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볼프보다 슈베르트를 듣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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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의 작품은 지극히 대중적인 수준이지만 당대의 공허와 소외감이 짙게 배어 있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서나 그러한 정서를 가진 사람들에게 거듭 선택되는 예술적 위엄을 갖게 된 것이다.

지난 4월 6일자 이 지면을 통해서 잠깐 언급했듯이, 1987년 7월 10일자 <경향신문>은 슈베르트가 한국 음악계에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대표적인 음악가라고 보도한 바 있다. 당시 발간된 월간 <객석> 7월호를 인용한 기사를 보면 당시 활동하던 한국의 작곡가, 평론가, 연주가 등 25명이 참여한 ‘과소·과대 평가된 음악가들’ 기사에서 슈베르트는 6명의 지목을 받아 ‘과대평가’되었다는 ‘불명예’를 안았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해방 전후부터 활동하여 2016년 4월에 타계할 때까지 한국 음악계의 중추 역할을 한 박용구는 슈베르트를 ‘청춘일기 같은 20대의 어린 곡’이라고 촌평했다. 작곡가 최동선은 ‘슈만이나 볼프의 가곡보다 깊이가 없고 기교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대중음악에 가까운, 수평적 차원 이상의 작품은 아니다’라고 평가절하했다.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던 김규태는 슈베르트의 가곡이 ‘멜로디가 간결하고 친근감을 주지만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보다 뛰어나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재평가’ 중에서도 압권은 음악평론가 김원구의 언급인데, 그는 ‘우리가 일본을 통해 음악을 수용해 그들의 게르만적 사고방식에 젖었기 때문’이라고 발생론적 접근을 하면서 ‘일제 치하에서 시벨리우스, 드보르작보다 슈베르트를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가곡을 슈베르트가 휩쓸어 지금도 그 영향으로 과대평가하는 습성이 남아 있다’고 했다.

재즈 아티스트 척 매지오니 / 경향신문 자료사진

재즈 아티스트 척 매지오니 / 경향신문 자료사진

가창력은 부족해도 애틋한 백지영 노래

엄밀한 학문적 접근은 아니지만, 당대를 대표하는 작곡가와 평론가들의 이 같은 촌평은 단지 슈베르트에 대한 지적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편협한 틀에서 음악을 듣고 있다. 더 다양하고 폭넓게 음악을 보아야 할 것’이라는 당대의 판단이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수용자의 관점에서, 즉 음악을 감상하는 입장에서 반드시 특정 음악가에 대한 ‘호불호’가 음악 양식사에 끼친 공헌만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사뿐만 아니라 정치사·철학사·문화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바그너의 장대한 오페라에 비하여 브람스의 작품은 적어도 양식의 측면에서 과거로 역행하는 고집스러운 전통주의의 면모를 보인다. 그래서 ‘바그너 대 브람스’라는 19세기 중후반의 논쟁에서 절대다수가 혁신의 바그너를 지지했고 흠모했다.

그러나 감상의 측면에서 어지간하면 두세 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바그너의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악극 대신 브람스의 어두침침한 실내악이나 겨우 5분도 채 되지 않는 한숨 어린 가곡이 오히려 더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양식과 철학의 측면에서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으나 언제든지 그 음악을 듣는 순간 늦가을의 깊이 모를 허무감에 젖게 만드는 브람스의 숙연함을 감상자들은 오히려 더 가까이 한다.

이렇게 비유하면 당사자들이 섭섭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우리는 다 안다. 윤민수나 BMK 같은 분들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음악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들이 강력한 성대의 힘으로 그 어떤 노래도 거침없이 부를 때 우리는 그들의 노래실력에 과연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성대의 힘이 과연 노래의 전부일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른바 ‘풍부한 가창력’과는 물리적으로 조금 거리가 있는 백지영 같은 가수의 끊어질 듯 애틋한 노래에서 우리는 깊은 가을밤을 날카롭게 스치는 쓰라린 감정의 상처를 더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그 가창력이나 양식의 실험이나 끝 모를 초월의 형이상학을 탐미하지만 동시에 애달픈 선율의 힘에 이끌리기도 하고 그야말로 대중적인 감정에 취하기도 한다. 음악은 엄밀한 학문적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쓸쓸한 공기처럼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다가 일상의 허전한 틈새로 스며들어와서 가만히 상처난 곳을 채워주는 미세한 흡착물이기도 하다.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음악을 듣는 건 누군가의 한숨을 듣는 일

다시, 슈베르트 얘기를 해보면 당대 독일인들의 낭만적 허무주의가 그의 가곡의 지배적인 정서다. 당시 낭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감정적 특징을 묘사할 때마다 항상 ‘향수’나 ‘고향 상실’이라는 단어를 넣곤 하였다. 이때의 향수는 호적상의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노발리스가 말하였듯이 “어디에서나 집처럼 느끼고 싶은 충동” 또는 “어디에나 있으면서 아무 데도 없는 고향적인 세계에 대한 꿈”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향에 대한 향수(hiemweh)와 먼 곳에 대한 그리움(fernweh)은 낭만주의자들의 공통된 감정이었다.

멀고 먼 낯선 곳, 현실적 시공간의 느낌이 잠시 사라진 정처 없는 곳. 슈베르트의 가곡, 특히 <겨울나그네>는 ‘앙시엥 레짐’, 즉 시민혁명과 나폴레옹 혁명을 꺾고 다시 권좌를 차지한 구체제의 복권 시기의 쓸쓸하고 허무한 시민 지식인의 허탈한 정서를 담아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음악사적으로는 지극히 평범하고 대중적인(실제로 슈베르트는 대도시 빈의 술집이나 카페에서 시민들이 흥얼거리는 선율에서 작곡의 모티브를 채집했다) 수준이지만 당대의 공허와 소외감이 짙게 배어 있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서나 그러한 정서를 가진 사람들에게 거듭 선택되는 예술적 위엄을 갖게 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재즈 아티스트 척 맨지오니를 자주 듣는다. 1940년 미국 뉴욕주의 로체스터에서 태어나 그 도시의 이스트맨음악학교에서 재즈를 익힌 척 맨지오니는 형과 함께 ‘재즈 브라더스(Jazz Brothers)’로 시작을 하였다가 당대의 거장 디지 길레스피나 마일스 데이비스의 영향 아래에서 프로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가 그의 전성기다. 1977년 앨범 이 세계적인 히트를 했고, 그 시절 인기 있었던 국내의 음악 프로그램 ‘황인용의 영팝스’의 시그널 뮤직으로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에미상 수상작인 ‘Give It All You Got’은 1980년 동계올림픽 주제곡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그렇기는 해도 척 맨지오니가 당대의 실력자들처럼 재즈의 세계적 확산이나 실험적 모색의 길을 개척했느냐 하면, 그런 비평적 측면에서 그는 다소 인색한 평가를 받아왔다. 키스 자렛이나 팻 매스니의 실험 혹은 존 존(John Zorn) 같은 아방가르드에 비하면 확실히 척 맨지오니의 앨범들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히트를 한’ 대중음악가에 가깝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음악, 특히 영화 <산체스의 아이들> OST를 듣고 또 듣는다. 멕시코의 비참한 마을, 그 허름한 빈민가, 신의 블랙 유머에 의해 누군가는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나야만 되는 그을린 곳.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앤소니 퀸이 주연을 맡은 영화인데, 다 해진 축구공을 차고 노는 아이들의 정경은 일순간 마음을 무겁게 한다.

영화 내내 주제 선율은 때로는 거침없는 행진곡이 되기도 하고, 아이들의 합창이 되기도 하고, 쓸쓸한 마을을 뒤덮는 비운이기도 하고, 빈민가 사람들의 공허한 눈빛이 되기도 한다. 이 유명한 주제 선율이 더러 대중적인 행사에서 지나치게 힘이 넘치는 방식으로 공연되기도 하는데, 그마저도 척 맨지오니의 대중성이 입증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의 낮게 깔리는 슬프디 슬픈 선율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한숨이 된다. 요컨대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음악을 들으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한숨을 듣는 일이다. 재즈 양식의 혁신적인 개척자는 아니지만 고교 1학년 때 들었던 척 맨지오니의 ‘산체스네 아이들’을 여전히 또 듣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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