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조작으로 머리가 좋아진다 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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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는 첨단과학의 힘을 빌려서까지 지금보다 더 머리가 좋아질 필요가 있을까? 보다 중요한 문제는 설사 그러한 욕망이 충족된다 한들 우리가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영양주사를 맞는다는 수험생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최근 언론 보도를 보니 이제 일부 초등학생들마저 이 대열에 동참하는 모양이다. 경시대회를 앞두고 부모의 성화로 소위 뇌혈류 순환을 도와주는 수액주사를 맞는단다. 물론 의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어이없다고 웃어넘기기에 앞서 이러한 세태는 인위적인 지능 향상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얼마나 보편적인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이러한 기대감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깊고 푸른 바다(Deep Blue Sea)>(1999년)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머리가 인간 뺨치게 영악해진 거대상어는 괴수 같은 파워에다 뛰어난 지능을 동원하여 방심한 연구원들의 사냥에 나선다. SF에서 과학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동물이나 인간의 지능을 껑충 끌어올리는 이야기는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유전공학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기에 H. G. 웰즈의 소설 <모로 박사의 섬(The Island of Doctor Moreau)>(1896년)에서는 외과수술과 심리요법(자신이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강박적 집착을 유도하는 일종의 세뇌)을 동원해 온갖 야생동물들의 지능을 인간에 버금가게 끌어올린다. 이런 식의 개조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시체 조각들을 이어 붙여 전기충격으로 되살리는 방식과 오십보백보라서 과학적 개연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모든 사람의 아이큐가 500으로 치솟는다면, 그 세상은 행복할까. 폴 앤더슨의 소설 <뇌파>의 표지.

모든 사람의 아이큐가 500으로 치솟는다면, 그 세상은 행복할까. 폴 앤더슨의 소설 <뇌파>의 표지.

특수약물로 인간 지능 높이는 소설
반면 최근 가속페달을 밟아온 유전공학이라면 동물의 DNA에 인간의 것을 뒤섞어 일종의 중간자적 존재를 탄생시키는 일이 그리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단, 윤리적 논란은 별개 문제다.) 인간의 경우에도 줄기세포 연구의 진척으로 기억 감퇴와 치매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이 머지않은 듯하다. 뇌에 관한 지식이 쌓일수록 컴퓨터 CPU 속도를 개선하듯 뇌신경 네트워크의 정보전달 효율성을 높여 동물이건 인간이건 간에 지능을 한층 더 향상시키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최근의 한 연구는 지능 향상 방법에 관한 구체적인 실마리를 던져준다. 2015년 8월 영국 리즈대학의 스티브 클랩코트(Steve Clapcote) 박사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의 알렉산더 맥거(Alexander McGirr) 박사가 주축이 된 공동연구팀은 ‘신경정신약리학·Neuropsychopharmacology’ 저널에 인위적인 지능 향상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실었다.

이들에 따르면, 실험쥐에게 뇌에서 분비되는 PDE4B(phosphodiesterase-4B) 효소의 활동을 약물로 억제했더니(다시 말해 유전자 변이를 일으켰더니) 보통 쥐보다 학습 속도가 더 빨라지고 기억력도 더 좋아졌다. 이 효소가 억제된 쥐는 그렇지 않은 쥐보다 수조에 빠진 뒤 발판을 찾는 데 훨씬 앞선 기량을 보여준 것이다. 지능이 올라간 쥐는 고양이와 가까이 있어도 덜 두려워했고, 평소보다 밝고 열린 공간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이 노하우를 장차 인체에 적용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정신분열증, 그리고 알츠하이머 같은 뇌질환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실험 결과를 토대로 PDE4B 효소억제제가 개발 중이며, 동물실험을 거쳐 임상실험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다. 이보다 10여년 앞서 테드 창(Ted Chiang)의 단편소설 <이해(Understand)>(1991년)는 특수약물로 인간 지능을 끌어올리는 이야기를 다뤘다. 이 소설은 후천적으로 체내에 약물을 투여하는 방식만으로는 영속적인 효과를 내지 못한다고 한계를 그었는데, 현재 개발 중인 PDE4B 효소억제제가 만약 관련 유전자를 영구히 바꿔놓을 수 있다면 1회 투여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게 된다. 일단 이 약물은 지적 사고에 장애가 있는 환자의 치료용으로 개발되겠지만 향후 멀쩡한 정상인의 IQ 자체를 끌어올리는 데까지 응용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인간의 지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지능을 높인다고 무조건 좋기만 할까? 일찍이 SF에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사고실험을 많이 했다. 역사상 인위적인 지능 향상을 다룬 이야기의 효시는 영국 작가 프랭크 챌리스 콘스터블(Frank Challice Constable)의 <지성의 저주(The Curse of Intellect)>(1895년)다. 인간과 지적인 원숭이가 교대로 화자(話者)를 맡는 독특한 형식의 이 장편소설에서 인간 못지않은 지성을 갖게 된 원숭이는 끝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다. 지능이 높아진다 해서 행복지수가 오르기는커녕 도리어 더 참담해질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 최초의 작품이다. 이듬해 발표된 웰즈의 <모로 박사의 섬>에서도 야수의 타고난 본능과 후천적으로 주입된 인간성 사이에서 늘 오도 가도 못하던 반인반수의 공동체가 결국 임계점에 다다르자 그간 억압되었던 충동을 한꺼번에 분출하며 무너져내린다. 올라프 스태플든(Olaf Stapledon)의 <시리우스(Sirius)>(1944년)는 외과적 뇌수술과 특수호르몬 주입으로 웬만한 인간보다 더 총명해진 개 ‘시리우스’의 불행을 그린다. 시리우스가 애초 의도와 달리 단지 우수한 양치기 개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는 바람에 역설적이게도 인간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입지가 좁아진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지능 향상을 위한 동물실험이 과연 온당한가?’라는 소재를 통해 무소불위의 과학이 세상에 미칠 여파를 우려하는 내용 일색이다.

(왼쪽)H. G. 웰즈의 <모로 박사의 섬>의 삽화, (오른쪽)유전자 조작으로 똑똑해진 상어가 등장하는 영화 <딥 블루 씨>의 포스터.

(왼쪽)H. G. 웰즈의 <모로 박사의 섬>의 삽화, (오른쪽)유전자 조작으로 똑똑해진 상어가 등장하는 영화 <딥 블루 씨>의 포스터.

IQ 70과 IQ 185의 눈에 비친 세상
동물 지능의 업그레이드보다 훨씬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인간 지능의 향상이다. SF는 이 소재를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다룬다. 하나는 지능이 평균 이하인 사람을 정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상인을 천재로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다. 다니엘 키즈(Daniel Keyes)의 <앨저논에게 꽃다발을(Flowers for Algernon)>(단편 1959년/장편 1966년)은 전자의 고전적인 예로 유명한데, 2006년 우리나라에서도 이 소설을 원안으로 한 TV드라마 <하느님, 안녕하세요>가 제작, 방영되었다. 31살의 찰스는 IQ 70의 정신지체자다. 그렇지만 외과수술과 약물요법에 힘입어 IQ 185의 초천재로 거듭난다. 이 소설의 백미는 지능이 다른 두 자아의 눈에 비친 인간군상의 이중적인 모습이다. 정신지체자 찰스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자신이 좀 더 영리해져 실수를 하지 않게 되면 사람들이 자신을 전보다 더 좋아하리라 기대한다. 반면 상대성이론까지 한눈에 꿰게 된 초천재 찰스는 이제까지 주위 사람 모두가 멍청한 자신을 골려먹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가 정상인을 압도하는 지성을 드러내자 격려는커녕 오히려 배 아파하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그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IQ 70의 눈에 비친 세상은 행복하게만 보였다. 반면 IQ 185의 눈에 들어온 세상은 비열한 속물근성이 판치는 곳이다. 본질적으로 찰스 역시 앞에서 예로든 동물들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높은 지능을 얻어봤자 돌아오는 것은 전에 없던 정신적 고통과 회한뿐.

정상인이 천재가 된다 해도 안도하기에는 이르다. 폴 앤더슨(Poul Anderson)의 <뇌파(Brain Wave)>(1954년)는 단 한 사람이 아니라 인류 대다수의 IQ가 일제히 500까지 치솟는 이야기다. 원인은 2억5000만년 걸려 은하계를 일주해온 태양계가 갑자기 낯선 역장(力場)에 들어선 까닭이다. 알고 보니 원래 은하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간 지능은 IQ 500을 유지해야 정상이건만, 간간이 두뇌 신진대사 속도를 유독 떨어드리는 지대가 있는데 때마침 그곳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소설은 이러한 격변이 과연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지 묻는다. 더 똑똑해질수록 사람들은 더 지혜로워질까? 바람 잘 날 없는 국지전과 세계대전, 이념갈등과 계급갈등, 인종청소, 종파분쟁, 남녀불평등, 그리고 이해집단 간의 크고 작은 갈등 같은 것들이 단지 사람들의 지능이 올라간다 해서 누워서 떡먹기처럼 해결될까? 작가는 회의적이다. 지능의 향상이 사람의 약점이나 무지, 편견, 맹신, 그리고 야심 자체를 없애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술과 특수호르몬으로 인간보다 영민해진 개 이야기를 담은 SF소설 <시리우스>의 표지.

수술과 특수호르몬으로 인간보다 영민해진 개 이야기를 담은 SF소설 <시리우스>의 표지.

심지어 지능의 상향 폭주는 허드렛일을 하던 이들까지 삶의 의미를 골똘히 되돌아보게 만드는 통에 사회 기능이 마비될 지경이다. 불현듯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자신의 일이 얼마나 초라한지, 자신의 사고가 얼마나 협소하고 무의미한지 깨달은 수많은 웨이터와 공장 노동자들이 사표를 던진다. 그리고는 세상을 주유하며 철학을 공부한다. 웃을 일이 아니다. 그 바람에 생산시스템이 붕괴되어 인류는 당장 의식주의 수급을 걱정할 처지가 된다. 세상에는 IQ 높은 사람만 필요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지능이 높아졌다 해서 누구나 듣도 보도 못한 발명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는 예전 같으면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갑자기 너무 많은 생각이 밀려들어 감당할 수 없게 된 나머지 심한 신경쇠약에 걸린다. 설상가상으로 폭주하는 뇌 활동에 기진맥진한 사람들은 사이비 광신도가 되어 정신적 위안을 얻는다. 머리가 좋아질수록 현명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미쳐가는 현실, 이것이 바로 불완전한 인간의 한계가 아니겠는가.

너무 많은 생각에 신경쇠약 걸릴 수도
앞서 언급한 테드 창의 <이해>는 ‘지능의 상향 폭주’를 사회 일반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사례로 한정지었으나 시선이 삐딱하기는 매한가지다. 뇌사상태에 빠진 주인공이 특수 호르몬 주입으로 살아난다. 게다가 덩달아 IQ까지 상승한다. 보통사람이라면 머리 싸맬 문제들을 설렁설렁 해결할 수 있게 되자 그 매력을 잊지 못한 주인공은 약효가 떨어지기 무섭게 부작용을 무릅쓰고 마약환자처럼 지능 향상 실험에 골몰한다. 머리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욕망 또한 그에 정비례한다. 세 차례 약물주사로 이미 정상인의 사고를 한참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약을 도둑질까지 해서 체내에 주입한다. 예술과 과학, 그리고 사회의 본질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게 개안(開眼)이 되고, 주식시장과 세계 경제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주무를 수 있는 정점에 올라서서도 주인공은 정작 자신의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을 조절하지 못해 망가져간다. 이 작품은 마치 실제 경험담마냥 실제로 머리가 한없이 좋아진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고 메커니즘을 갖게 될지 단계별로 조리 있게 묘사하여 더욱 설득력을 높인다.

국내 작품 가운데에는 김현중의 단편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2010년)(이 단편은 황금가지에서 펴낸 한국 SF 단편선 <아빠의 우주여행>에 수록되었다)가 지능 향상을 학벌 위주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과 접목시켜 눈길을 끈다. 부자는 물론이고 서민까지 빚을 내서라도 자녀의 지능 향상을 위해 뇌수술을 하지 않으면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근미래 사회의 풍경은 오늘날 월 수강료가 아무리 천정부지로 올라도 강남 학원가에 줄지어 몰려드는 학생들과 열혈(?) 학부모들에 대한 자화상이다. 이 때문에 가난한 학생들 가운데에는 기 죽기 싫은 나머지 이마에 수술흉터 자국만 똑같이 내서 뇌수술 받은 척하는 부작용까지 생긴다.

과연 우리는 첨단과학의 힘을 빌려서까지 지금보다 더 머리가 좋아질 필요가 있을까? 보다 중요한 문제는 설사 그러한 욕망이 충족된다 한들 우리가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SF작가들은 그렇지 않으리라는 전망에 압도적으로 기울어 있다. 예컨대 PDE4B 효소를 비롯해 인간의 지능을 한층 개선할 수 있는 각종 약물과 유전자 조작기법이 단지 그것이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 곤란한 환자들을 돕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지혜, 그리고 그로 인한 더 많은 권력을 얻는 데 무분별하게 남용된다면 세상은 어찌 될까? 더구나 김현중의 소설에서처럼 부의 격차가 지능의 격차로 이어지는 이중의 불공평한 사회가 도래한다면 과연 인류는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가 유전자 복제의 오용을 우려하듯이 지능 향상 연구에 대해서도 이성의 눈으로 신중하게 바라봐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고장원 SF 평론가>

고장원의 미래의 속도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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