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가의 허기> 책 낸 B급 주방장 박찬일… 펜과 칼로 삶과 인생을 요리하는 셰프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한편에서는 셰프의 화려한 요리경연과 미식가들의 음식평이 벌어진다. 전국의 유명 맛집을 소개하는 TV프로그램이 넘쳐난다. 온통 화면을 화려한 ‘먹방’(먹는 방송)이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취업준비생들이 3000원짜리 컵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시간에 쫓긴 택배기사는 2000원도 안 되는 냉동 컵밥을 데워 운전석에서 혼자 먹는다. 요즘 ‘혼밥’(혼자 먹는 밥)은 보통의 모습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혼밥을 생각해보자. 쓸쓸하게 혼자 먹는 밥이 지금의 국정난맥을 불러오지 않았을까. 서로 어울려 밥을 먹으며 남의 말을 듣고, 맞장구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이 자연스런 행위다. 어머니가 해준 밥을 먹으며 ‘하하’ 웃고 저녁을 보내는 것이 일상의 가장 큰 행복이다. 그러나 박근혜는 그것을 못했던 것 같다. 대통령이 혼밥을 하고 있으니…. 대한민국 많은 젊은이들이 혼밥을 하고 있다. 정치가 인간의 가장 원초적 문제인 ‘정상적으로 먹는 것’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TV 드라마를 보며 혼밥하는 대통령

이렇게 말하는 그는 요즘 ‘잘나가는 셰프’인 박찬일이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요리를 공부하고, 서울 강남의 청담동에서도 일해본, 나름 요리사 세계에서 알아주는 셰프다. 지금은 광화문에서 ‘광화문 몽로’와 서교동에서 ‘로칸다 몽로’ 두 곳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단, 그는 식당의 소유주가 아닌 월급사장이다. 그가 최근 <경향신문>에 쓴 글을 모아 <미식가의 허기-B급 주방장 박찬일의 에세이>(경향신문사 발행)라는 책을 냈다.

박 셰프가 말한 TV 드라마를 보며 혼밥하는 대통령의 일상은 ‘비선실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권력의 구조적 상징물이다. 그만큼 먹는 것은 정치와 밀접하다. 오죽했으면 대권주자의 공약으로 ‘저녁이 있는 삶’이 나올 정도였을까. 비단 정치만일까. ‘먹는 것’은 생물학적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고, 여기에는 인간의 욕망과 자존심, 더러움과 치사함이 다 배어 있다. 흔히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는 논란에는 매우 심오한 철학적 이치가 담겨 있다. 누가 이를 부인할 수 있을까.

/ 이석우 기자

/ 이석우 기자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는 것’을 천박하다거나 외면하는 척한다. 아니면 일류 미식가를 흉내내거나, 매우 고급스러운 경험담만 얘기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고상하고 품위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셰프들은 이를 매우 고급스럽게, 우아하게 포장한다. 그래야 비싼 가격을 매겨 매상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요리에 소금 하나 뿌리는 행위조차 과장한다. 그래야 요리가 예능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B급 주방장 박찬일의 요리세계는 그런 허세나 과장과 거리가 멀다. ‘제면노동자의 어깨’, ‘화상으로 가득한 요리사의 손’, ‘신경이 끊어진 도마 노동자의 손가락’, ‘밥때 놓친 택시운전사’, ‘학원을 마치고 조악한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뜯는 어린 학생들’…. 그의 눈에 비친 요리세계는 대부분 사실적이다. 책에 등장하는 요리도 계란찜, 사골국, 매생이국, 졸업식 짜장면, 통만두, 분홍색 소시지, 설렁탕, 아랫목의 아버님 밥, 순대, 돼지국밥 등 서민적이다.

문창과 나와 기자생활 8년·요리사 18년

박찬일 셰프는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오지 않은 중학교 졸업식 날, 그렇게 짜장면을 먹고 싶었지만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대학(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와 잡지사 기자를 했다. 8년간 한 기자생활을 때려치우고 이탈리아로 유학가 요리와 와인을 배웠다. 다행히 기자 출신이라는 이점으로 요리와 관련된 글을 쓰는 몇 안 되는 요리사로 통했다. 덕분에 이번에 책을 냈다. 기자가 “책을 보니 칼보다 여전히 펜을 들고 있는 편이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치켜세웠다.

“기자는 8년 했고, 요리사는 18년 했다. 몸은 이쪽(칼)에 있어도 자연스럽지 않다. 그것(펜)을 하기 싫어서 그만두고 이쪽(칼)으로 왔는데. 아이러니다. …사실 요리사로는 먹고살기 어려웠다. 이탈리아에서 요리 공부하고 돌아와 어떤 식당에 취직하는데 80만원 준다고 하더라. 그것도 나이 서른이 넘으니 안 뽑으려고 했다. 겨우 취업했는데 급여가 너무 적어 원고를 한 꼭지씩 썼다.”

요즘은 셰프하면 선망의 직업(처럼 보이지만)이지만, 2002년만 해도 셰프라는 이름은 고급호텔에서나 통용되던 이름이고, 그냥 요리사, 심하게 말하면 주방장이었다. 다행히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 요리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요리사를 보는 문화가 달라졌다. 게다가 요리와 요리사의 세계를 ‘맛있게’ 알려주는 사람이 드물었다. 펜으로 먹고살다 칼을 잡았던 그는 이 분야를 맛있게 요리할 수 있던 적임자였다. 그의 요리에 관한 글은 그렇게 시작했다.

최근 박찬일 셰프가 출판한 <미식가의 허기>. / 경향신문 자료사진

최근 박찬일 셰프가 출판한 <미식가의 허기>. / 경향신문 자료사진

책을 보면 ‘아비들은 밥을 벌다가 죽을 것이다’ ‘근육과 내장이 멈추지 않도록 우리는 배를 채워야 한다’ 등 표현이 처절하다. 이탈리아에 유학까지 했다면 좀 더 세련된 용어, 좀 더 고급스런 요리를 소개하면 몸값도 오르고 식당 매상도 오르지 않을까.

“그럴 것이다. 이 세상의 이너서클(부유층)과 교류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음식을 팔면, 그런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 박찬일이라는 내 인생의 뭐랄까….”

박찬일의 본질과 맞지 않아선가.

“그렇다. 나의 본질이 그렇다. 시장통 할머니들이 담요를 덮어쓰고 찬 도시락을 먹는다. 배달밥 5000원이 아까워 식은 도시락을 물에 말아 먹는 모습을 보면 울컥하다. 그러나 내가 뭘 할 수 있나. 싸구려 감정 같은 것을 느낄 뿐이다. 그런 감상적인 것, 그것이 나의 본질이다. 글쟁이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세상을 저주하고 감상적인 연애 얘기를 하는 정서, 그런 ‘퇴폐적인’ 정서를 버려야 하는데, 못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 ‘B급 주방장’이라는 이름을 고집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가.

“글쓰기에도 주류가 있는데, 나는 거기에 끼지 못한다. 소설로 신문사나 유명 문예지로 등단해서 이름을 날리겠다는 생각보다 늘 변두리에 머물렀다. 살기도 서울의 변두리에서 살았고, 고등학교·대학도 변두리를 다녔다. 엘리트의 길을 걸어본 적이 없다. 요리사가 되어 청담동에서 요리를 하면서도 주류 편에 서지 못했다. 요리업계에서 주류가 되려면 영향력이 있는 사람과 사이가 좋아야 하는데, 그것을 못했다.”

그는 이를 ‘B급 정서’라고 표현했다. 그는 “나도 그렇게 있는 사람들에게 잘 보여 식당도 잘되게 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 늘 그래 왔다”고 고백했다.

왜 기자가 싫었나.

“선배(그는 기자를 깍듯이 ‘선배’라고 불렀다)도 알다시피 기자는 특종을 해야 하는데, 나는 특종을 못했다. 또 기자는 싫은 사람도 만나야 하는 숙명이 있는데, 나는 그걸 못하겠더라. 나는 굉장히 소심한 사람이다. 혼자 있기 좋아하고. 남 앞에 서면 얼굴이 붉어지는 그런 사람인데…. 회사원으로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도 잘 못하고, 못 견디겠더라.”

마감이라는 규칙을 지키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겠지.

“취재 못했다고 위에게 깨지고…. 더이상 선배, 동료들 괴롭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른 적당한 일을 찾다가 요리를 배우기로 작정했다. 나름 ‘먹는 것’에 예민했던 느낌을 살렸다. 결혼해 아이들까지 있던 그는 집사람에게 ‘도저히 기자짓 못하겠다, 요리를 배우겠다’고 졸라 겨우 허락을 받았다. 집사람과 아이들을 처가에 보내고 전세금을 달랑 빼들고 혼자 이탈리아로 떠났다. ‘6개월만 파스타 만드는 것 배우고 돌아와 가게를 차리자’는 약속을 깨고 그는 2년 반씩이나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그는 “프랑스 요리와 쌍벽을 이루는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다보니 너무 재미있고, 와인도 흥미로워 공부가 길어졌다”면서 “거기서도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가지고 간 전세금은 모두 써버렸다”고 말했다.

귀국해 2007년 청담동 부자동네 음식점에 취업한 그는 새로운 식문화를 만들었다. 양식당인데, 고등어 조림을 메뉴에 넣고 취나물을 쓰고 돼지고기 스테이크를 선보였다. 이탈리아식인지, 한국식인지 모를 요리를 선보인 것이다.

박찬일 셰프가 그가 근무하는 '광화문 몽로'에서 자신의 요리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 이석우 기자

박찬일 셰프가 그가 근무하는 '광화문 몽로'에서 자신의 요리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 이석우 기자

“기존에는 스테이크 하면 소고기에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이고 수입재료를 쓰는 등 외국음식을 외국음식답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양식에 우리 재료를 썼다. 이것은 서양의 유명한 요리사들이 이미 실행하고 있던 것이다. 알랭 듀카스(유명한 프랑스 요리사)가 일본에 프랑스 식당을 냈는데, 일본산 재료를 썼다. 맛있는 요리는 재료가 신선해야 한다. 그러려면 산지에서 제철 재료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요리의 기본이다. 청담동에서 그런 식으로 했다.”

그는 국산재료를 사용하면서 산지를 분명히 밝혔다. 어디 산 닭, 어디 산 문어, 어디 산 미나리까지. 산지의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이후 푸드마일리지(재료가 멀리서 오는 것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 개념으로 구체화됐다. 당시 그런 개념을 도입한 요리사는 별로 없었다. 이렇게 영업한 청담동 식당은 대박이 났다.

산지에서 제철 재료 사용해야 좋은 음식

그는 광화문과 서교동에서 ‘몽로’라는 음식점 2곳을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의 요리철학에 동조하는 투자자들이 자본을 모아(물론 그도 출자하고) 영업이익을 내면, 투자자에게 분배하는 방식이다. 가격은 강남 유명 음식점보다는 싸지만, 일반 밥집보다는 비싸다. 그가 책에서 표현하는 대상들인 ‘밥때 놓친 택시운전사’나 ‘학원을 마친 어린 학생들’은 먹기 어려운 수준이다. 글과 실제의 차이인가.

“그렇다. 우리 식당은 내가 글에서 말하는 주류 고객에 비추어 비싼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관행적으로 쓰는 재료, 관행적인 요리에 들인 공, 그런 것을 못한다. 더 많은 인력, 더 좋은 재료, 더 좋은 위생으로 손님을 접대하다보니 조금 비싸다. 그리고 요리사의 주5일 근무, 연월차 등 노동조건을 분명하게 지킨다.”

그는 우리 음식점의 원가구조에 대해 한참 설명했다. 6000원짜리 밥상은 세금과 카드수수료를 제하면 주인 손에 쥐어지는 돈이 5000원 수준이다. 거기에 인건비와 임대료를 지불하면 재료비는 1500원 선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음식점은 인스턴트를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재료비 3000원짜리 학교급식이 더 친환경적이고 좋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오는 지금 식당에 만족한다. 그의 식당 주고객은 봉사를 받으려는 개념보다 비슷한 정서와 철학을 공유하려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이 온다.

그는 책에서 ‘요리사는 불행한 직업’이라고 표현했다. 그 이유에 대해 “요리사는 남들 쉴 때 일하고, 남들 퇴근할 때 일하고, 식구들과 저녁밥을 한 번도 같이 먹을 수 없는 직업”이라며 “그러면서 요리사는 대부분 자기가 만든 음식을 사 먹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부분 요리사 월급이 최저임금 수준의 박봉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식당이 50만개 정도가 있고, 종사자를 3명씩만 잡아도 150만명”이라며 “TV에 나오는 50명 정도만 빼고, 나머지 요리사는 다 어렵다, 150만명 중 50명이면 변호사 시험 보는 것이 훨씬 가능성이 높다”며 웃는다. 그도 18년 요리사를 했지만 아직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펜이 싫어 칼을 들었다. 그 스스로도 “글 쓰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글쟁이와 요리사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글쟁이는 펜으로 세상과 현실을 ‘요리’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찬일 세프는 천상 요리사다. 소고기나 생선만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인생도 요리하는 그런 양수겸장의 요리사 말이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n@kyunghyang.com>

원희복의 인물탐구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