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 울려퍼진 ‘92년 장마, 종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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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무대에 정태춘이 올라섰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불렀다. 내가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른 채 서녘의 붉은 하늘을 우두커니 보았던 바로 그 시절의 상흔과 겹쳐지는 노래다. 이 노래는, 그러나 반드시 상습적인 집회 참가자들의 노래만은 아니다.

100만명이 모인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한 개인에게는 필생에 몇 번 겪을 수 없는 사건이요, 공동체로서도 자주 겪지 못할 역사적 순간이다. 그 100만 중의 한 사람이 되어 11월 12일의 광장에 서 있었다. 저녁의 밤, 광장 무대에 정태춘이 올라섰다. 정, 태, 춘!

광장은 모두의 것이기에 그 집합적 열광의 참여자들은 저마다의 기억을 한마디씩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내게도 한 줌의 기억이 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경북의 산골에서 서울의 도봉구로 이사를 왔다. 산골에서도 온종일 쏘다녔는데, 서울에 오니 사방이 스펙터클이었다. 버스를 탔다. 23번 버스를 타면 종로로 해서 광화문을 거쳐 서울역 앞으로 갔다가 오면 시내 구경 다 할 수 있다고 사촌형이 말해줬다. 그래서 탔다. 3학년 때는 아니고, 그렇다고 5학년 때는 아닌, 4학년?

그 시절의 꼬마 아이들이 그렇듯이, 동네 재개봉관 삼류 극장의 거대한 간판과 매표 창구 옆의 큼직한 아크릴판 안에 꽂혀 있는 영화 스틸 장면을 물끄러미 구경하는 것도 이제 막 도시에 진입한 산골 아이의 구경거리였는데, 23번 버스는 바야흐로 동북아의 중심 도시로 변화해 가는 서울이라는 ‘판타스마고리아’의 핵심을 관통하는 것이어서, 저 종로5가의 한일극장을 시작으로 3가의 단성사, 피카디리, 서울극장, 그리고 2가의 허리우드를 지나 광화문 네거리의 국제극장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끄트머리에 남영극장도 있었다. 돌아올 때는 종로3가에 내려서 유서 깊은 세 극장의 간판과 스틸 사진을 다 보고, 거꾸로 걸어서 허리우드와 국제극장까지 보고 나면, 배가 고팠다. 그 후로도 줄곧 광화문은 내 삶의 원심력이었다. 중·고교 때는 거대한 서점 때문에, 더 커서는 일과 집회와 연애 때문에, 언제나 내 삶은 광화문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가수 정태춘이 12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박근혜 하야’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열창하고 있다. / <오 마이뉴스> 제공

가수 정태춘이 12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박근혜 하야’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열창하고 있다. / <오 마이뉴스> 제공

광화문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돈 내 삶

한편 나는 20대 내내 무소속이었는데, 대학도 단체도 직장도 없이 10여년을 보냈어야 했기에 크고 작은 집회나 시위가 열릴 때마다 늘 혼자서, 쿵쾅대는 심장을 다독이면서, 조심스럽게, 늘 언저리에서, 구경꾼으로, 나가 보았다. 어쩌다 내 또래 대학생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행진을 하거나 투석전이라도 벌이게 되면 슬쩍 한 발 내밀었다가 다시 인도로 올라서곤 했다. 30대가 넘으면서는 일찌감치 ‘민주시민 여러분’이라고 할 때의 그 대상이 되어 또다시 팽팽한 긴장의 언저리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러던 중의 일이다. 1990년대 초반의 일, 정확히 어떤 시위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광화문 네거리 쪽을 전경들이 꽉 막고 있었다. 그때는 차벽은 없었고, 전경이 중무장한 채 횡대로 진을 쳤고, 그 뒤로 최루탄을 난사하는 차들과 이른바 백골단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반대편으로는 노동자와 대학생들이 종각 일대에서 동북아의 중심부로 밀려오고 있었다.

늘 혼자였기에 그날도 혼자였는데, 어쩌다 보니 오가는 차량이 완전히 차단된, 텅 빈 종로1가의 한복판에 나는 서 있게 되었다. 평범한 소시민인 양 전투경찰 쪽으로 걸어가서 교보문고 뒷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은 쫌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일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단체들의 깃발 아래로 달려가서 동참하기에도 마음은 불편했다. 솔직히, 겁도 많이 났다. 그렇기는 해도 어쨌든 나는 집회에 동참하러 나온 길이었으니 양쪽 어디로든 갈 수 없다 해서 지하철 입구를 찾아 도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연신 날카롭게 울리는 교통경찰들의 호각 소리를 따라 서쪽으로 갔다가 또 슬쩍 방향을 바꿔 동쪽으로 갔다가 하면서 그 무서운 긴장이 압도하는 일시적 진공 상태의 종로1가에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일촉즉발 직전에, 나처럼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는 여러 시민들이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도로 한복판에 내려서게 되었는데, 순간 멈춰 서서 해가 저무는 광화문 네거리 쪽의 서녘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과연 붉은 햇살은 거대한 빌딩군을 헤치고 들어와 광화문 네거리를 장엄하게 적시고 있었다. 불과 10여초도 안 될 순간이었지만,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훗날, 여느 공부하는 학인들과는 다른 경로를 따라 마흔이 넘어 뒤늦게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광화문광장을 연구 주제로 삼게 되었고, 간신히 어설픈 문장을 기워 석사 논문을 썼다. 그 논문의 핵심은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에 완공된 광화문광장이야말로 장소의 역사성이 검열 당하고 공간의 당대성이 완전히 삭제된 조잡한 구경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광장 조성을 포함하여 세종로 일대를 대대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작업은 1990년대부터 계획된 일이다. 서울시는 1994년에 보행로 개선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 상징거리 조성 계획’을 세웠고, 1995년에는 광화문 및 경복궁 복원과 연계된 ‘가로공원화’ 계획, 즉 ‘국가중심가로 조성계획’을 세웠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보다 구체화된 형태로서 세종로의 중앙분리대 개선과 조망 광장을 조성하기 위한 ‘시범 조망가로 기본계획’을 1999년에 완성하였다. 고건, 이명박, 오세훈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 기본계획이 수정되고,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창조 도시’니 ‘도시 브랜드’ 같은 말이 시정을 압도하면서 결국 오세훈 시장 재임 때인 2009년에 이 광장이 개장하게 되었는데, 다른 말들은 부차적으로 밀리고 ‘세계적인 관광 자원’이라는 말이 유난히 펄럭이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천박한 물리적 구성은 오세훈 시장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오세훈 시장에 의하여 광화문 일대의 역사성과 장소성과 당대성이 파괴된 것임은 틀림없다.

정태춘, 박은옥 부부가 발표한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 표지 / 경향신문 자료사진

정태춘, 박은옥 부부가 발표한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 표지 / 경향신문 자료사진

파괴된 광화문 일대의 역사성·장소성

나는 내 서툰 공부의 결과를 전제로 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토론이나 칼럼을 통해 현재의 조성 형태를 비판해왔다. 단기적으로는 조잡한 시설물부터 우선 치워버리고, 장기적으로는 광장 자체를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옮겨서 대도시의 삶이 복잡하게 전개되는 수많은 골목, 즉 일상의 소중한 실핏줄들이 자연스럽게 광장이라는 너른 공간으로 번지는 광경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주장에는 디즈니식 테마파크 같은 천박한 구경거리의 광장에 의해 내 기억의 혈흔들이 말갛게 씻겨져 나가고 있다는 개인적 소회도 물론 깔려 있다.

그래서 자주 광장에 나간다. 지난번에도 나갔다. 그 무대에 정태춘이 올라섰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불렀다. 나는 그 노래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부터 그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울컥했다. 우연히도 내가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른 채 서녘의 붉은 하늘을 우두커니 보았던 바로 그 시절의 상흔과 겹쳐지는 노래다. 이 노래는, 그러나 반드시 상습적인 집회 참가자들의 노래만은 아니다.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 신호등에 멈춰 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주룩주룩 장맛비가 내리면, 문득 생각나는 노래다.

식민과 내전과 독재 이후 이 지구의 제3세계에서는 스스로의 언어와 스스로의 발성과 스스로의 탁한 목소리로 스스로의 역사와 거친 현실을 노래하는 음악가들이 대거 출몰하였으니, 나는 특히 김민기와 정태춘을 이 세계사적 음악 흐름의 한국적 상징이라고 자주 주장하거니와, 다시, 광장의 무대에 정태춘이 올라서서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오늘의 역사적 순간으로 되새겨 불렀을 때, 내 마음은 또 울컥거렸다.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빛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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