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새장 한상대 “백두와 한라를 담은 통일국새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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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국회의 탄핵 결의로 박근혜 대통령 직무권한이 정지됐다. 이로써 박 대통령은 대통령의 고유 권능인 고위공무원 임명이나 조약이나 비준, 훈장을 줄 권한 등이 정지됐다. 바로 이 임명장과 훈장증, 비준서에 꼭 찍는 것이 국새다. ‘대한민국’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진 국새는 정부의 공식 도장이라는 의미로 국새(國璽)라 부른다. 지금 박 대통령은 그 국새를 찍을 자격이 박탈된 것이다.

국새는 ‘고조선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천부인을 가져왔다’는 근거에서 비롯될 정도로 깊은 역사를 가졌다. 아무리 사인이 일반화된 서명시대이지만, 국새는 국가의 정신적 권위와 실체적 권력의 상징이고, 법적 효력까지 가졌다. 올해 봄 새누리당 공천파동에서 당 대표였던 김무성 대표가 당의 ‘옥새’를 가지고 부산으로 도피해 공천작업이 중단된 사례가 있다. 정치판에서도 옥새(법인도장)는 여전히 법적·행정적 효력을 발휘하는 데 핵심이다.

국새는 그 시대 최고의 예술성과 과학성이 결합한 결정체다. 재료가 옥으로 만든 것을 옥새라고 하지만, 지금 국새는 금·은·구리·아연에 희귀금속 이리듐까지 첨가한 최첨단 합금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제작을 지휘했고, 국방기술품질원에서 비파괴 검사(초음파 탐상검사, 와전류 탐상검사)와 내시경 검사 등 꼼꼼한 감리를 받았다.

제5대 한상대 국새장이 공방에서 인조대왕 어보 재연품을 제작하고 있다.

제5대 한상대 국새장이 공방에서 인조대왕 어보 재연품을 제작하고 있다.

우리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5번째 국새를 사용하고 있다. 국새를 제작한 사람에게 장인 ‘장(匠)’을 붙여 국새장이라 부른다. 제5대 대한민국 국새장은 한상대씨다. 1987년 <녹두서평> 창간호에 당시 금기시됐던 제주 4·3항쟁을 담은 장편 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던 시인 이산하는 한 국새장에 대해 이런 시를 썼다.

“모든 것은 예리한 눈빛과 섬세한 손끝에서 나왔으니/ 그 외롭고 혹독한 수련의 세월을 무엇으로 말하리/ 그러나 가슴속에 항상 찬란한 국새를 품고 있었으니/ 온갖 차별과 굴욕의 순간들도 깃털처럼 가벼웠으리.”

얄궂은 운명은 바로 이산하 시인을 구속한 공안검사가 바로 황교안 현 대통령 권한대행이다. 한 국새장은 “내가 국새장이 된 후 이산하 시인이 나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고 찾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면서 “나중에 이 시를 보내줬다”고 말했다.

시인 이산하의 시를 보면, 한 국새장의 삶의 궤적에 관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기자와 그의 만남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 기자는 행정안전부를 출입했다. 그때 정부가 사용하던 제4대 국새의 제조방식과 제조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결국 검찰의 수사 결과 제4대 국새는 사기로 드러났다. 정부 권위의 상징인 국새 제작에 정부가 사기를 당하는 대망신을 산 것이다.

정부는 새로운 국새 제작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4일 정부종합청사에서 새 국새를 발표했다. 정부 관계자와 KIST 박사 등이 새 국새를 발표하는 도중, 뒤에서 큰소리로 “말 똑바로 하시오”라고 소리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한 국새장이었다. 국새는 보통 인뉴(손잡이를 비롯한 전체 모양)와 인문(도장의 글씨체)으로 구성된다. 국새는 종이에 ‘대한민국’이라는 글씨를 찍는 기능적 측면에서 인문이 중요하지만, 전체적 예술성은 인뉴가 중요하다. 바로 한상대씨가 그 인뉴를 디자인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의 작품 발표회장에 초대받지 못했다. 왜였을까? 이번 인물탐구는 오래전의 이 의문을 푸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제4대 국새에서 사기를 당한 정부는 제5대 국새는 철저히 ‘실력’으로 만들기로 했다. 사실 제4대 국새를 만든 사람은 제3대 국새에 미세한 금이 가 있다는 점을 언론에 집요하게 문제제기했다. 결국 정부는 문제를 제기한 그 당사자에게 4대 국새 제작을 맡겼다. 엄밀히 말하면 언론이 사기극에 이용된 것이다. 따라서 제5대 국새는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국새제작위원회를 통해 국새의 소재와 모형, 제작에 대한 주요 사항을 결정했다. 그리고 디자인은 공모를 통해 선정하기로 했다. ‘여론’이나 ‘배경’ 등이 배제된 ‘완전한 실력’으로 선정하기로 한 것이다.

“공모전에서 국새를 만들고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게 하기 위해 인문 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검정 테이프로 감아 심사위원에게 제출했다. 사실 이름이 나 있는 인간문화재나 유명 대학교수들의 이름도 간간이 거론됐다. 그러나 심사위원장이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며 작품성과 예술성 위주로 심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공모에는 인뉴 모형 22점과 인문 모형 57점이 출품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렇게 철저히 실력으로 평가한 공모전을 까보니 당선자는 지방대(원광대) 공예과를 나온 당시로서는 무명작가였다. 금속공예 분야의 인간문화재나 외국에 유학해 디자인을 배운 유명 대학교수의 작품을 모두 제치고 그가 당선된 것이다. 아래 인문은 서예전각가 권창륜씨 작품이 뽑혔다.

한상대 국새장이 디자인해 현재 정부가 사용하고 있는 제5대 국새.  / 한상대 제공

한상대 국새장이 디자인해 현재 정부가 사용하고 있는 제5대 국새. / 한상대 제공

그는 “국새 공모전에 대비해 1년 동안 작업했다”면서 “밤낮 없이 조각하고 지우고…. 특히 봉황의 머리에서 꼬리까지 선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당시 심사위원장인 최응천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봉황의 자세와 날개, 꼬리 부분을 역동감 있게 조각해, 힘 있고 단정하면서도 웅건한 봉황의 느낌을 충실히 표현하였고, 조각기술과 조형미가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행정안전부, <제5대 국새백서>)

또 시인 이산하는 이 국새에 대해 “두 마리 봉황이 무궁화꽃을 피우며 날아 오르고/ 태양 속에서는 삼족오가 봉황의 날개를 끌어 당긴다/ 무궁화 꽃잎들이 천하를 가득 메운다”고 노래했다.

1960년 전북 익산 출신인 한 국새장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막도장을 파기 시작했으니 나름 소질이 있었다”면서 “붓글씨도 잘 썼고 사생대회 등에 나가 입상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문대 공예학과에 진학했지만 배운 것이 너무 미진하다고 느꼈다. 마침 원광대에 금속공예과가 생기자 그는 다시 1학년에 재입학해 금속공예를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그러나 4년 동안 열심히 배웠지만 대학에서 배운 것은 주로 예술성이라는 이론이었다. 실용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1989년 서울로 올라왔다. 실용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무일푼으로 서울에 올라와 취업을 하려는데, 대학 졸업자라는 이유로 안 받아 줬다”면서 “기술을 배우겠다는 간청 끝에 겨우 취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취업해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기술 노출을 꺼린 선배들은 어깨 너머로 배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그는 팟알만한 산호비치를 입체적으로 깎는 작업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이 시절 그는 “잘 곳이 없어 공방에서 종이상자를 깔고 자고, 배를 곯은 적도 여러 번”이라고 말했다.

한 국새장은 “국새는 하루에도 수십 번 계속 사용하는 것으로, 실용성을 감안해 만들었다”면서 “남대문·종로에서 배운 실용성이 국새 제작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세밀한 머리칼까지 재연하는 정밀주조 기술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전통공예 분야에서부터 디자인과 거푸집, 주물까지 모두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장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요즘 예술을 한다는 대학교수들은 거푸집을 만들어 주물을 하는 제조는 기술분야로 치부하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사실 이번 제5대 국새도 KIST(사실은 별도 일반업체지만)에서 제작했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국새장은 디자인부터 주물까지 모두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11월 4일 전북 익산 보석박물관에서 열린 제5대 국새장 초대전에서 한상대 국새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한상대 제공

11월 4일 전북 익산 보석박물관에서 열린 제5대 국새장 초대전에서 한상대 국새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한상대 제공

그는 “제5대 국새는 나라의 화합과 태평성대, 그리고 국운융성을 담았다”면서 “특히 강조한 것은 선”이라고 말했다. 앞서 심사평처럼 제5대 국새는 봉황의 벼슬에서 시작해 날개와 몸체를 감아 꼬리까지 내려오는 선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는 “주물공정에서 선을 살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어렵다”면서 “선 하나를 살리기 위해 서너 시간씩 매달린다”고 말했다. 그가 만들어 낸 선은 ‘부드러우면서 예리하고, 묵직하면서 날렵하고, 섬세하면서도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 국새장은 국내 유일의 국새장이지만 ‘돈’과는 거리가 멀았다. 그가 국새를 만들고 받은 대가는 상금 500만원이 전부다. 정부 차원의 재연품 의뢰도 꼬장꼬장한 그의 성격 때문에 별로 없다. 특히 금속공예 분야도 투자자를 엮고 이를 재벌이나 미술관 등과 연결하는 판로가 있어야 한다. 그는 “이 분야도 학연과 지연으로 얽혀 있다”면서 “재벌들이나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소장할 만한 고가 공예품은 ‘학벌’로 이어진 인맥으로 제작되고 거래된다”고 말했다. 지방대 학벌과 적당히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성격상 이를 뚫기 어렵다.

“아슬아슬하게 임대료 내고 재료비를 충당한다. 예술은 돈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실감한다. 몇몇 사람들이 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어 공예를 하는 후배들도 처음에는 의욕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수입이 되지 않아 대부분 그만두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나도 ‘팔아준다’며 작품만 가져가고 사라지는 사기도 여러 번 당했다. 내 주변에 사기꾼만 득실거린다.”

그는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기념 이봉주 마라톤화, 월드컵 트로피 금형 등을 제작했다. 이밖에 궁중유물 재연으로 겨우 작품활동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지금 영하 10도가 넘는 겨울에도 변변한 난방을 하지 못하는 세검정의 허름한 공방에서 작품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실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가을에는 전북 익산에 있는 보석박물관 아트갤러리의 개막 초대전을 갖기도 했다.

한 국새장은 이 금속공예 분야에도 반드시 실력으로 빛을 볼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있다. 그는 “당초 내 인생의 목적은 인간문화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이제 국새장이라는 칭호를 얻어 인생의 목표를 이룬 셈”이라며 “후배를 완벽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지금은 휴학 중으로, 언제 복학할지는 솔직히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한 국새장은 자신의 최종적인 예술적 작품으로 “통일정부의 국새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의 화합을 상징하는 백두산과 한라산을 결합한 통일의 상징물로 만들겠다”면서 “현 국새는 새로 만든 남북통일을 결의하는 문서에 날인한 뒤 영구 보관되고, 통일헌법에는 새로운 통일국새를 썼으면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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