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트 피아프 ‘사랑의 찬가’-주저하지 않고 나아가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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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노래]에디트 피아프 ‘사랑의 찬가’-주저하지 않고 나아가고 있나

불투명함, 결기와 노력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결과, 예측할 수 없는 미래. 그러니까 내가 십대시절 가장 두려워하고 경멸했던 것이다. 힘을 주고 머리를 굴려 타당하고 명백한 것만을 실행하고 즐겨야 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지냈다. 아마도 고향인 평안북도에서 바리바리 식구들과 짐을 챙겨 남쪽으로 넘어와 갖은 고생을 하자마자 곧 한국전쟁을 겪고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살아왔던 부모님의 영향 안에서 자란 덕일지 모르겠다. 안전하게 남들처럼. 마치 가훈처럼 교육받던 그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은 시작되었고, 그것은 알 수 없고, 노력해서 쟁취할 수 없는 어떤 격한 감정의 구렁텅이를 향한 내 인생의 첫걸음이었다. 불안했지만 즐거웠고 미지의 시간들이었지만 나의 감정과 이성은 매일매일 확장되었다. 시작이 어려워서 그렇지 부모님과 어른들이 정해준 나의 일과표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향해 전진했다.

그리고 고3이 된 어느 날. 사지선다의 명백한 답을 고르듯 입시가 끝나면 다시 만나자며, 지금의 시간들을 언젠가 서로를 원망하게 될 거라며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정답을 외치듯 이별을 고하며 12세 교육부 추천 청소년 건전영화를 찍었다. 그날. 오랜만에 학교 도서관의 자리를 차지했다. ‘어른스럽기도 하지. 아직 늦지 않았을 거야. 열심히 공부하자’, 가끔 혼자 어른인 체하던 그 말투며, 보란 듯이 언제나 제 몫은 거침없이 잘하던 그 건방이며, ‘그래 저 포도는 셔!’라며 참고서를 뒤적거렸지만 심장 저 안쪽이 계속 아려왔다. 급하게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가 수록된 앨범 표지. / EMI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가 수록된 앨범 표지. / EMI

함께 놀던 동시 상영극장, 분식집, 만화가게를 지나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배기에 섰다. 집집마다 진한 라일락 향기가 넘실거렸고, 텔레비전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언덕 위 어디선가 전자오르간 소리가 들렸다. 언니였다. 당시 노예살이 같은 병원 인턴 생활을 하던 언니는 스트레스 해소로 전자오르간 연주를 즐겼고, 그날도 이웃집들을 평정하며 연주를 하고 있었다. 들은 적이 있는 연주곡이었다. 가던 길을 멈췄다. 연주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눈물이 거침없이 흘렀고, 그날 밤 언니는 내 꼬락서니에 겁을 먹었는지 불평 한마디 없이 같은 곡을 오랫동안 반복하며 연주했다. 에디트 피아프의 목소리로 유명한 ‘사랑의 찬가’였다.

다음날 아침 레코드 가게에 가서 에디트 피아프의 테이프를 사서 또 며칠을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영화 <낮은 목소리>의 상영을 위해 파리에 머물던 때. 아침나절, 생제르맹 역과 뤽상부르 공원 사이의 어느 카페에서 난 무방비 상태로 다시 이 노래를 들었다. 그러곤 나도 모르게 페르 라쉐즈 묘역의 코뮨 전사의 벽을 지나 에디트 피아프의 묘 앞에 섰다. 문득 그녀의 묘비와 하늘을 바라보다 여전히 난 그때처럼 어떤 벽 사이에서 그 다음을 연소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서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그리고 지금도 시나리오를 탈고하거나 혹은 촬영이 끝났을 때 집으로 돌아와 이 노래를 듣는다. 연소했는가, 혹은 여전히 주저했는가….

<변영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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