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자는 웁니다-불초한 자식의 씻을 수 없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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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노래]불효자는 웁니다-불초한 자식의 씻을 수 없는 한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니를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도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못 믿을 이 자식의 금의환향 바라시며 고생하신 어머니여. 드디어 이 세상을 눈물로 뜨셨나요. 그리운 어-머-니.”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가요의 가사 1절과 2절이다.

‘두주불사’ 별호가 붙을 정도로 술깨나 즐기던 젊은 시절 나는 취기가 오르면 으레 이 노래를 2절까지 완창을 했다. 요즘도 노래방에라도 가면 이 노래는 꼭 부른다. 나는 가사 중 ‘어머니’를 ‘아버지’로 바꿔 부른다. 1절에서는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대목에서 목이 메어 부르고, 2절의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리느라 마저 마치지 못할 때가 많다.

아버지는 내가 서른여덟 되던 해 1월 초에 요즘 같으면 청년 축에 들 예순넷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소생 6남매와 일찍 작고하신 두 형님의 소생들까지 총 12명을 양육하셨다. 시골이지만, 아버지가 명의로 소문난 덕분에 경제력이 뒷받침돼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 슬하 12명 중 맏이인 내가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오면서 사촌 포함 동생들도 줄줄이 서울로 진학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더 힘드셨을 것이다. 맏이인 나와 아버지가 26년 차이가 있었으니까 스물여섯부터 예순넷까지 38년 동안 아버지는 자식과 조카들 양육하시느라 정말로 노래 가사처럼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 사셨다. 그리고 너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자식들의 금의환향을 못 보시고 눈을 감으셨다.

12명 중 맨 막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합격한 1982년 말, 아버지는 “아이고! 그동안 힘들었다. 막내 대학 졸업까지 시켰으니 나도 이제 양옥으로 2층집도 하나 짓고 거기서 쉬엄쉬엄 살아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더니 그 다음해 1월 초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아마도 38년 동안의 생활 리듬이 깨지면서 몸이 고장났던 것 같다.

막내는 대학 갓 졸업, 맏이인 나는 쥐꼬리 월급으로 빠듯이 살아가는 공무원. 효도를 돈으로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 자식들이 제 돈으로 맛있는 외식도 한 번 제대로 못해드렸는데 그만 돌아가셨다. 자신의 소임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훌훌 털고 떠나신 것 같아서 더 가슴 아프다. 좋아하시던 해파리냉채를 맛있게 하는 요리집에도 못 모시고 갔고, 해외여행도 한 번 못 시켜드린 것이 한으로 남아있다. 그러니 내가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불효자는 웁니다’를 원래 가사대로 불러야 할 일이 또 있다. 이번에는 어머니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자식들이 사는 서울 집들은 답답하고 친구가 없어서 재미도 없다고 하시며 시골생활을 고집하셨다. 사실은 금실이 좋았던 아버지가 지어 놓고 떠나신 새 집에서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살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그 집에서 27년을 ‘독거’하신 어머니가 6년 전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어느 가을 저녁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사고 발생 후 12시간이 넘어 발견하는 바람에 회복을 시켜드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노인의 ‘독거’는 위험한 일이다. 지금은 의식불명의 상태로 콧줄을 꿴 채 6년째 요양병원 병상에 누워 계신다.

어머니의 사고를 겪고 나니 일찌감치 억지로라도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올라왔어야 했다는 후회가 든다. 그러나 후회는 백번 천번을 해도 소용없다. 자식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부모의 ‘독거’는 자식들에게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길 수 있다.

<정세현 한반도평화포럼 상임대표·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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