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퇴진 예술행동위 송경동… 한국의 체게바라 꿈꾸는 행동하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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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기자는 시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형이 그랬지만 밤낮 없이 술을 마시며 보통 사람들이 보거나 느끼지 못하는 그 무엇을 짚어내는 작업을 한다. 게다가 그 고통스런 작업은 별로 돈도 안돼 경제적으로 무능력했다. 같이했던 기자 중에도 등단한 시인이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섬세했지만 거친 취재전선에서는 유약했다. 문학적 소양이 없는 본 기자는 그래서 시인을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촛불혁명을 보면서 이런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물론 과거 <오적>을 쓴 김지하 시인, <겨울공화국>을 쓴 양성우 시인, <노동의 새벽>을 쓴 박노해 시인 등이 시를 통해 독재와 맞선 경우가 있다. 이번 촛불혁명에서 세월호 유족·노동자·농민 못지않게 의외로 문화예술인도 집요한 투쟁을 했다. 지금 광화문광장에는 세월호 텐트촌과 문화예술가들 텐트촌, 통일운동가 텐트촌만 남아있다. 문화예술가들은 ‘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예술행동위)를 만들어 지난해 11월 4일부터 지금껏 천막투쟁을 하고 있다. 지독한 사람들이다.

이 예술행동위를 기획·총괄한 사람이 송경동 시인(50)이다. 3월의 첫 주, 광화문 일대에는 꽃샘추위에 찬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의 천막은 바람에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굉음을 냈다. 그는 푸석푸석한 얼굴로 기자를 만났다.

“힘들다. 많이 추웠다. 늦은 시간 춥고 시끄러운 텐트에서 잔다는 것… 정말 죽을 맛이다. 게다가 지난해 11월부터 일주일 단위로 열린 촛불집회를 하고, 촛불집회 끝나고 광장에 남은 사람들과 새벽 첫 차가 다닐 때까지 같이했다. 주변 청소도 해야 하고… 육체적 한계에 이르렀다.”

[원희복의 인물탐구]박근혜 퇴진 예술행동위 송경동… 한국의 체게바라 꿈꾸는 행동하는 시인

지난해 11월부터 텐트투쟁 기획·총괄

그는 ‘죽을 맛’, ‘힘들다’는 단어를 두 번씩이나 썼다. 그는 공사현장 ‘노가다’로 다져진 몸이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천막투쟁의 막바지라 심리적으로 더 그럴 것이다. 문화예술인은 지난해 11월 4일 시국선언에 참여한 800여명과 250개 단체가 예술행동위를 만들었다. 장르별 위원회와 원로·자문회의가 있지만 위원장도 없는 느슨한 조직이다. 매주 화요일 각 장르별 운영위원회를 통해 그 주 활동을 확정한다.

기자가 “시인이나 예술가는 나약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말하자 그는 즉각 “나약하지 않다”면서 반론을 폈다. 그는 “1970~80년대 사회변혁운동에 문화예술인이 주요 역할을 했고, 고초도 많이 당했다”면서 “특히 1만명에 이르는 블랙리스트로 문화예술인을 사찰하고 검열하고 불이익을 준 행위는 명백하게 헌법 22조를 유린한 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7일 국정원을 서울중앙지검에 직권남용죄로 고발했다.

“과거 참여연대 차원에서 고발한 것이 있다. 이번 특검 수사 결과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국정원이 개입한 정황이 일부 드러났다. 특검에서 국정원 관계자까지 소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본격적으로 수사하지 못한 채 시간에 쫓겨 특검이 해산됐다. 이번에 문화예술계 당사자들이 재수사 촉구와 함께 고소장을 접수시켰다.”

국정원은 2013년 ‘예술위의 정부 비판 인사에 대한 자금지원 문제점 지적’ 보고서를 작성했다. 또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의 업무수첩(비망록)에는 ‘문화예술계의 좌파 각종 책동에 투쟁적으로 대응’(2014년 10월 2일자), ‘영화계 좌파성향 人的 네트워크 파악 必要 (經濟)’(2015년 1월 2일자)와 같은 대목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 이병기·남재준·원세훈·김성호 전 국정원장을 고발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인의 요구는 무엇인가.

“우리는 국회에 블랙리스트의 전모를 밝히는 국정조사와 블랙리스트를 방지할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새 정부는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진상규명을 하고 백서를 만들어야 한다. 다시는 정부가 표현의 자유와 헌법을 유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리스트 당사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그는 2015년 ‘촛불연대기’라는 시에서 “미선이 효순이 때/ 처음 촛불을 들었다/ 화염병도 죽창도 아닌 연약한 촛불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지/ 착하기만 한 사람들이 싫었다… 단 한 번도/ 민중, 무력 없이 세상이 바뀐 적은 없다고/ 청원으로 민주주의는 성장하지 않았다고/ …”라고 말했다. 평화적인 촛불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의미다. 기자가 “아직 촛불혁명의 진정한 의미가 완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 촛불은 현직 대통령을 파면한 의미에서 시 ‘촛불연대기’는 보완돼야 하지 않겠나?”라고 질문했다. 이에 그는 웃으며 “광장은 늘 진화한다”고 대답했다.

‘위악적’ 학창시절 보내고 노동판 전전

송경동은 이번 천막투쟁에서 거의 매일 ‘노가다’를 했다. 그는 가방에 볼펜이나 노트북이 아닌 ‘타카’(못을 박는 공구)와 칼·노끈 등을 넣고 다녔다. 바람에 날리는 천막을 묶고, 보온재를 두르고 난로를 피우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하는 이 날도 천막 안은 세차게 부는 바람에 매우 시끄러웠다.

이 와중에 그는 ‘우리 안의 폴리스라인’이라는 제목의 딱 한 편의 시를 썼다. “이제 그만 그 거대한 무대를 치워주세요/ 우리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게/ …이제 그만 연단의 마이크를 꺼주세요/ 모두가 자신의 말을 꺼낼 수 있게/ …전체를 위해 노동자들 목소리는 죽이라고, 소수자들 목소리는 불편하다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내가 비로소 말할 수 있을 때/ 내가 나로부터 변할 때/ 그때가 진짜 혁명이니까요.”

이 시는 뒤늦게 가담해 스포트라이트에 혈안이 된 정치인이나 정치를 위해 경제·노동·통일 등 다른 모든 요구는 자제해야 한다는 일부 화이트칼라의 위선 등 그가 이번 촛불혁명의 현장에서 목격한 단면을 예리하게 잘랐다. 실제 촛불집회를 관찰해 보면 세월호 유족들은 ‘처절함’이, 정치인들은 당 지도부나 카메라를 의식하는 ‘눈치’가, 노조원들은 ‘화끈함’이 보인다. 뒤늦게 가담한 화이트칼라 시민단체는 ‘유식을 떨고’, 문화예술인들에게서는 ‘기발함’이 보인다.

송경동은 1967년 전남 보성 벌교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님은 평범한 5일 장터에서 평생 일만 했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위악적’(僞惡的)이라는 다소 생경한 단어를 사용해 설명했다. 위악적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일부러 나쁜 사람인 척하는 것’이다. 원래 바탕은 착한데 일부러 객기를 부렸다는 것으로 이해됐다. 그 어린 객기가 도를 넘어 소년원에 2년이나 있기도 했다.

문제 많은 학창시절이었지만 유일하게 그를 칭찬한 사람은 중학교 국어선생님이었다. 봄비를 주제로 시를 쓰라는 숙제에 ‘뭔지도 모르고’ 끄적거려 제출했다. 송경동은 “그때 처음으로 친구들 앞에서 ‘잘했다’는 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다”고 기억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할 일이 없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용접도 하고, 배관도 하고, 형틀목공도 했다. 물론 자격증도 없었다. 그렇게 ‘노가다’ 시장에서 살던 그는 1988년 ‘큰 물’에서 놀겠다고 서울로 올라왔다. 첫 상경이었다. 그는 고전무용을 배우기도 했지만 서울 뒷골목을 떠돌며 스스로의 표현대로 ‘반 건달’처럼 살았다.

그러나 냉혹한 서울은 그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광양제철소와 여수산업단지 등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문단 누구의 추천이나 신문사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 아니다. 그는 “1991년 다시 서울에 올라와 지하철 공사장에서 일을 하는데 막연히 ‘문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마침 구로노동자문학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 문학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김남주 시인, 이시영 시인, 정희성 시인 등에게 시를 배웠다.

3월 7일 송경동 시인(왼쪽에서 세 번째)이 백기완 선생 등과 함께 국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채원희 제공

3월 7일 송경동 시인(왼쪽에서 세 번째)이 백기완 선생 등과 함께 국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채원희 제공

전통적 등단 절차 거치지 않은 ‘야메 시인’

그는 “그때 이름을 알리기 위한 등단 절차는 꺼리다 못해 경계했다”면서 “그런 면에서 나는 ‘야메(일본어 ‘야미’로 ‘합법적이지 않은, 정통이 아닌’의 의미) 시인”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하기야 대학 은사의 추천이나 신문사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 등 문인의 반열에 오르는 ‘정통 절차’는 그에게 사치였을 것이다. 솔직히 시나 소설 등 문학은 잘 쓰면 됐지 무슨 자격절차가 필요할까. 우리에게만 있는 문단에서의 등단 제도는 계보를 만들거나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승부를 가리는 ‘과거 시험병’에 불과하다.

이렇게 시를 배운 그는 ‘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발표한 글은 2006년 시집 <꿀잠>(삶이보이는 창), 2009년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창비), 2011년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실천문학사)로 묶여 나왔다. 천상병 시문학상(2010년), 신동엽창작상(2011년)도 받았다.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라는 시가 있다. 자신의 시에서 주된 주제와 의미는 무엇인가.

“지하철 공사장 일을 나갈 때 ‘오늘 내가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실제 죽어간 사람을 많이 봤다. 그러나 단순히 노동현장에서만 산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가 산재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가계부채가 1300조원이 넘은 현실에서 죽어라 일해도 빚만 늘고, 재벌의 사내유보금은 쌓이는 이 왜곡된 사회가 바로 산재의 결과다. 청년들은 N포세대로, 결혼을 해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가정이 파탄나고, 사람관계가 파괴되는 이 사회가 바로 산재다. 팔다리가 부러지는 것만 산재가 아니라, 사회·삶 자체가 산재다.”

그래서 ‘자본주의 추방’을 주장하는가.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요즘 보수신문도 자본주의 4.0을 말하고, 다보스포럼도 이런 악질적 자본주의는 유지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갈아 엎어야 할 세상’이라는 표현도 그런 맥락인가.

“많은 사람이 요구하면 판을 엎어야 한다.”

그는 노동과 산재를 소재로 시를 쓰면서 단순히 시 세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실제 현실에서 행동한다. 효선·미선 시위는 물론 평택 미군부대 이전 반대 투쟁에 나섰다. 2009년 용산참사 때 구속된 철거민들과 함께했고, 2010년 한진중공업 크레인 고공농성을 응원하는 희망버스를 주도해 구속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행동하는 시인’ ‘저항하는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기자의 ‘과격한 시인이라는 일부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그는 정색을 하고 해명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는 풍요롭고 문화적인 운동을 좋아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체 게바라의 시(새로운 인간) ‘진정한 혁명은 인간 내부에 있다/ 이웃에게 탐욕을 부리는 늑대 같은 인간은/ 혁명가가 될 수 없다/ 진정한 혁명가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을 존중하고/ 그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처럼 모든 일은 과정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도 문화적으로 싸웠고, 평택 대추리 투쟁도 문화·예술 모임을 통해 표현하려 했다. 희망버스도 아름다운 것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이번 광화문 텐트촌도 따뜻하고 풍요롭다. 이 정도가 과격이라면 사람들이 웃는다.”

송경동은 르포 작가 박수정과 혼인했다. 부인 역시 노동현장, 아픔의 현장을 기록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부부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기자가 ‘시를 써서 생활이 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그는 “주변에서 도와주는 지인들이 있고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면서 “대신 소박한 밥상과 늘 바닥 수준의 생활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대학에 입학한 아들이 있다. 고3 수험생 자식을 둔 ‘무심한 아비’는 광화문에서 4개월 동안 농성을 했다. 아들은 피아노를 전공한단다. ‘돈이 많이 들어가겠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이번 농성이 끝나면 부천 기계공단에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체 게바라를 동경하는 송경동도 보통의 아비였다.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이상훈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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