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연구가 김삼웅… “3·1혁명은 자주독립과 민주공화국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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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년 3월과 8월이 되면 ‘일본’을 생각한다. 국경일인 3·1절과 8·15 광복절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이때만 되면 심각한 국민적 내홍을 겪는다. ‘일제 강점은 근대화에 기여했다’ ‘8·15는 건국절이다’라는 뉴라이트 사관을 가진 인물이 중용되고 국정교과서로 회귀하는 박근혜 정권의 ‘역사 거꾸로 세우기’ 탓이다. 특히 종군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돈 몇 푼에 합의하고, 소녀상 철거까지 약속한 정부의 태도는 국민적 공문을 일으켜 이번 촛불혁명의 주요 에너지가 됐다.

이런 역사적 퇴행과 대통령 탄핵이 맞물린 채 맞는 2017년 3월 1일은 여러모로 복잡하다. 뉴라이트 사관을 가진 인물들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 주장하지만, 기실 1919년 3월 1일이 건국절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 발굴·정리·재평가에 매달리고 있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74)의 눈에 비친 오늘은 어떨까. 그는 지금도 부지런히 항일투쟁과 독립운동가 발굴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남북통일 돼야 ‘3·1혁명’ 완성될 것”

2월 22일 그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의암 손병희 평전>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손병희 선생은 동학의 3세 교조로 3·1운동의 실질적 지도자로 알려진 독립운동가라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김 전 관장은 “손병희 선생은 북접 통령으로 관군·일본군과 싸운 치열한 혁명가이며, 개벽·개화·인내천·만인평등의 민족종교 지도자이고, 민족대표를 결집해 기미 3·1독립혁명을 주도한 독립운동의 선각자”라고 설명했다. 이 자리에는 함세웅 신부를 비롯해, 이종찬 전 국정원장,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등 많은 인사들이 참석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독립운동 연구가 김삼웅… “3·1혁명은 자주독립과 민주공화국의 출발점이다”

사실 건국절은 3월 1일 아닌가.

“따지자면 3·1혁명은 반제·자주독립과 민주공화국의 출발점이다. 3·1혁명은 선열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함께 세계혁명사에서 손색이 없는 사회과학적 혁명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3·1혁명을 ‘정명’(올바른 이름을 부여하지)하지 못한 채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남북통일이 되는 날 비로소 3·1혁명이 완성될 것이다.”

3·1운동을 3·1혁명으로 부르는 이유는 뭔가.

“분명히 3·1혁명이다. 1948년 유진오 박사가 쓴 헌법초안에도 ‘기미 3·1혁명’으로 돼 있다. 이승만이 이를 일제 관제용어인 3·1운동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뉴라이트 사관의 인물들은 3·1혁명과 이어진 임시정부를 국가의 3대 요건인 영토, 국민, 주권이 없어 국가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미국도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가 독립을 선언하고 13년 뒤에 미합중국이 건국됐다. 미국은 바로 이 독립선언일을 건국절로 기념한다. 중국 역시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을 건국기념일로 삼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창립일을 건국기념일로 삼지 않는다.

김 전 관장은 뉴라이트 인물들이 1948년 건국절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친일파들이 자신의 죄를 면탈하기 위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1948년 건국절 주장이 가져오는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1948년 건국절은 헌법을 무시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이라는 헌법 전문을 능욕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아프리카 신생국도 아닌데 무슨 1948년 건국인가. 또 임시정부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물론 선열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모두 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방 후 그들에게 수여한 건국훈장 등의 정당성을 모두 무시하는 것이다. 48년 북한 정부의 수립에 비추어 우리의 영토주권까지 무시하고 있다.”

기자가 ‘박근혜의 역사 퇴행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국교가 정상화된 베트남에 대통령이 ‘월남파병’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면서 “외교적 결례는 물론 사고가 유신시대에 딱 멈춰버린 것”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1970년대에 멈춰버린 역사인식 탓이라는 것이다. 아마 올해 탄생 100주년이 되는 아버지에 대한 재평가 시도도 한몫했을 것이다.

“태극기 이상한 시위에 동원돼 자괴감”

그는 “신채호 선생이 고려시대 자주세력 묘청이 사대주의 세력 김부식에게 진압된 것이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일갈했다”면서 “나는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반민특위 강제 해산이 우리 민족·사회 정기를 말살시킨 사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전 관장은 1943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했다. <사상계> 신인논문상에 입상하고 1975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지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돕기 위해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편집장, 평민당 기관지 <평민신문> 편집국장·주간을 지냈다. 그러면서 그는 <친일파 1·2·3>, <친일파 100인 100문> <일제잔재 19가지> <친일정치 100년사> <항일민족선언> 등 친일 청산과 독립운동 관련 책을 쓰고 <해방 후 양민학살사> <곡필로 본 해방 50년> <한국현대사 바로잡기> 등 많은 현대사 관련 저술을 했다.

그는 고향 완도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꿈꿨지만 아태재단 기조실장으로 끝까지 DJ를 도왔다. 1997년 드디어 DJ가 대통령이 되자 그는 ‘자리’를 하나 얻었다. 바로 <서울신문>(당시 제호를 <대한매일신보>로 바꿨다) 상무 겸 주필이다. 당시 많은 기성 언론이 ‘그는 기자 출신이 아니다’라며 ‘낙하산 인사’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때 기자는 “<민주전선>은 1970년대 그 어떤 기성언론이 보도하지 못한 사실을 보도한 책임 있는 언론”이라며 “당연히 용기 있는 언론인”이라고 그를 옹호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사실 기성언론이 숨을 죽일 때 <민주전선>은 유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김지하의 풍자시 <오적>(당시 시인 김지하는 지금과 180도 달랐다)을 실었다. 그는 “나는 강연을 할 때 항상 ‘다른 것이 다 망가져도 언론과 검찰만 제 역할을 하면 된다’고 말한다”면서 “그만큼 언론이 중요한데 요즘 몇몇 언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2004년 11월 독립기념관 관장에 취임했다. 이것이 그가 한 정부 차원의 유일한 ‘자리’이다. 평소 항일투쟁과 독립운동가 발굴에 관심이 많던 그는 독립기념관장이 되자 ‘물을 만난 듯’ 일했다. 그는 자신이 독립기념관장 시절 했던 일 중 기억에 남는 것을 이렇게 꼽았다.

“독립기념관 광장에 815개의 태극기를 게양했다. 독립운동가들이 그렇게 바라던 태극기다. 요즘 태극기가 이상한 시위에 동원되고 있어 자괴감이 든다. 그리고 개관 20주년을 맞아 7개 전시관을 교체했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를 시상·격려하는 제도도 만들었다. 독립운동가 총서 100권을 만들기로 하고 진행하다 그만뒀다.”

그가 책임자로 있던 독립기념관은 우수 정부기관에 꼽히기도 했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사퇴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빌미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모 보수신문의 윤전기를 철거한 것에서 비롯됐다. 그는 독립기념관장으로 재직하면서도 연구와 집필을 계속해 <백범 김구 전집> 등 30여권의 책을 썼다. 그는 “단재 신채호 전집을 내기 위해 북한에 가서 자료 협조도 요구하고 했는데, 이뤄지지 않았다… 아쉽다”고 말했다.

그가 독립기념관장 시절 중국 정부와 협의해 상해(상하이)와 중경(충칭) 외에 유주에도 임시정부기념관을 만들었다.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에는 임시정부기념관이 없다. 지독한 모순이다. 민간단체에서 임시정부기념관을 세우자는 요구와 움직임에 정부는 꿈쩍도 않는다.

다행히 서울시가 서대문형무소 인근 옛 서대문구의회 건물을 양도해 올해부터 임시정부기념관 건립공사가 시작된다. 중앙정부에서 방기한 것을 지방정부의 도움으로 겨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미국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이나 프랑스 에펠탑 모두 독립기념물 혹은 건국기념물”이라며 “후년 3·1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에 광화문에 3·1혁명 기념탑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앞줄 왼쪽 네 번째)이 2월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의암 손병희 평전> 출판기념회에서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의암 손병희선생 기념사업회 제공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앞줄 왼쪽 네 번째)이 2월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의암 손병희 평전> 출판기념회에서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의암 손병희선생 기념사업회 제공

“앞으로 평전 50권 채울 계획”

특히 그는 1996년 <박열 평전>을 시작으로 <백범 김구 평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약산 김원봉 평전> <죽산 조봉암 평전> <홍범도 평전> 등 독립운동가와 <장준하 평전> <리영희 평전> <후광 김대중 평전> <김영삼 평전> <노무현 평전> 등의 평전을 썼다. 이번에 발간한 <의암 손병희 평전>이 30번째 평전이고, 곧 발간될 <박정희 평전>이 31권째 평전이 된다.

이렇게 독립운동가 평전에 집요하게 천착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분야지만 나라도 그들을 발굴·재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평전 50권을 채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저술한 31권의 평전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평전은 단연 <단재 신채호 평전>을 꼽는다. 그 이유에 대해 “신채호는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이며, 이론가이면서도 행동가”라며 “나중에 아나키즘을 도입한 21세기의 사상가이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그는 “신채호가 쓴 의열단 선언문을 보면 뛰어난 명문장”이라고 극찬했다.

그가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하고 독립운동사와 관련한 많은 저서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약간 냉담한 편이다. 그 이유는 ‘학위가 없다’는 것이다. 앞서 기관지 경력만 있고 기성 언론사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언론인으로 평가해 주지 않은 세태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 면에서 김 전 관장은 학벌과 경력이 지배하는 이 세태에서 자신을 일군 ‘인간승리’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 학계의 고질적인 문제인 젊어서 쓴 박사논문 하나를 평생 우려먹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발견돼도 연구에 대한 오류를 수정하지 않는다. 공부를 않으니 새로운 역사적 발견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는 “교수들은 연구도 안 하지만 남에 대한 평가에도 매우 인색하다”면서 “자신은 정사(正史)를 썼다고 하고, 우리(작가)가 쓰는 것은 비사(秘史)로 치부한다”고 일갈했다.

사실 외국의 경우 한 인간의 일대기를 정리하는 평전을 쓰는 작업은 매우 전문적 영역이다. 당시 정치·사회적 시대상과 한 인간의 내·외면을 냉정하게 비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전 작업은 문학적 요소도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생전에 자신의 평전을 전직 학자나 언론인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도 그랬다.

50권이 넘는 저서를 가졌으면 인세 수입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스티브 잡스 평전>이나 <체게바라 평전>은 수만·수천 부까지 팔렸다. 하지만 자신의 나라 인물 평전에 대한 인기는 미미하다. 이에 대해 그는 “정신적 사대주의”라고 잘라 말했다. 사실 후손이 출판자금을 대지 않는 이상 어렵게 살다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의 평전을 쓰는 작업은 자료수집비조차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그는 계속 책을 쓸 계획을 가지고 있다. 현재 집필 중인 책은 “가칭 <한국 풍류 인물·사상사>로, 곧 출간할 예정”이라며 “현대사에서 법과 제도를 초탈한 20명을 뽑아 그들의 일생을 정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그렇게 많은 책을 내는 비결이 뭐냐고 질문하자 그는 “끊임없이 자료를 찾고, 관계자와 인터뷰하고, 메모하고, 전국 헌책방엘 다닌다”면서 “다른 취미가 없으니, 이것이 취미이고 전업”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원희복 선임기자· 이상훈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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