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보다는 브람스적인 ‘허연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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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시인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발이 편한 구두를 신어본 적이 없었다.” 바그너라면 신발을 찢어버리거나 반품시켰을 것이다. 브람스는 억지로 불편한 구두에 발을 우겨넣고 걸어다녔다.

소설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시인에게는 시인만의 눈빛이 있다. 소설가들은 그들의 눈빛을 가릴 줄 알고 숨길 줄 알고 다른 마음인 듯, 무심한 듯, 관심 없다는 듯 연기할 줄 안다. 그래서 이야기를 낚아채기 위한 그들의 눈매를 금세 알아보지 못하는 수가 있다. 반면, 시인의 눈빛은 숨겨지지 않는다. 가려지지 않는다. 연기하는 눈빛이라면 시인이 아니다.

연기하거나 숨기지 않는 시인의 눈빛
몇 해 전 어느 문학평론가의 상가에 앉아 있었는데, 누군가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저명한 문학평론가의 슬픈 일에 문상을 온 사람이므로 굳이 묻지 않아도 그가 문학을 업으로 삼는 자임에 틀림없었겠지만, 슬프고 어색한 장소에서 낯선 자를 처음 마주 보았는데 한순간에 나는 그가 시인이라고 직감했다. 날카로운, 슬픈, 메마른, 서늘한 시를 쓰는 자임에 틀림없다, 생각했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누군가 소개를 시켜줘서 인사를 나누고 보니 뜨거운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의 허연 시인이었다. 오랜만에 그 시의 일부를 읽어본다.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한 브람스의 1번 교향곡 음반(왼쪽)과 브람스의 클라리넷 오중주 음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한 브람스의 1번 교향곡 음반(왼쪽)과 브람스의 클라리넷 오중주 음반.

시인의 이 시집과 더불어 <불온한 검은 피>라는 시집도 멀리 두지 않고 팔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두고 마음이 무슨 까닭인지 서걱거릴 때마다 펼쳐보곤 하는데, 21세기의 기린아들이 파격의 언어로 질주할 때 허연 시인은 더러 그렇게 격을 파하는 구도가 없지는 않으나 대체로는 도회지의 오랜 서정시들이 세파와 유행의 격정에도 불구하고 견실하게 지켜온 틀을 견지한다. 물론 손택수나 문태준의 서정시와는 조금 결이 다른데, 그들의 시가 도회지 바깥에서 회한의 힘을 찾고 있다면 허연은 도회지 안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지하철 공사장에서, 빌딩 사이에서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을 찾아내려 한다. 무더위! 한밤중에도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혹서의 계절이니 비록 휴가철이나 도심지가 조금은 비었다고는 하나 바로 그 때문에 작열하는 태양을 피하기도 어려운 이즈막에 도심을 배회하는 허연의 견고한 서정시는, 비록 몸은 아닐지라도, 마음 깊은 곳만은 서늘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를테면 <불온한 검은 피>에 수록된 시 ‘철로변 비가(悲歌)’의 한 구절.

내 여자는 내게 나쁜 놈이라는 말을 던지곤 막차를 타 버렸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렸던 화산재. 지독하게 뜨거운 반문명의 노래를 잊기로 했다. 여름날의 모든 꿈들 그 지겨운 것들.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브람스 음악
말하자면 허연의 시는 바그너적이지 않고 브람스적이다. 브람스의 어린 시절은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독학자였음에도 책 속에 파묻혀 지낸 시간이었다. 스스로 회고하기를 “책을 사는 데 아낌없이 대부분의 돈을 썼으며, 책이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능한 한 많은 책을 읽었으며, 아무런 지침도 없이 닥치는 대로 아주 저급한 책에서부터 최고의 양서까지 섭렵”했다.

브람스는 19세기 중엽 북유럽에 유행병처럼 번진 ‘교양 시민’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밑에서>에 잘 나타나 있듯이 정치적 시민(프랑스)이나 경제적 시민(영국)이 되지 못한 독일계 시민들은 신학, 철학, 음악 등에 대한 집요하고도 과잉된 지적 욕망을 통해 문화적 시민이 되고자 했다. 브람스는 평생 클라라에 대한 정념을 앓았고, 그 나머지 감정들을 오직 독서와 사색과 음악에 집중했다. 그것이 도달한 생의 소실점은 짙은 허무주의! 그가 만년에 쓴 <네 개의 엄숙한 노래>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는 구약성서의 가장 비참한 허무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독일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

독일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

당시는 바그너가 대세였다. 브람스는 한 세대 위의 음악가인 베토벤의 정신이 위기로 치닫는 유럽을 치유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 여겼고, 그래서 베토벤의 악보를 되새기고 그 유산에 걸맞은 교향곡을 작곡하기 위해 무려 1번 교향곡을 20년 동안이나 어루만졌지만 모든 예술적 질서를 파괴하고 모든 음악적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수 세기에 걸친 유럽의 구질서까지 뒤흔들어 버리고자 했던 바그너가 한 시대를 풍미하던 때였다. 신독일악파, 즉 리스트를 시작으로 바그너, 브룩크너, 볼프 등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혁신파들이 오래된 형식을 낡은 형식으로 몰아세웠다.

그러면 그럴수록 브람스는 리스트의 현란한 기교나 바그너의 다이너마이트 같은 문명 혁신의 사상보다는 베토벤의 악보에 담겨 있는 세계시민주의라는 전통사상에 몰입하였다. 그 결과가 20대 초반에 구상하여 40대 초반에 발표한 1번 교향곡인데, 전통주의자인 에두아르드 한슬릭 같은 비평가가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이라고 극찬까지 하였으나 이미 베토벤의 생애로부터 한 세대 이상의 격차를 지닌 혁신파들은 한슬릭이 극찬한 바로 그 내용이야말로 브람스가 베토벤을 단순히 반복했다는 증거라고 비판했다.

음악사적인 측면에서 바그너가 끼친 영향은 브람스를 압도한다. 바그너는 단지 악극이라는 형식의 창조만이 아니라 그 장대한 악극을 통하여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같은 남유럽 중심의 구질서를 타파하고 강렬한 비극적 정념(니체)으로 기존의 기독교 문명의 관념을 찢어버리고자 했다. 바그너는 독일 영웅 무훈담과 북구 전설의 신비주의를 총체적으로 결합시켜 19세기 중엽 이후 독일 전역에 팽배한 민족주의를 새로운 기운으로 더욱 고양시켰다. 이렇게 신유럽 질서를 꿈꿨던 바그너의 음악 실험이 히틀러라는 20세기의 악령으로 이어졌다는 엄연한 사실은 혼란한 시대에 예술가의 형식 실험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거듭 생각하게 한다.

그런 판단 여부를 떠나서, 누가 더 감동적인가, 하고 즉자적으로 묻는다면 아무래도 브람스를 먼저 꼽을 수밖에 없다.

바그너의 작품도 물론 음악 미학적 감동만이 아니라 음 그 자체가 빚어내는 힘들이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길고도 깊은 아리아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연인 젠타가 부르는 아리아, <탄호이저> 서곡의 넘실대는 현들. 그러나 브람스의 만년작 <클라리넷 오중주>가 들려주는 한 인간의 깊고 짙은 허무주의의 비참함에 견줄 수는 없다. 전통의 형식 안에 스며들어 있는 흔들리는 인간의 바스라지는 슬픔, 그것이 브람스의 여러 곡들에 묻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음악학자 어니스트 뉴먼이 “브람스는 진정 한 사람의 철학자이며, 그의 가장 훌륭한 철학은 그의 영혼의 근본을 이루는 구슬픈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브람스는 1897년 4월 3일 세상을 떴다. 4월 6일에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북독일의 항구 도시 함부르크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이 음악가의 죽음을 추도하기 위해 멀리 파리나 런던에서도 조문객이 찾아왔다. 작곡가 드보르작과 그리그가 장례식의 횃불을 들었다. 장례식이 엄수되는 동안 함부르크 항구에 정박했던 모든 배들은 쓸쓸히 반기를 게양했다.

허연 시인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발이 편한 구두를 신어본 적이 없었다.” 바그너라면 신발을 찢어버리거나 반품시켰을 것이다. 브람스는 억지로 불편한 구두에 발을 우겨넣고 걸어다녔다. 브람스의 음악은 바로 그런 자들을 위한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음악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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