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덴바움 예술감독 원형준 “내 음악은 일제 침략과 전쟁·분단을 치유하는 것”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기자는 “‘필요하다면’ 염라대왕도 만나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직업적 지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인터뷰 후 기사를 작성해 보도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이유로 실행하지 못한다. 물론 이는 변명이다.

북한은 7월 17일 ‘남북 언론의 왜곡·비방보도가 남북 긴장관계를 높이고 있다’는 판단으로 6·15공동선언실천 언론분과위원회를 통해 남북 언론인 모임을 제안했다. 이에 우리 측 기자들은 북한에 답장을 보내려 했는데, 통일부는 접수조차 거부했다. 명백한 행정기피로 직무태만이다. 과거에는 신고만 하면 팩스통신이 가능했다. 결국 국가보안법이 두려운 남측 기자들은 7월 21일 “통일부가 남북 언론인들의 실무접촉을 불허한 것은 남북교류협력법을 정면으로 위배한 폭거로 강력 규탄한다”는 성명서만 내고 주저앉고 말았다.

염라대왕이라도 만나야 하는 직업적 숙명을 가진 기자들조차 북한 누구도 접촉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은 일부 종교인들만 순교자처럼 ‘처벌’을 감수하고 북한 종교인을 만날 뿐이다. 남북은 그야말로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꽉 막혀 있다.

[원희복의 인물탐구]린덴바움 예술감독 원형준 “내 음악은 일제 침략과 전쟁·분단을 치유하는 것”

일본 원폭 현장에서 조선인 영혼 위로
이런 콘크리트 장벽을 한 용감한 젊은 클래식 음악가가 뚫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원형준(40)이다. 7월 19일 그는 이 더위에 일본 나가사키 원폭 투하 현장과 하시마 섬(군함도)에서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 영혼을 달래기 위해 바하의 ‘사라방드’와 ‘고향의 봄’을 연주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로 대략 조선인 10만명이 피폭해 5만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군함도에서는 징용으로 끌려가 석탄을 캐던 조선인 800여명이 죽었다.

나가사키에는 1979년 8월 9일 한국이 세운 한국인 희생자 위령탑이 있다. 그 위령탑 옆에는 북한 조총련이 세운 조선인 희생자 위령탑이 있다. 규모면에서 한국의 것이 훨씬 크고 호화롭지만, 1959년 12월 8일 북한이 세운 것이 더 오래됐다. 비록 남북이 각각 세운 위령탑이지만 원래 하나였던 영혼은 그의 ‘고향의 봄’ 연주를 뜨거운 눈물로 들었을 것이다.

이튿날인 20일 그는 귀국하자마자 기자와 만났다. 그는 “군국주의 상징물이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관광지가 되고, 평화공원 안에서 왜 원폭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면서 일본의 역사 숨기기를 한탄했다.

그는 서울 예원학교 재학 중 미국 줄리어드 음악 예비학교로 유학해 줄리어드 음대와 메니스 음대에서 수학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경향·이화 콩쿠르 1등, 킹스빌 국제 콩쿠르 1등, 로즈메리 특별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서울시향·메서피쿠아필하모닉 등과 협연하고, 코리안심포니·인천시향·KBS교향악단 객원 악장으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턱시도에 넥타이를 매고 격조 높은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것보다 원폭이 투하됐던 폐허 위에서, 억울하게 숨진 이들의 위령비 앞에서, 독립문공원 앞에서, 비무장지대(DMZ) 판문점에서 공연하는 것에 더 매달린다. 그는 음악을 통해 사회 참여, 평화·치유운동에 나서면서 ‘남북청년 연합오케스트라’를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 이를 위해 2009년 ‘린덴바움 뮤직’을 창단해 예술감독을 맡았다. 린덴바움은 독일어로 ‘보리수’를 말하며 ‘나무와 생태계가 조화를 이루는 평화’를 의미한다.

그가 이런 형태의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계기는 인생의 ‘음악적 좌절’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줄리어드 음대 유학 중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맞았다. 유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대학 2학년 때 휴학하고 귀국한 그는 한동안 방황하다가 서른이 넘어 군대에 갔다. 설상가상 보병대대에 근무하면서 어깨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 의병제대했다.

“이때 나는 음악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치스러운 것이라는 좌절감과 어깨 부상으로 바이올린을 못할 것이라는 실의에 빠져 있었다. 내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스승이 일본 삿포로에서 열리는 퍼시픽 뮤직페스티벌을 소개해 그곳을 체험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봤다.”

유명한 지휘자 번스타인이 만든 퍼시픽 뮤직페스티벌은 젊은 연주자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세계 27개국에서 젊은 연주자를 선발해 연습도 하고 연주투어도 한다. 이에 착안해 만든 것이 ‘린덴바움 페스티벌’이다. 그는 2009년 린덴바움 첫 페스티벌에 영국 로열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샤를 뒤투아를 초빙했다. 그리고 2010년 두 번째 페스티벌에서 북한에 남북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제안됐다. 뒤투아가 평양을 방문하는 등 성사될 뻔했지만 남북관계 경색으로 무위로 돌아갔다.

7월 19일 원형준 감독이 일본 나가사키 원폭 투하 현장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사진 왼쪽) 지난해 8월 13일 서울 독립문공원에서 열린 남북합동연주회 남측 공연. 그러나 이틀 후 합동공연은 좌절되고 말았다.(사진 오른쪽)

7월 19일 원형준 감독이 일본 나가사키 원폭 투하 현장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사진 왼쪽) 지난해 8월 13일 서울 독립문공원에서 열린 남북합동연주회 남측 공연. 그러나 이틀 후 합동공연은 좌절되고 말았다.(사진 오른쪽)

남북청소년 오케스트라 제안 무산
사실 남북청소년 오케스트라는 유대인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1999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출신 청소년으로 만든 오케스트라 ‘서동시집’(West-eastern Divan)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는 “바렌보임은 클래식계의 노벨평화상 후보로 존경받는다”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동·서도 하는데, 한반도 남·북이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사실 음악이 현실에 깊숙이 개입한 예는 많다. 원 감독은 “쇼팽은 <폴로네이즈>로, 시벨리우스는 <핀란디아>로, 베토벤은 <9번 교향곡>으로 사회에 참여했고, 번스타인도 동·서독 냉전을 끝내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실제 베토벤의 <9번 교향곡> 4악장에 시인 실러가 가사를 붙인‘환희의 송가’는 동·서독이 통일되기 전까지 사실상 국가로 활용됐다.

그가 음악을 통한 남북 화해에 천착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가족적 인연이다. 영자신문인 <코리아헤럴드> 사장과 신문협회 회장을 지낸 그의 할아버지(원경수)는 이북(황해도) 출신이다. 그는 “할아버지가 흰 여자 고무신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을 자주 봤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증조 할머니)가 신던 고무신이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북에 있는 어머니 흰고무신을 어떻게 입수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할아버지가 그 흰고무신을 소중히 쓰다듬는 모습을 자주 봤다.

원 감독은 이때부터 남북 문제와 관련해 적잖은 공연을 추진했다. 2011년에는 유엔 북한대표부를 통해 평양공연을 허가 받았으나 역시 정치적 이유로 좌절됐다. 2013년에는 영국에서 한반도 평화 연주, 지난해에는 미국 하버드·프린스턴·컬럼비아대학 등에서 남북 평화의 하모니를 주제로 강연과 간이 연주회도 했다. 그는 “처음에는 몰랐지만 점차 희망이 보였다”고 말했다.

원 감독은 야심차게 지난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남북합동연주회를 기획했다. 우리 통일부는 유엔군사령부도 허락하지 않고, 북한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러나 그는 유엔사 허가를 얻고, 베를린 북한대사관을 통해 북한의 동의를 얻어냈다. 재능기부로 130여명의 연주자까지 모았다. 물론 우리 정부 지원은 한푼도 없었다.

“남측은 서울 독립문에서 1차 공연을 갖고 판문점으로 올라가고, 북측은 백두산에서 1차 공연을 갖고 판문점으로 내려오는 대규모 공연이 마련됐다. 그때까지 통일부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북한 조선중앙TV가 북한 연주자들이 백두산에서 판문점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린덴바움 계획대로 추진되자 통일부가 깜짝 놀랐다. 8월 13일 독립문 앞에서 130여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과 ‘아리랑 환상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8월 4일 목함지뢰 사건이 터졌다. 판문점을 관할하는 유엔사도, 우리 국방부와 통일부도 곤란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남북관계는 긴장으로 치달으며 운명의 15일이 왔다. 단원들은 버스를 타고 판문점으로 향했다. 북한도 판문점으로 내려왔다. 그는 “그때 우리만 올라갔으면 광복 70주년 음악을 통해 함께할 기회였는데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통일대교 앞에서 2시간을 기다린 끝에 ‘못 건너간다’는 통보를 받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남북합동연주회 판문점 앞에서 발길 돌려
“음악회를 못해서 허망한 것이 아니라, 광복 70주년인 8월 15일 왜 대한민국 사람이 대한민국 영토에 못 들어갈까 생각이 나더라. 그때 깨달은 것이 우리 안중근·윤봉길·유관순 열사의 희생도 있었지만 광복은 미국의 원자폭탄에 의한 일본의 항복으로 얻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 ‘한스런’ DNA가 70년이 지나 통일의 발목을 잡는구나, 그때 우리가 자주적으로 광복을 이뤘다면 통일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도 범민족통일음악회 등 음악을 통한 남북 화해·교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지속되지 못했다.
“과거 범민족통일음악회 등의 남북 음악교류가 있었지만 대부분 정상회담 이후 문화적 이벤트 성격이 짙었다. 정치적 합의를 전제로 공연이 이뤄지다보니 정치적 갈등이 닥치면 중단되는 한계가 있었다. 내가 번번이 좌절됐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이 정치를 뛰어넘어야 한다.”

지금 남북관계는 과거보다 훨씬 악화되고 서로의 불신만 높이 쌓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 보는가.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이 하는 일은 ‘조율’이다. 악장은 처음 오보이스트를 일으켜 세워 ‘라’ 소리를 내게 한다. 그리고 전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이 오보에 ‘라’에 음을 맞추도록 한다. 그렇게 음을 맞춘 다음 지휘자가 나와 곡의 빠르기와 강약을 조절하는 것이다. 화음의 기본은 다른 악기인 오보에를 경청하고 거기에 조율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 즉 상대를 경청하는 것이다.”

그는 누구의 책임이라고 꼭 짚어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는 작년의 실망이 너무 컸던 탓인지 올해 남북 공동오케스트라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오는 8월 6일부터 9일까지 제주도에서 린덴바움 페스티벌을 연다. 그렇다고 그의 꿈 남북청소년 공동오케스트라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추진해 반드시 이뤄낼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전 통일의 ‘통’자도 안 쓴다. 그건 제 능력을 벗어난 문제다. 난 내 분수를 안다. 나는 통일 전 분단을 얘기하고 싶다. 그러면 6·25전쟁의 상처, 일제 침략의 아픈 상처가 있다. 그 상처를 나의 음악을 통해 공감하고 치유하고 힐링을 주는 것, 그것이 전부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gnhyam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원희복의 인물탐구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