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는데 지금 그것을 못하는 것이 아쉽다.”

그렇다. 국정원 같은 거대권력에 맞서는 것도 국회의원이 누리는 ‘권력의 맛’이다. 이런 생활에 대해 그는 “적어도 진보 국회의원 출신이 여의도 정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추한 것이 없다”면서 “반드시 삶의 현장에 돌아가 그 속에서 다시 세상과 서민을 보는 것이 진짜 진보정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이 배관일을 접고, 대통령 선거전에 뛰어들어야 한다. 당(민중연합당)이 김선동 대통령 후보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당장 생계에 문제가 생기지만 당원으로 당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는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파면’ 결정을 지켜봤다. 헌재의 이번 결정에 국민적 찬사가 이어지고 있지만, 바로 1년 9개월 전 헌재는 그 해 최악의 판결로 비난을 받았다. 단 한 명을 빼고 바로 그때 결정을 내린 재판관들은 그대로다.

“생중계를 지켜보면서 굉장히 착잡했다. 저 사람들이 우리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헌재는 지하혁명조직(RO)의 내란음모가 있었다는 이유로 당을 해산시켰지만 대법원은 이 부분에 무죄를 선고했다. 이것은 시비의 문제가 아니다. 아예 죄가 안되는 것을 이유로 당을 해산시킨 것이다.”

당시 의원직을 잃은 5명은 일종의 정치적 해직자다. 복직투쟁은 어떻게 되어가나.

“현재 지위확인소송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행정법원에서 각하, 고등법원에서 패소했지만 중요한 판결이 나왔다. 국회의원의 직을 박탈하는 것은 국회에서 제명될 때와 상실에 해당하는 실형을 받은 2개 경우뿐이다. 당이 해산되거나 통합됐을 때 의원직을 잃지 않는다. 이제 대법원의 새로운 판결을 기대하고 있다.”

같이 의원직을 상실한 지방의원의 경우 모두 재판에서 이겨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다. 지방의원들은 선관위 행정명령으로 의원직을 상실했지만 사법적 판단으로 복직됐다. 게다가 이번 박근혜 국정농단 특검 결과에서 고 김영한 정무수석 비망록에 당시 박한철 헌재소장과 청와대의 네트워크(헌재 결정 3일 전에 해산을 미리 아는 등)도 드러났다. 우리는 다음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에 판결을 내렸으면 한다. 그래야 박근혜 체제를 말끔히 정리하는 의미가 있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 특히 국정원 댓글사건과 선관위 디도스 공격 등 디지털 선거부정 문제에 매달렸다. 그는 다음 정권에서 선거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 전면적인 재수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전 의원은 “2010년 선관위 디도스 공격은 최초의 디지털 선거범죄로 국회의원 비서관 혼자 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면서 “이것을 대충 덮고 넘어간 결과 2년 후 대선에서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디지털 선거범죄를 벌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선거범죄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무너뜨리는 중대범죄이기 때문에 반드시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규 전 의원이 주상복합 건물 5m 높이 천장에 올라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고 있다.

이상규 전 의원이 주상복합 건물 5m 높이 천장에 올라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고 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노동현장으로

최근 진보진영은 ‘민중의 꿈’이라는 이름으로 대통합을 모색해 왔다. 그러나 정의당의 입장과 함께 민주노총에서 정치참여 표결이 부결돼 주춤하고 있다. 결국 이번 대선에서 정의당은 심상정 후보, 민중연합당은 김선동 후보로 각각 분열된 채 임하고 있다. 진보진영의 활로를 어떻게 찾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위에 있는 사람은 진보 자를 떼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정의당 바닥에 있는 분들은 진보적 의지를 가진 분들이 많다. 민중의 꿈에 2명의 의원이 있다. 통합을 하면 시너지 효과도 있다. 제3지대 당을 만들어 통합하는 논의에 상당히 근접했지만 마지막 결심을 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5월 대선까지 치르고 나야 절실함이 생기지 않을까.”(하~하~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 전 의원은 1965년 충북 제천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제천은 산골이지만 그래도 약사를 하는 부친 덕분에 시내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전학 왔다. 그는 선생님에게 부당하게 혼나고 ‘서울에서는 공부 못하면 옳은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고 사람 취급 못받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 1983년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다. 학내 시위가 치열했던 그때 그는 일기장에 ‘데모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공부만 했다. 하지만 이 결심은 곧 무너져 버렸다.

“대학 1학년 때 학교에 몰래 상주하는 사복경찰이 여학생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학교가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하면 해당 여학생을 공개하겠다’고 했다. 굉장한 충격이었다. 서울대 교수라는 사람이 피해를 당한 제자를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저렇게 내팽개칠 수 있는가. 그때 ‘배운 놈들, 정말 나쁜 놈들이다’라고 생각했다. 독재에 굴종하는 지식인의 쓰레기 같은 모습을 보면서 고민했다. 그 후 한 여학생이 학생식당 식탁 위에 올라가 유인물을 뿌리다가 경찰에게 머리끄덩이를 잡혀 끌려가는 것을 보고 처음 짱돌을 집어 던졌다. 시위를 마치고 막걸리를 마시고 취해 집에 들어와 일기를 썼다. 나중에 삐뚤삐뚤 쓴 일기를 보니 ‘드디어 오늘 돌을 들었다’ ‘만약 판·검사가 되면 공부한 것이 아까워 양심을 팔 것이다’ ‘사법시험은 보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운동권이 됐다.”

그때 동기동창 친구가 바로 태극기 망토 시위로 유명해지고, 이번에 대통령 출마까지 선언한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이다. 그는 약간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김진태는 열심히 공부하던 착한 친구였다”고 회고했다. 국회의원이 돼 초선의원 연찬회 때 먼저 달려와 “축하한다, 잘하자”고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 번은 ‘너 지금도 이불 뒤집어쓰고 단파 라디오 듣냐?, 북한과 미국이 전쟁하면 너는 북한편 들 거지?’라고 말하는 등 변했다고 한다.

그는 1986년 법대 학생회장에 당선되는 등 운동권 핵심이었지만 ‘다행히’ 별을 달지 않고 강제징집됐다. 강원도 홍천에 있는 11사단에서 소총수로 근무하다 병장으로 제대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구로공단과 인쇄공장,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민주노총 산하 민간서비스연맹 정책국장을 지내다 1997년 권영길 위원장이 국민승리21을 만들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자 권 후보의 비공식 유세단장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2002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본격 정치를 시작한 그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했다. 그러나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를 하면서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고, 2011년에는 박원순 시장 유세본부장을 지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후보로 서울 관악을에서 ‘드디어’ 당선됐다. 하지만 2014년 12월 헌재 결정으로 당이 해산되면서 2년 반 만에 금배지를 잃었다.

그는 “촛불의 진정한 의미는 박근혜 한 사람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적폐를 청산하고 한국 사회의 구조를 바꿔야 하는 것”이라며 “이 중요한 시기에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감옥에 있고, 통합진보당이 해산됐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 촛불의 목적을 가장 잘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민중연합당 김선동 후보”라며 “여기저기서 진보를 얘기하는데 진짜 진보, 진정한 진보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이상훈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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