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oxer’-세상은 한순간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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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노래]‘The Boxer’-세상은 한순간의 거짓말!

노래에 관한 한 아무런 안목이 없지만 그래도 팝송 하나를 꼽으라면 이 노래를 꼽겠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The Boxer’. 모든 노래는 단순히 멜로디의 조합만이 아니라 옛 생각을 불러오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귀를 채우는 노래는 이내 아래로 내려가 가슴을 모종의 흥건함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얼마 전 어느 방송에선가 모처럼 이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잠깐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머리가 가려워 고삐 끝에 달린 소나무 기둥을 마구 비비던 소가 가려움이 해소된 뒤 이내 그 어떤 생각에 꽂혀 굵은 눈망울로 저 멀리 허공을 처연하게 바라보듯, 좁은 사무실의 벽면에 꽂힌 책들을 보다가 유리창 너머 바깥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앞에 전개된 상투적인 공간을 노래의 힘을 빌려 내 식으로 조금이나마 비스듬히 본 것이다. 그건 그리 장중할 건 없지만 제법 웅장하게 들리는 기타 소리가 제공하는, 가슴 저 아래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인가를 처리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나는 잠깐 동작을 멈추고 내 앞의 공간에 미처 몰랐던 빈틈이라도 찾아보겠다는 듯 꼼꼼히 벽을 훑어보면서, 약간 다른 세계를 넘보는 듯한 기분도 느끼면서 그 노래를 들었다.

“I am just a poor boy.” 짧막한 자기소개서를 읽어 내려가듯 건조하게 시작하는 그 노래는 어느 권투선수의 신산한 삶을 그려낸 가사로,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 든다. 단순한 가사가 아니고 실제 모델이 되는 권투선수도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노래에는 후렴구가 있고 1절과 2절의 돌림 가사로 되는 게 보통인데, 이 노래는 그 형식을 간단히 벗어난다. 그냥 권투선수의 일생을 간단히 점층식으로 전해준다. 삶이란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것을 노래의 형식에서도 보여주는 듯하다. 다만 그 중간에 간간이 샌드백을 두드리는 것 같은 음향과 함께 “라-라-라-라-”를 반복할 뿐.

라-라-라-라-라-라-라-라. 예전에는 이 허밍이 그저 단순한 허밍인 줄로 알았다. 말이 되지 못한 소리로서 가사와 가사의 사이를 이어주는 것으로만 알았다. 나이 탓인가, 시절 탓인가. 이제는 그 후렴이 이런 뜻의 가사로 들리는 게 아닌가. lie-lie-lie-lie-lie. 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

모든 노래에는 급소가 있게 마련이듯 이 노래에도 급소가 있다. 내가 꼽는 대목은 후반부로 접어들 즈음 나오는 “leading me, going home” 부분이다. 이 짧은 소절에서 나는 그라인드로 주물을 가는 듯한, 애끓는 가래소리도 섞인 듯한, 살뜨물로 숭늉을 끓이는 듯한, 입천장에 달큰하게 들러붙는 원기소가 밴 듯한, 쇠꼬챙이로 굴렁쇠를 굴리는 듯한 그런 소리와 냄새를 듣고 느낀다.

노래 속의 권투선수는 링을 떠나 고향의 집으로 가고 싶다. 하지만 때려서 상대를 쓰러뜨리거나, 맞아서 자신이 쓰러질 때까지 그의 발목을 붙잡는 뉴욕을 떠나지 못할 것임을 잘 안다. 이제 가사는 끝나고 허밍이 회오리치듯 반복된다. 도합 20번의 la-la-la-la-la 아니, lie-lie-lie-lie-lie

그리고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다가 마지막으로 한 방의 핵펀치에 정통으로 맞아 철퍼덕 링 위에 나가떨어진 듯, 그래서 대전환을 이루며 이젠 더 이상 쓰러질 필요가 없는 그런 절대평등의 한 세계로 나아간 듯 마무리된다. 넋두리하듯 거짓말-거짓말-거짓말이라고 거짓말의 탑을 쌓다가 이내 잦아드는 것이다. 노래가 끝났는가, 참으로 수상한 시절. ‘The Boxer’의 소나기 펀치를 맞고 잠시 이승을 비스듬히 잠깐 쳐다보면서 그저 내 깜냥으로 생각해 보았다, 세상은 한순간의 거짓말!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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